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나아갈 길 (3)
“허어! 모용가주가 그런 제안을 했단 말입니까?”
“그렇소.”
제갈문호가 턱을 쓰다듬었다.
내내 침묵하던 당관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나는 반대올시다.”
“어찌 그렇습니까?”
“모용군, 그놈의 속은 아무도 모르오. 그런 놈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는 건, 분명 꾸미는 게 있다는 뜻이지.”
당관의 말투는 확정적이었다.
모용군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한 그였다. 사람 속이야 하루에도 열두 번은 바뀌는 것이지만,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당관이 보기에 모용군은 절대 순수한 의도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안을 할 때도, 거래를 할 때도 언제나 이득을 취하려 한다. 그것이 모용군이었다.
연위가 말했다.
“친동생의 목숨까지 건넸소. 모용가주의 속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모르게 수작을 부릴 것 같지는 않았소.”
“자기 목숨은 안 걸었잖소?”
당관이 차갑게 말했다.
“놈은 거래에서 절대 손해를 보려 들지 않소. 혈육? 그렇지. 놈도 사람인데 혈육 간의 정이 없겠소? 하지만 혈육보다도 더 중하게 여기는 게 자신의 목숨이오.”
상당히 거친 발언이었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주의 말씀에 일부 동감합니다. 모용가주는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분명 나름의 의도가 있을 겁니다.”
“그것 보시오.”
“다만, 먼저 손을 내민 것이 의아합니다.”
“그건 무슨 말이오?”
“한 손으로 열을 감당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모용가주는 본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쪽 역시 그에 뒤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요.”
“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그 자신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리하면 이쪽에서 호시탐탐 주시할 것을 뻔히 알 텐데도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은,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진심이거나, 아니면 우릴 속일 자신이 있거나.”
“나머지 하나는?”
“둘 다이거나.”
“……!”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상황만 놓고 보자면, 탕마군은 세가 무력을 제외한 모용가주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게다가 무림맹에선 세가의 무력을 동원할 수도 없는바, 말하자면 그 나름대로 모든 걸 내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하오.”
“게다가 탕마군장 모용우에 대한 모용군의 형제애는 진심입니다. 자신의 목숨은 걸지 않았지만, 적어도 팔다리가 날아간 만큼의 충격은 될 터. 이문에 밝은 모용가주로서는 나름대로 용단을 내렸다고 볼 수 있겠지요.”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면, 둘 다일 수도 있다는 뜻은?”
“우리의 눈과 조사를 피할 자신이 있다, 그러나 공공의 적에 대한 대비가 완벽해질 때까지는 선공을 날리지 않겠다.”
“……흐음.”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연위가 한숨 쉬듯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문제는 우리외다. 맹주 선거에 관련된 일은 쉬이 뒤로 미룰 만한 사안이 아니오. 게다가, 굳이 선거가 아니더라도 임시 맹주의 자격이 충분한 분들도 많소이다.”
“나 역시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공공대사.”
“예, 그렇지요.”
공공대사 역시 삼교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삼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실 능력, 인품, 지혜 모든 부문에 있어 공공대사만 한 적격자를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특히나 초대 맹주의 경우, 이왕이면 백도 무림인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안정적인 수장을 내세우는 게 좋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다만…….”
“다만?”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던 제갈문호가 이내 나직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공공대사께서는 절대 맹주의 위(位)를 받으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것이 설령 임시라 해도.”
“으음.”
연위가 침음을 흘렸다.
그 역시 공공대사의 인품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공공대사는 제갈문호 말마따나 임시라 해도 맹주직을 수락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선거를 미루고 일 년간 임시로 맹주를 맡아 달라는 부탁 자체가 초대 맹주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임시로 맡을 만한 능력은 되지만, 진짜 맹주가 될 능력은 없다고 여겨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공공대사 본인은 개의치 않아 할지라도, 소림의 고위급 인사들이나 소림과 친분이 있는 거물들이 극렬하게 반대할 사안이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당관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일단 하나만 정합시다.”
“……?”
“모용군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요, 말 거요?”
잠시의 침묵.
먼저 그 침묵을 깬 것은 제갈문호였다.
“이 사람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그렇습니다. 뭐가 되었든, 당장은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는 제안입니다. 오히려 더 좋지요. 모용가주의 한 팔을 제어할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음.”
당관이 연위를 보며 물었다.
“연가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연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나는 그 제안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소.”
“왜 그렇소?”
“회의 전에 미리 입을 맞추고 건의한 사항을 우리 쪽에 이롭게 끌어가자…… 이것은 공작(工作) 정치나 다름이 없소.”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공공의 적이 있는 상황이오. 심지어 그 망할 놈들의 힘이 중원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막강하기까지 하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지킬 것은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 그 말이 주는 무게감은 태산과도 같은 법이오. 상황이 좋을 땐 지키고, 상황이 나쁠 땐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다면 규범이 왜 필요하겠소? 백도(白道)라는 칭호가 무색한 일이란 말이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필요할 때는 나름의 유연성도 보여 줘야 하는 법, 나는 지금이 그런 때라고 생각하오만.”
“때로는 조금 복잡할 수도, 더 멀리 돌아가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지켜야 할 선은 있는 법이오.”
연위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유독 한숨이 많은 그였다.
“나는 두렵소. 이러다 우리가 정녕 괴물이 되는 건 아닌지. 아래 세대들에게 바름과 규범을 가르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지. 목숨보다도 중한 가치가 분명 존재하거늘, 말로만 내뱉고 행동으로는 보여 주지 못하는 위선자가 되진 않을지 걱정이오.”
제갈문호가 착잡한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연위의 표정이 왜 그리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당관은 모용군의 제안 자체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연위는 그 제안에 따른 이득을 떠나 이 상황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직시한 것이다.
‘참으로 바르구나.’
당관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갈문호는 연위의 그런 모습이 고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것은 응당 부려야 할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백도가 백도답지 못하면 흑도와 다를 게 무엇인가.
그래서 제갈문호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군사란 족속에 대해 아십니까?”
“……?”
“한 조직의 군사란, 마땅히 좇아야 할 바른 도(道)에서 반쯤 벗어나 버린 사람입니다. 이유인즉, 규범에 얽매여 있다간 조직원 전체의 목숨을 상케 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군사.”
“백도를 걷는 우리는 이득과 손해를 초월한 가치를 좇아야 합니다. 연가주처럼요. 그러나 저는 다릅니다.”
연위가 심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지 마시오.”
“아니, 오히려 제가 먼저 결단을 내렸어야 옳습니다. 두 분 가주께서 고뇌하기 전에, 군사인 제가 먼저 정리를 마쳤어야 했습니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두 분 가주보다 월봉도, 책임도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지요. 군사란, 유사시에 맹법(盟法)을 초월할 수 있는 자리거든요.”
“…….”
“물론, 그렇다고 해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서야 아니 될 일이지요. 하여 군사란 직책은 대대로 머리가 뛰어난 사람 중에서도 공사 구분이 확실하고 모두의 신뢰를 받을 만한 사람이 맡아 왔습니다.”
제갈문호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저처럼요.”
딱딱했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어 주는 말이었다. 연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당관이 물었다.
“하면 군사의 말씀은?”
“모용가주의 제안, 제가 따로 추진하겠습니다. 못해도 닷새 안에 정리할 테니, 두 분께서는 모른 척해 주십시오. 이것은 제갈가주로서가 아닌 군사로서의 부탁입니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마음먹은 거, 잘 처리해 보시오.”
“감사합니다.”
연위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또다시 한숨만 쉴 뿐이었다.
제갈문호가 달래듯 말했다.
“두 분께서는 신화교의 고수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셨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두 분, 나아가 수많은 맹원들이 가져야 할 책임이지요. 연가주께서는 그 책임을 넘치도록 지셨으니, 이제 저도 군사로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저 답답할 따름이오.”
“답답해하실 것 없습니다.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래서 답답하단 것이오. 군사께서 정녕 그러한 길을 선택하신다면, 훗날 삼교와의 싸움이 마무리된 연후에 많이 힘들어지실 거요.”
그 직책에서 내려오는 것은 물론, 자칫 잘못하다가는 맹법에 의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제갈문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가 되면 두 분께서 절 변호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당관이 콧방귀를 뀌며 일어났다.
“일을 참으로 복잡하게들 처리하시는군. 어쨌든 이 사람은 이만 일어나겠소.”
연위가 물었다.
“어디 가시오?”
“가주 큰아들놈 만나러 가오.”
“음? 호정에게 말이오?”
“그렇소.”
“호정에게는 어찌……?”
당관이 입맛을 다셨다.
“그 녀석이 내게 부탁한 게 있는데, 마침 완성된 모양이오.”
* * *
“부르셨습니까?”
연호정의 얼굴을 힐끔 본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꼴이 아주 우습게 되었군. 아직도 회복이 덜 되었느냐?”
“뭐, 그렇게 됐습니다.”
“수행 부족이다. 나름대로 강골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연약해 빠졌구만.”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인정합니다. 그래서 당분간 수련에만 전념할 생각입니다. 쪽팔리게 또 기절하고 싶진 않거든요.”
“말은 좋다. 그따위 연약한 몸뚱이로 도끼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겠느냐?”
“물론…….”
순간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당관이 평상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걷어찼다.
“본가 소속 대장간에서 만들었다. 네가 주문한 수치, 무게, 형태를 그대로 구현했더군.”
“드디어 왔군요.”
“열어 봐라. 미리 말해 두는데, 네 마음에 안 들어도 다시 만들어 줄 생각은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자고 휘둘러 봐라.”
연호정은 빙긋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이내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당관이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네놈이 들고 다니는 그 흉악한 도끼보다 백만 배는 나은 것 같군. 안 그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