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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64화 (364/963)

364화. 강자의 권한 (6)

닷새 후.

“……그랬군요.”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적의 수괴를 놓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나, 누구 하나 죽지 않고 돌아왔으니 다행입니다.”

“…….”

“기실, 적진의 선봉 대다수를 없앤 것만으로도 이번 싸움은 승리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놈은 잡지 못했소.”

“보통 전시에는 휘하 병력의 삼 할을 잃으면 전멸했다고 판단하여 후퇴를 명령합니다. 우리는 하남에 도사리고 있던 신화교 측 고수를 구 할 이상 없애 버렸습니다.”

“…….”

“말할 것도 없는 대승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용군은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내상을 제법 입은 듯 기도가 상당히 불안정했다. 그래서일까? 평소 완벽하게 제어해 두던 뇌정기가 은연중 흘러나와 다소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제갈문호가 물었다.

“적의 수괴, 일호무장이라는 자가 그리도 강했습니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소.”

찻잔을 내려놓은 모용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인들은 성천의 고수들을 두고 무극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오. 하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지.”

“맞습니다.”

“무극지경(無極之境)은 무종지벽과는 또 다르오. 무종지벽이 태산을 오르는 것이라면, 무극지경은 하늘을 나는 경지외다. 하지만 하늘에도 급이 있는 법, 성천의 고수들은 이미 저 높은 천공에 솟아 태양과 달빛을 벗 삼고 천하를 굽어보고 있소.”

“그에 조금 못 미친 자들이 바로 삼군(三君)이지요. 물론 삼군 역시 성천십삼좌에 속한 절대고수들이지만, 그들이 거니는 하늘과 열 명의 신선제왕(神仙帝王)이 거니는 하늘은 또 다를 것입니다.”

“맞소. 뭐, 우리가 보기에는 열셋 모두 천외천(天外天)인지라 이런 비교가 무의미할 수도 있소.”

“그렇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일호무장이라는 놈은 무극지경에 도달하지 못했소. 그것은 확신할 수 있소.”

양천의 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였다.

본인의 힘의 절반도 채 내지 않았음에도 양천의 기파는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돌진에 따른 충격파만으로 초절정고수를 밀려나게 했으니, 작정하고 무공을 구사하면 세 합이나 제대로 받아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호무장 번작의 무위는 양천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했다. 양천 정도가 아니라, 무극지경에 갓 발을 들이기만 했어도 그 자리에 있던 고수는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경지는 그토록 지고한 것이었다. 성천의 고수가 단신으로도 대문파를 쓸어 버릴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놈은 우리가 오르고 있는 태산에서도 가장 정상에 가까운 무위를 갖고 있었소. 솔직히 말하면 육가의 가주 둘이 붙어야 그나마 승부라도 가능하고, 셋은 모여야 오 할이 넘는 승률을 넘볼 수 있소이다.”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정도입니까?”

“물론 상성도 무시할 수 없소이다. 놈의 무공과 상극인 고수가 있다면, 가주급 두 명으로도 승부를 볼 수는 있을 거요.”

“즉, 못해도 우리 중 둘은 함께 나서야 할 정도의 고수라는 말이로군요.”

“그렇소. 그것도 운이 따라야 가능하겠지만.”

모용군은 번작의 무공을 순순히 인정했다. 새외의 잡것이라고 천시하긴 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본 강함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번작의 무공을 보며, 모용군은 전의(戰意)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권력에 대한 욕망보다도 무공의 성장에 더 욕심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순수한 무열(武熱)이 타오른 것이다.

“다른 사안도 많은데 굳이 더 시간을 들여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묻는 것은 순전히 제 개인의 호기심입니다. 이 점, 참고해 주십시오.”

“말씀하시오.”

제갈문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모용가주께서는, 공공대사와 승현진인의 진짜 실력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오.”

“그래도 막연한 예상 정도는 하고 있으시겠지요? 두 분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물론 그렇소.”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소림과 무당,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두 집단 수장들의 무공을 생각할 때, 일호무장과 상대가 가능할 것 같습니까?”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리고 위험한 질문이기도 했다.

모용군은 그답지 않게 꽤 오래 고심했다.

기실, 개인적인 호기심이라곤 했지만 이러한 전력의 비교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일호무장은 십팔무장의 수장이자 신화교가 대외에 보낼 수 있는 최강의 선봉장이라 하였다. 신화교가 그렇다면, 다른 두 사교 무리의 선봉장들도 그와 비슷한 무위를 자랑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만약 소림과 무당의 수장들이 일호무장보다 약하다면?

그렇다면, 무림맹은 지금 체제를 정비하는 것보다도 개개인의 무공을 급진적으로 성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제갈문호의 질문은 중요했고, 모용군 역시 신중해지는 것이었다.

잠시 후, 모용군의 입이 열렸다.

“공공대사의 경우는…… 잘 모르겠소.”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내 나름대로 공공대사의 무력을 추측하고 있소. 하지만 내 추측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소이다.”

“…….”

“어찌 됐든 추측한 무력으로만 보자면, 제아무리 공공대사라도 일호무장에 비해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오. 하나…….”

“하나?”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공공대사는 분명 힘을 숨기고 있소. 정확히는,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겠지.”

“음.”

“만약 공공대사가 힘을 숨기고 있다면, 일호무장과 능히 견줄 수 있을 것 같소. 못해도 박빙의 겨룸은 가능하겠지.”

공공대사는 성천십삼좌의 일인이자 권신(拳神)의 아성을 구가한 소림제일고수, 무허대사의 인정을 받은 진짜배기 고수다.

그리고 무허대사는 검선(劍仙) 탁무자와 함께 천하제일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절대고수다. 그런 고수가 인정한 재능이라면, 아직 무극지경에 도달치 못했다 하더라도 이 영역에서 궁극의 경지에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면 승현진인은 어떻습니까?”

“모르겠소. 다만, 과거 공공대사가 말하기를 승현진인의 깨달음은 능히 천하를 아우른다고 하였소. 승려의 입에서 나온 깨달음의 뜻이 꼭 무공이라는 법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공공대사가 승현진인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렇지요.”

“게다가 무당파의 무공은 후발선제(後發先制), 유능제강(柔能制剛)을 극대화한 선도(仙道) 무공의 정점이오. 실력을 떠나 무공의 상성만 보면, 승현진인이 공공대사보다 더 쉽게 놈을 잡을 수도 있다고 보오.”

“음.”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교의 열양공은 진기 발출에 특히 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사람의 손에서 불기둥을 쏟아 내다니, 그 정도의 내력 발출이 가능한 무공은 천하에 많지 않지요.”

“그렇소. 동시에 그들의 무공은 지닌바 속성 자체가 강(强)이오. 승현진인의 실력이 일호무장과 박빙이라면, 장담컨대 삼십 합 이내에 제압이 가능할 거요.”

무공이란 단순히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승부가 나는 것이 아니다.

모용군의 말처럼 상성도 중요하고 변수도 중요하며, 무엇보다 방심하지 않는 태도와 절대적인 집중력 등 승부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이래서 승부의 세계가 재미있는 것이다. 이래서 승부를 예측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모용군은, 연위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모용군은 연위의 검법을 떠올렸다.

번작의 무자비한 무공을 절묘하게 막거나 튕겨 내며 돌진하는 연위의 검법은 그야말로 완벽(完璧)했다.

방어를 할 때는 철벽의 검을 구사했고, 흘려 낼 때는 무당파의 무공만큼이나 부드러웠으며, 치고 들어갈 때는 자신의 무정천뢰식이 떠오를 만큼 강하고 빨랐다.

말하자면 천하에 산재한 모든 검법의 속성을 한 검에 담아낸 것 같았다. 어느 한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의 검법, 연위보다 강한 자는 많을지라도 그와 상극의 무공을 구사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군자의 얼굴 뒤에 야수의 무공을 숨기고 있었군.’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과연 연호정 그놈의 애비라 이건가? 어떤 의미로는 연호정 그놈보다 더 대단한 것인데.’

연호정은 다시 나기 힘든 천재다. 무공, 지략, 안목 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초일류의 재능을 갖췄다. 적어도 모용군이 봤을 때는 그러했다.

하지만 연위의 검은 재능이 있다고 연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공에 관한 끊임없는 궁구와 자기 성찰, 나아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검법을 분해하고 조립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검재(劍才)도 뛰어나겠지만, 그 재능을 노력과 깨달음으로 압도했다. 연호정에게 연위와 같은 길을 걸으라 해도, 절대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모용가주의 고견, 잘 들었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오래 붙잡아 두어 죄송합니다.”

“아니오. 어차피 가장 멀쩡한 건 나니까.”

“하하, 당가주도 생각보다 멀쩡하더군요.”

“그 사람은 정신이 멀쩡하지 않잖소.”

제갈문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지휘사 어른께 연락해 보시오. 하남에 놈들의 잔당이 남았을 수도 있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후개가 이미 조사 중이니까.”

“역시 빠르군.”

“그렇게나 고생들을 하셨는데, 뒤처리라도 잘해야지요.”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시오.”

“고생하셨습니다.”

* * *

“휴.”

기우희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연위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어떠한가?”

기우희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상당히 심하게 다쳤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워낙 강골이라 회복하는 데에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다행이군.”

“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어요. 물론 한 치 앞을 모르는 생사결에서 여유를 부릴 순 없겠지만, 이번에도 연 군장은 본인의 능력 이상의 힘을 뽑아내 싸운 것 같아요.”

“…….”

“그것이 무공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또한 양날의 검인지라 자칫 잘못하다간 회복하기 힘든 내상을 입을 수도 있어요. 연 군장이 지금 이렇게 의식을 잃은 것도, 그간 한계를 돌파하며 축적된 피로가 이번을 기점으로 터져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 정도였던가.”

“아마 혼자서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을 거예요. 시간이 충분했다면요. 하지만 연 군장은 쉬지 않고 달리는 사람이잖아요? 때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푹 쉬는 것도 중요하답니다.”

“그 말, 호정에게 꼭 전하도록 하겠네.”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놀랍네요. 그간 수천 명의 환자를 봐 왔지만, 연 공자만큼 회복 속도가 빠른 사람은 처음 봐요. 내공도 내공이지만, 정말이지 대단한 체력이로군요.”

연위가 쓴웃음을 지으며 연호정을 내려다보았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표정은 그런대로 편안해 보였다. 비록 적의 수괴는 놓쳤으나, 어디까지나 대승을 거둔 전투였으니 긴장이 풀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연위가 연호정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푹 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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