370화. 나아갈 길 (5)
당관이 연호정을 데리고 간 곳은 거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련된 연무장이었다.
야외 연무장이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서진 채였다. 무림맹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아직 맹 내에는 이처럼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공간들이 많았다.
연호정이 휘파람을 불었다.
“넓군요.”
“넓지.”
“잘 보수하면 군단급이라도 훈련할 수 있을 크기입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아직 본맹도 많이 멀었습니다.”
“덕분에 홀로 수련하기에는 제격이지.”
수련.
왠지 모르게 당관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는 언제까지나 오만하고 고고할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올라오라.”
“예.”
연무장에 올라선 연호정은 문득 바닥 여기저기가 파손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녹았군.’
부서진 동시에 녹았다.
독공(毒功)을 수련한 흔적이었다. 극히 미세한 흔적이지만, 연호정 정도의 안목이라면 확실히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한 흔적이기도 했다.
‘권장지각(拳掌指脚)이 주가 아니야. 그런 흔적도 있지만, 주는 암기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암기에 독기(毒氣)를 실어서 날린 흔적이군. 대단한데.’
단순히 독을 묻히는 게 아니라, 암기 자체에 독기를 침투시켜 타격 시점까지 유지하는 것은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운용 방식을 떠나 발경 구결 자체가 엄청나게 복잡할 것이다. 그것도 암기 한두 개면 모를까, 수십 개를 흩뿌리려면 눈이 돌아갈 만큼 복잡한 구결을 동시에 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래서 당가의 무공이 무섭다.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도 없고, 희대의 천재라도 대성하기가 어렵다. 독과 암기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아야 함은 물론, 그것을 무공에 녹이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과 두뇌가 필요하다.
‘아직은 부족해.’
흑암제 시절의 당관은 만독제(萬毒帝)라 불리며 무림의 공포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은 당관이 스스로를 철저하게 숨긴 결과였다. 만독의 제왕이라 불릴 만큼 독(毒)에 있어서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역량을 과시했지만, 실제로 그의 진짜 비기는 독이 아니라 암기였다.
‘만독제 시절에 비하면 아직 부족한 게 많다. 흔적이 그걸 말해 주고 있어. 하지만…….’
연호정이 다시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은 뒷짐을 진 채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던 모양이었다.
‘단계를 확실하게 밟아 가고 있다. 훗날 자신이 얻게 될 무적의 비기가 어떤 형태로 구현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
연호정은 내심 감탄했다.
‘천재로군.’
그 시절의 당관은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연호정은 흑도의 제왕이었고, 당관은 백도 무림의 이인자였으니까.
다만, 그가 익히고 있는 그 ‘전설적인’ 비기를 아버지인 당형에게서 전수하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완성되지 못한 비기. 그렇다면 현재 암왕 역시 이 무공을 보완 중이라는 뜻이겠지.’
완성하지 못한 무공을 자식에게 전수했다. 그만큼 이 무공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만독제 시절의 당관이 보여 준 ‘그 무공’과 지금의 흔적을 비교해 보면, 아마도 암왕의 도움 없이 그 홀로 깨우쳐 당가 역사상 최강의 비기를 탄생시켰을 확률이 높다.
당관이 말했다.
“너 정도 경지가 되면, 새로운 병기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여 실전에서 써먹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이 병기의 능력을 십 할 끌어내진 못하겠지만요.”
“그렇겠지.”
당관이 몸을 돌렸다.
순간 연호정은 움찔했다. 자신을 보는 당관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했기 때문이다.
“내가 네 아비도, 내 딸도 아닌 너에게 이 무공을 보여 주고자 하는 이유를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진심이었다. 이것만큼은 연호정도 당관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다.
당관은 조금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네 아비가 일호무장에게 선보였던 비기를 보았다. 실로 대단했지. 그런 무공은 누가 알려 줘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스스로 피를 토해 내는 노력과 궁구 끝에 얻어 낼 수 있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무공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아비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의미도 없으니까. 그저 끝없이 무도에 전념하여 그 절대의 일검을 손에 거머쥐었을 것이야.”
“맞습니다.”
“다만, 내 무공은 네 아비가 지닌 한 수와는 다르다.”
당관의 눈에 불이 붙었다.
“내 무공은 무수히 많은 형(形)을 갖고 있고, 일격이 아닌 난격과 연환격의 총합이라 복잡하기 그지없는 내공 운용, 그리고 진기 고갈을 끌어낸다.”
“…….”
“네 아비, 연가주의 깨달음은 지고하다. 적어도 검에 한해서는 그렇지. 문제는 그 깨달음이 검에 편중되었다는 것이다. 훗날 극에 이른 검도에 닿아 만무(萬武)에 통달하게 된다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은 내 무공의 부족한 점을 너만큼 잘 들여다볼 순 없을 것이다.”
놀라운 발언이었다.
당관은 자신의 무공을, 연위보다 연호정이 더 잘 봐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당사자에게 직접 말하고 있었다.
연호정은 크게 놀랐다.
당관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높게 평가하고 있을 줄도 몰랐고, 본인이 가진 무공의 약점을 대놓고 보여 줄 거라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네 아비의 무공은 무변(無變)의 순격(純擊)이고, 내 무공은 다변(多變)의 난격(亂擊)이다. 네 아비의 무공은 단순하나 강하고, 내 무공은 다채로우며 날카롭다.”
스르륵.
당관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츠츠츠.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진녹색 안개가 서서히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거대한 녹색 독사 두 마리가 그를 보호하고 있는 듯했다.
“전부 보여 주진 않을 것이다. 두 번 보여 주지도 않을 것이야. 다만 네가 보고 느끼는 바가 있다면, 그대로 말해 주었으면 한다.”
연호정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것이 흑백쌍룡을 얻은 제게 요구하시는 보답입니까?”
“그렇다.”
“둘을 얻고 열을 드리게 생겼습니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네 조언이 하나가 될지 열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물론 그렇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스릉.
날을 수거하는 칼집도 없는데, 쌍부를 들자 서늘한 소리가 울렸다.
“직접 받아 보겠습니다.”
“……?!”
당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무공을, 네 몸뚱이로 직접 받아 보겠다는 뜻이냐?”
“구결도, 법문도 모르는 무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상대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지요.”
“오만한 놈! 이 무공은 보통 무공이 아니다! 아직은 나조차 힘 조절도, 방위 조절도 되지 않아! 그만큼 위험한 무공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정면으로 부딪쳐 봐야겠군요. 만족스러운 보답을 드리기 위해서요.”
“……!”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러다 죽으면 제 역량이 부족한 탓이니, 가주님을 원망치는 않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과거, 연호정은 당관이 날린 우모침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니만큼, 말에 실린 무게감도 달랐다.
그리고 당관은, 연호정의 말에서 그 무게감을 느꼈다.
“그렇게 죽고 싶으냐?”
스르륵.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마치 평소에도 그런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처럼, 백룡부를 든 손은 자연스레 앞으로 내밀었고 흑룡부를 든 손은 우측 상체 앞에 고정되었다.
“시작해 볼까요?”
츠츠츠츠.
당관의 몸을 휘감고 있던 진녹색 안개가 서서히 그의 소매 안으로 스며들었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노려보던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기(毒氣)의 제어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극독은 담지 않을 것이니, 중독 증세가 일면 곧장 가부좌를 틀고 독을 몰아내라.”
“알겠습니다.”
“……멍청한 놈.”
치리리리리링.
일순 그의 소매 안에서 반짝거리는 쇠의 파편들이 줄을 지어 흘러나왔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거렸다.
‘허공섭물.’
놀랄 것도 없었다. 당관의 저 비기는 최소 허공섭물이 가능해야 구사할 수 있는 절대의 비기였다.
화르르르륵!
연호정의 몸에서 주작화기가 피어올랐다.
후우우웅.
반면 땅을 딛고 선 그의 두 발에선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호금기, 백호군림보가 자연스레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 두 가지 기운을 느낀 당관은 내심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기와 금기의 조화는 물론 그 강도 역시 대단해서, 연호정의 실력이라면 적어도 죽는 일은 없겠다 싶었던 것이다.
“시작한다.”
휘이이이잉!
물 흐르듯 원을 그리는 당관의 손을 따라, 번쩍거리는 암기의 길이 아름답게 움직였다.
‘화우공(花雨功) 초장(初章).’
치리링! 치리리리링!
엄지보다도 작은 비수 파편들이 부딪치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이미 본 적이 있는 비기임에도, 연호정은 몸이 절로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저 비기가 적을 단번에 쓸어 버리는 걸 보았지만, 자신이 직접 상대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번쩍!
당관의 동공에서 진녹색 광채가 터져 나왔다.
“……돌풍식(突風式).”
그 순간이었다.
휘이이이이이잉!!
일순 대기를 찢어발길 듯 무지막지한 강풍이 불어닥치며, 두 줄기 거대한 빛의 파편이 연호정의 전면으로 쏘아졌다.
‘……!!’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다르다!’
과거 만독제 시절의 당관이 보여 주었던 그 비기와 달랐다.
아니, 그 비기의 일종이었지만 내용이 달랐다. 초식으로 치면 그때의 초식과 완전히 상반되는 전방 직격의 공격인 것이다.
마치 수천 개의 쇠 비늘로 이루어진 두 마리의 거대한 이무기가 제각기 앞을 다투며 날아오는 듯했다.
‘이런 제기랄! 이 무공, 설마하니 식(式)마다 공격 범위와 방위가 다른 거였어?!’
막연히 기대하고 있다가 완전히 뒤통수를 맞아 버린 격이었다.
연호정이 재빨리 일 보를 밟았다.
콰앙!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하고 강력한 진각과 함께, 주작화기로 타오르는 흑백쌍룡부가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졌다.
주작공, 홍염육살공.
화우공, 초장 돌풍식.
두 개의 극단적인 살공(殺功)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정!
흑백쌍룡부가 그려 내는 무수한 초승달이 돌풍을 일으키며 쏘아진 비수의 파편들을 쳐 냈다.
실로 엄청난 속도였다. 제대로 다루는 것이 처음인데도, 연호정의 쌍부술(雙斧術)은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쩌저저저정! 피슉!
하지만 그 놀라운 쌍부술로도 모든 파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돌풍을 일으키며 들이닥치는 암기의 폭격, 그 숫자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천하의 연호정이라도 완전한 방어가 불가능했다.
쩌저저저저정! 피슉!
전면의 거의 모든 암기를 쳐 냈지만, 기이한 기류와 함께 도끼를 타고 올라온 암기가 연호정의 팔뚝을 스치고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퍼퍼퍽! 사사사사삭!
연호정의 양팔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의 암기가 그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치이이이익!
상처에서 희뿌연 연기가 올라왔다. 주작화기가 체내로 침투한 독기를 증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독기가 아니었다.
‘무슨 힘이 이렇게 강해?!’
쌍부에서 전해지는 충격이 실로 대단했다.
암기 하나하나에 무시 못 할 힘이 담겨 있었다. 그 암기를 수백 개나 쳐 내려니, 팔목과 팔꿈치에 이어 어깨까지 충격이 누적되고 있었다.
무서운 연환격이었다. 끝도 없이 몰아치는 비수의 파편들은 마치 흩날리는 꽃잎과 같았지만, 그 위력은 마치 쇠의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했다.
연호정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자칫 잘못하여 도끼를 내려놓는 순간, 저 무시무시한 암기의 폭풍에 상체가 수천 조각으로 난자되어 피 보라로 화할 것이다.
쩌저저저저정! 쾅!
수백 번의 도끼질로 돌풍식을 막은 연호정이 마지막 진각으로 휘어져 오는 암기의 방향을 하늘로 틀어 버렸다.
“후욱!”
연호정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이거 정말 만만치가 않군.’
그때, 당관이 말했다.
“그걸 전부 받아 냈느냐?”
연호정은 대답 없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놀란 얼굴로 연호정을 보던 당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연호정의 얼굴에 서린 기대감과 놀라움, 그리고 열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 받아 보고 싶은 게냐?”
“예.”
“……좋다.”
치리리리리리링!
어디서 솟구쳤는지, 당관의 머리 위로 비수의 파편들이 거대한 먹구름을 형성했다.
만천(滿天)을 수놓은 죽음의 비늘. 그 하나하나가 마치 빛으로 이뤄진 꽃잎과도 같았다.
“그럼, 맛만 보여 주도록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