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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60화 (360/963)

360화. 강자의 권한 (2)

여기서 다 죽을 것이다.

청년의 말은 무척이나 황당하게 들렸다.

이미 이곳에 주둔한 신화병의 팔 할이 죽었다. 애초에 화약의 폭발로 죽은 신화병의 수가 절반이 넘었다.

많으면 넷이라고 확신했던 무장도 벌써 둘이 죽었다. 승부의 추는 이미 완전히 기울었다.

당연히 도주해야 옳았다. 한데도 청년은 그따위 망발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꼬맹이로군.”

“꼬맹이?”

청년이 히죽 웃었다.

“꼬맹이라…… 꽤 생소한 말이네.”

단순히 외관만 젊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청년의 목소리와 말투는 젊은 걸 넘어 어리게까지 느껴졌다.

화아아아아악.

청년의 몸에서 매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웃었던 것과 달리, 모용군은 내심 긴장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무서운 살기였다.

어떤 면에서, 그 살기는 연호정의 그것과 비슷했다. 연호정이 극도로 분노했을 때의 살기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농도가 짙었다.

단순히 의지가 강하다고 살기도 강하게 뿜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잘 연마된 정신력과 완벽한 진기 제어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살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모용군이 연호정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였다. 비록 뛰어난 무골(武骨)은 아니지만, 그만한 살기를 뿜어내고도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연호정의 정신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뜻이 된다.

즉, 부족한 무골을 깨달음과 지혜로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모용군은 연호정의 성장세가 폭발적일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한데 이놈의 살기도 연호정의 살기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차이는 있다.’

모용군의 날카로운 안목은 살기에 녹아든 기괴한 광기(狂氣)를 느꼈다.

‘이놈, 정상이 아니야.’

훅!

모용군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청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정말이지 가슴이 서늘해지는 속도였다.

“방심하면 안 되지. 너보다 강한 상대 앞에서는 특히나.”

청년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콰아앙!

모용군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검을 다 뽑지도 못했다. 청년의 수공(手功)을 막은 검배에서 희뿌연 연기가 새어 나오는데, 뇌정기를 제때 주입하지 않았다면 이 보검이 부러질 뻔했다.

모용군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강하다!’

후욱!

우측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시선을 주기도 전에 움직였다. 말도 안 되는 속도, 근래 묵룡부주 양천을 제외하곤 이 정도로 무서운 속도를 보여 준 상대는 없었다.

힘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모용군이 무정천뢰식을 구사했다.

번쩍! 콰르릉!

뇌정의 검은 벼락처럼 빨랐고, 벼락만큼 강했다. 모용군의 검격이 지나간 자리는 깊게 팬 것도 모자라 시커멓게 눌어붙었다.

“호오, 뇌기(雷氣)를 이 정도 수준까지 다뤄? 기특한걸?”

모용군의 뇌검은 청년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어느새 청년은 무너진 기둥에 앉아 턱을 괸 채 모용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용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이런 놈이……!’

청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괜찮은 실력이야. 힘 대결로 가면 나라도 버겁겠어. 굉장한데? 이 정도 고수들이 줄줄이 나타나다니,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거든.”

“…….”

“하지만 그렇게 느려 터져서야 쓰겠어?”

번쩍!

청년이 모용군의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을 봤지만, 세 번째 움직임마저 놓치고 말았다. 모용군은 검을 쥔 이래로, 세 번이나 상대의 움직임을 놓친 적이 없었다.

“으하하하하!”

청년이 광기 어린 웃음을 토해 내며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모용군이 비틀거리며 대여섯 걸음이나 앞으로 밀려 나갔다.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막았어?”

한 자루의 검이 모용군의 등을 막고 있었다. 공격이 들어올 것을 눈치챈 그가 검을 뽑아 등을 보호한 것이다.

“이상하네? 어떻게 내 속도에 반응했지?”

파아아아앙!

청년이 움직이고 난 후에야 폭발음이 터졌다. 신법의 속도가 음파(音波)의 속도를 초월한 것이다.

그야말로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 속도를 내는데도 옷가지만 좀 상했을 뿐, 피부는 멀쩡했다. 진기가 전신을 안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청년이 쌍장을 휘둘렀다.

퍼퍼퍼퍼퍼펑! 쩌저저저정!

일수유에 뿜어지는 연환장법에 모용군의 몸이 연신 흔들렸다.

무공 자체의 위력이 약하더라도 속도가 이렇게까지 빠르면 그 파괴력은 배가 된다. 속도는 곧 힘인 법, 극한의 속도에선 돌멩이도 최악의 살상 암기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푸스스스스스.

비틀거리며 물러난 모용군의 몸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청년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진기를 무작위로 방출했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다 막았어?”

정확히는 초식을 막은 게 아니라 기공을 막은 것이었다. 모용군은 청년이 구사한 초식의 절반밖에 반응하지 못했다.

믿기지 않는 속도. 그 속도에 어울리는 파괴력.

“……역시 그랬군.”

모용군이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침에 핏물이 섞여 나왔다.

“대응하기 어렵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아.”

그 속도만큼이나 발경이 위력적이었다면 모용군은 진즉에 죽었다.

그 말인즉슨, 청년의 무공 특성 자체가 순수하게 쾌(快)에 집중되었음을 뜻했다.

속도가 곧 힘이라지만, 내가고수들의 세계에선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물론 속도만큼의 힘은 실리겠으나, 그 힘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발경의 구결과 힘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안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경지가 바로 초절정 이상, 세인들이 말하는 무신(武神)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청년의 무공은 언뜻 상대하기 불가능해 보일 만큼 빨랐지만, 단순히 빠르기만 한 무공으로는 성천의 영역에 닿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른 놈들보다는 확실히 까다롭군. 네놈도 무장이냐?”

“물론이지.”

청년이 활짝 웃었다.

표정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더니, 지금은 또 환하게 웃는다. 도무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바로 십팔무장의 서열 이 위, 천강(天罡)이야.”

이호무장 천강.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천강이라…… 새외의 잡것 주제에 이름 한번 거창하군.”

천강이란 곧 북두성(北斗星)을 뜻한다. 중원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모용군에게 있어서, 천강이란 이름은 참으로 오만하게 들렸다.

천강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감히 자신의 이름을 모욕했다. ‘그분’이 직접 지어 주신 이름이거늘.

“개새끼네, 너.”

모용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벌레만도 못한 놈에게 그런 욕을 들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도다.”

번쩍!

순간 천강이 주춤했다.

모용군의 눈에서도 매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 살기는 천강의 살기와 박빙이었다. 변방의 천한 잡놈이 욕을 하니,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모용군에게는 그만한 모욕도 없었던 것이다.

“내, 오늘 너를 열여덟 조각을 내어 들개 밥으로 던져 줄 것이다.”

천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으로 마음이 맞았네? 나도 그럴 생각인데.”

번쩍!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한 연호정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콰쾅! 퍼어어엉!

무시무시한 폭음과 충격파에 몸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결전의 장소를 바라보았다.

‘대응하는군.’

천강의 속도는 다시 봐도 빨랐다. 흑암제 때 구사하던 혈익휘천만큼은 아니지만, 그것에 비해도 크게 모자라지 않은 속도를 매 순간 구현해 내고 있었다.

그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도 아니고, 속도 자체가 무공의 근본인 것이다.

저 속도를 버티기 위해 얼마나 막강한 진기와 체력을 구비했을 것인가. 깨달음은 낮을지언정 필시 말도 안 되는 고련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군에게도 승산이 있어.’

파지지지직!

허공을 지워 내는 푸른 검광에 대기가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불과 몇 합 만에 저 말도 안 되는 속도를 감당할 만한 무리(武理)를 찾아내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주로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모용군의 진짜 힘은 그 꾀와 함께 발휘되는 초절정의 무공이다.

그리고 연호정은 모용군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뇌정공, 무정천뢰식이라고 하였지.’

과거, 모용군을 백도 최강의 무인으로 발돋움하게 해 준 절대무공.

저 무공은 흑암제 시절의 연호정조차 맞서 싸우기 막막해했던 절공(絶功)이었다. 사신무(四神武) 외에 최강의 무공을 꼽자면 무조건 명단에 들 수 있는 무공 중 하나인 것이다.

천하를 논할 수 있는 무적의 검법. 연호정은 모용군이 천강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나아가 이길 수 있을 거라 보았다.

‘그렇다면.’

그를 도와 저 천강이란 놈을 죽일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호정아.”

“아버지.”

어느새 그의 곁으로 연위와 묵비가 다가왔다.

“괜찮은 게냐?”

후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치솟았다. 연가신단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내외상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뭐.”

“이것을 복용하거라.”

연위가 내상약을 건넸다. 혹시 몰라서 챙겨온 비상약 중 하나였다.

연호정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내상약을 먹으니, 연가신단에서 곧바로 반응이 왔다. 약력을 받아 한층 더 빠르고 안정적인 회전력을 구사하며 신체 회복을 극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호정의 표정이 한결 개운해졌다.

“자, 그럼 저희는 이제 대단원의 막을 향해 나아가 볼까요?”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너도 느꼈느냐?”

“예. 느꼈습니다.”

두 사람이 거대한 장원의 후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듯 웅크리고 있지만, 필시 저곳에 굉장한 고수가 있습니다.”

“성천급의 강자일까?”

“그 정도는 아닙니다.”

“확신하느냐?”

“물론입니다.”

이미 그 경지에 발을 디뎠던 연호정이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근래 어딘지 모르게 쇠약해졌던 양천의 기세도 받아 본 적이 있는 그였다.

저 후원에서 웅크리고 있는 기세는, 쇠약해진 양천의 기도보다도 못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 수 차이가 아니라 몇 수나 더!

후욱!

허공을 날아온 당관이 손을 털었다.

“잡병들은 거의 다 처리되었소. 나머지야 탕마멸사군이 알아서 청소하겠지.”

“고생하셨소이다.”

“그나저나, 저쪽에 있는 괴물은 뭐요?”

당관 역시 그 기세를 느낀 모양이었다. 분노에 사로잡혀 천강과 생사결을 벌이는 모용군과 아직은 다소 부족한 묵비를 제외하면, 이 세 사람 모두가 그곳에서 번져 나오는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뭐가 되었든, 저곳에 숨어 있는 놈만 제거하면 이번 싸움이 끝날 것 같군요. 그 이상의 강자는 없을 듯합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연호정은 확신하고 있었다.

전장의 공기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저 이름 모를 자와의 싸움이 이번 전투의 마지막일 것이라고.

당관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시간 끌 것 있겠느냐? 내가 가겠다.”

“같이 가시지요.”

당관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도움은 필요 없다만.”

“필요하실 겁니다. 설령 필요치 않아도,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더 강한 전력으로 단시간에 승부를 내야지요.”

“흥! 마음대로 해라.”

차아앙!

연위가 검을 뽑았다.

까드드득.

묵비가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부웅.

광룡부를 견봉에 걸친 연호정이 차디찬 얼굴로 말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러 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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