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54화 (354/963)

354화. 청소의 시작 (4)

“이 개자식이!”

일촉즉발의 순간.

“곡강.”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잡았던 곡강이 주춤했다.

석경이 준엄한 어조로 말했다.

“참아라.”

“선배!”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의 도발에 걸려들어서야 어찌 무장이라 하겠는가.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라.”

평소와는 또 다른 말투였다. 공사 구분이 확실한 그답게 목소리에 위엄이 가득했고,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완벽하게 정제되어 있었다.

휘하 조직원이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레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분위기, 그러나 곡강은 달랐다.

“도발 같지 않은 도발을 했으니 마땅히 벌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곡강.”

“설마하니, 선배께서는 제가 저 어린놈 하나 잡지 못할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석경의 목소리에 위엄이 가득했다면, 곡강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살기가 가득했다.

석경은 내심 혀를 찼다.

‘역시나 어려.’

경험 많은 천재는 무섭다. 그러나 아수라장을 헤치고 돌아온 천재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생길 수 있다.

방심, 그리고 오만이다.

재능으로만 치면 곡강은 십팔무장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천재였다. 그 천부의 재능이 빠른 무공 상승을 안겨 주었지만, 한편으론 전사(戰士)로서 가져야 할 소양 몇 가지를 앗아 가 버렸다.

석경이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임무에 사적인 감정을 녹이지 마라.”

“병력의 차이를 보십시오. 우리의 승리는 기정사실입니다.”

“뭐가 되었든 섣불리 나서는 것을 금한다.”

“선배!”

“아니면, 지금 이 무리의 좌장인 내 명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인가?”

순간 곡강이 움찔했다.

그는 오만했지만,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막 나가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석경은 십팔무장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노련함과 무공을 갖춘 사람이었다. 신상필벌도 확실하여 수하가 공(功)을 세우면 크게 치하하지만, 하극상에는 용서가 없었다.

‘빌어먹을.’

곡강이 이를 갈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물론 그냥 물러난 건 아니었다.

“애송이. 운 좋은 줄 알아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꼬리 말고 물러나는 개들은 언제나 그 비슷한 말로 자존심을 챙기더군. 그렇게 말하면 화가 풀리기라도 하나? 신기한 일일세그려.”

석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곡강의 몸에서는 종전보다 훨씬 더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개자식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넌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여기는 전장이야. 너처럼 허울뿐인 바보가 설쳐도 될 만한 자리가 아니다.”

순간 곡강의 눈이 완전히 돌아갔다.

석경이 외쳤다.

“곡……!”

퍼엉!

말릴 새도 없었다. 어느새 무서운 속도로 돌진한 곡강이 연호정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연호정의 좌수(左手) 또한 벼락처럼 움직였다.

쩌어어어엉!

곡강의 주먹과 연호정의 손이 부딪치며 무서운 충격파를 일으켰다.

석경이 규적과 같은 청로순화공을 익혔다면, 곡강은 요뢰가 연성한 홍련순화공을 익혔다. 그의 주먹에서 휘몰아치는 붉은 화기(火氣)가 회오리치듯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치이이이익!

반면 연호정의 손에선 어두운 수기(水氣)가 출렁이고 있었다.

화기와 수기의 충돌. 화끈한 충격파 위로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곡강이 으르렁거렸다.

“제법 한 수는 있었구나.”

부르르.

맞닿은 두 사람의 손이 희미한 떨림을 발했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용케 용기를 냈구나, 꼬마야.”

석경이 소리쳤다.

“곡강! 당장 물러나라!”

곡강이 짐승처럼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싸움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였다. 이제는 상관의 명령이고 뭐고 들리지 않는 것이다.

석경이 재차 입을 열려 할 때였다.

‘……?’

무성이 그의 소매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석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곡강과는 달리 무성은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가 석경을 말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석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신화병들이 맹렬한 살기를 피워 올리며 곡강과 연호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싸움에 완전히 몰입해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군.’

나서지 않았다면 모를까, 나선 이상 막을 순 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신화병들의 사기가 흔들릴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곡강이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쓸데없이 손해 볼 필요는 없었다.

연호정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 상관이 싸움을 허락했구나.”

“닥쳐라! 세 합 안에 잿더미로 만들어 주마!”

퍼어엉!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놈!”

쾅!

성질이 있는 대로 뻗친 모양이었다. 땅을 박차고 돌진하는 곡강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빨랐고, 빠른 만큼 거칠었다.

후우우웅!

곡강의 주먹에서 또다시 붉은 화기가 휘몰아쳤다.

신화교의 절기, 염왕팔권이었다.

‘죽어라!’

쾅!

코앞에서 진각을 밟으며 모든 파괴력을 주먹에 모았다.

곡강이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일격에 바위도 으깰 만한 강권(强拳)이었다.

연호정은 그 주먹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곡강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 반응도 못 하는군.’

피하기엔 늦었고, 막기에는 너무 강할 것이다. 곡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

갑자기 시간이 느려졌다.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공기의 압력에 따라 뒤로 쫙 밀리는 권화(拳火)의 불씨 하나하나가 전부 보일 정도였다.

‘뭐지?’

곡강은 의아했다.

갑작스레 시간이 느려지는 이 감각.

이것은 예상치 못한 위협이 들이닥쳤을 때, 진기가 강제적으로 뇌력(腦力)을 증폭하는 경우였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위협을 느끼고, 자연스레 진기가 반응하는 것이었다.

‘대체 왜……?’

순간, 곡강은 연호정의 오른팔이 어느새 상단에서 전방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뭐?!’

이처럼 느린 세상에서도 기울어지는 게 확연히 보일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저런 속도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

한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 거대한 무언가가 빛을 가리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곡강의 눈이 상단으로 올라갔다.

어느새 무식하게 큰 도끼날이 그의 머리통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헉!’

도끼날에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바로 연호정이 내리치는 도끼였다. 곡강이 주먹을 멈추지 않으면 연호정의 얼굴이 뭉개지겠지만, 그랬다간 곡강의 몸도 사선으로 쪼개질 것이다.

‘이 미친놈!’

곡강이 재빨리 주먹을 올려 쳤다.

콰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광룡부가 휘어져 내려와 땅을 찍었다. 곡강이 주먹을 회수하며 도끼의 옆면을 후려쳐 투로를 바꿔 버린 것이었다.

훅!

느릿하게 흐르던 시간이 갑자기 빨라졌다.

동시에 연호정이 몸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퍼어어엉!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완전히 무(無)로 만들어 버리는 보법.

주작공의 혈익휘천이었다. 불꽃을 머금은 봉황의 날개가 연호정의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깜짝 놀란 곡강이 미친 듯이 쌍권을 휘둘렀다.

퍼퍼퍼퍼펑!

과연 곡강의 무공은 대단했다.

방심을 노린 반격에 당했는데도 몰아치는 권격에 흔들림이 없었다.

천성이 오만하다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다는 뜻이다. 타고난 재능을 피땀이 어린 노력으로 개화시켜, 무의식중에도 올곧은 무도(武道)를 구현해 낼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연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호정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선천적인 무재(武才)에 있어선 곡강의 아래지만, 그에게는 숱한 경험과 흑암제의 깨달음, 더하여 궁극의 전투 감각이 함께하고 있었다.

쾅! 쾅! 쾅!

“큭!”

곡강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경황 중에 내친 권법이지만, 그 위력만큼은 확실했다. 한데 그처럼 위력적인 강권으로 두들겼는데도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반탄력이 전해졌다.

곡강이 전방을 노려보았다.

치이이이익!

시야를 뒤덮은 희뿌연 수증기 너머, 반투명한 흑색의 성벽이 떠올라 있었다.

현무공의 북천십이벽이었다. 화기(火氣)와 상극인 수기(水氣)로 형성된 절대방어의 비술이었다.

그리고 그 흑수(黑水)의 철벽 가운데를, 거대한 도끼가 종으로 가르며 나타났다.

촤아아아악!

물살을 가르며 뻗어 나가는 미친 용의 이빨이었다.

‘이!’

쩌어어엉!

곡강이 재빨리 몸을 비틀어 손바닥으로 도끼날을 후려쳤다.

훅!

길을 잃은 도끼가 뻗어 나온 속도보다도 빠르게 사라졌다. 투로가 흔들리자마자 회수한 것이다.

출수와 회수의 속도가 벼락처럼 빨랐다. 얼핏 봐도 수십 근이 넘어가는 중병인데, 어떻게 저리 자유자재로 다루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번쩍!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증기에 가려진 연호정을 공격하기 위해 돌진했지만, 어느새 연호정은 그의 후방을 점하고 있었다.

곡강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뭐가 이렇게 빨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양손으로 광룡부의 창대를 쥔 그가 광기 어린 공격을 퍼부었다.

쩌어엉! 퍼억! 쾅!

벼락처럼 빠른 삼 연격.

일격은 쳐 냈지만, 이격은 완전히 쳐 내지 못해 어깨의 살점이 한 움큼 날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삼격에 곡강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곡강이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기공의 방패를 이용해 막았지만, 광룡부의 힘과 날카로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푸화악!

그의 왼쪽 팔뚝에서 대량의 피가 뿜어졌다. 광룡부의 도끼날에 근육이 끊어지고, 팔뼈 일부까지 부러진 것이다.

‘이럴 수가.’

물러나면서도 곡강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졌어?!’

패배 따위는 상정하지 않은 승부였다. 그래서일까? 고작 이십 합도 되지 않아 이렇게까지 밀렸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곡강이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 돼!”

버럭 외치며 홍련순화공을 폭발시키는 곡강.

콰르르릉!

그의 전신에서 솟구친 시뻘건 화기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이놈이 어디서 사술을……!!”

그때였다.

퍼억!

재빨리 접근한 연호정이 곡강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강력한 일격은 아니었지만, 몸이 날아가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곡강의 신형이 화기와 수기가 부딪치며 생성된 운무 속에 파묻혀 버렸다.

‘……!’

연호정의 눈이 형형해졌다.

‘예상대로군.’

등 뒤에서 엄청난 위력의 장력이 날아왔다. 승부의 추가 급격하게 기울어지는 것을 본 석경이 전투에 끼어든 것이다.

‘어렵겠어.’

일대일의 정면 승부?

전쟁에서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 승리 앞에, 명예나 수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석경도 그걸 알고 끼어든 것이다.

연호정이 호왕구벽세, 호왕살의 투로로 광룡부를 휘둘렀다.

콰앙!

힘의 밀도가 다르다.

연호정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장력이 어찌나 강했는지, 광룡부를 쥔 손에서 찌르르한 아픔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쾅!

광룡부로 땅을 내리찍은 연호정이 몸을 세웠다. 그러자 달려오던 석경과 무성이 주춤거렸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달려오는 거냐?”

“……이놈.”

석경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곡강을 어찌한 것이냐?”

그때, 수증기 너머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애송이 말이냐?”

후욱!

강력한 돌풍에 의해 수증기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 피투성이가 된 곡강의 목을 움켜쥔 당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곡강은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축 늘어져 있었다.

석경과 무성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놈들이……!!”

“반칙은 너희가 먼저 저지르지 않았더냐? 우리 둘 잡자고 우르르 몰려오다니, 너무 치사했어.”

당관이 곡강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곡강의 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내장이 다 녹고 목뼈까지 으스러졌으니 더 이상 생존은 불가능했다.

당관이 곡강을 아무렇게나 던지곤 연호정의 옆으로 다가왔다.

연호정이 싸늘하게 말했다.

“전초전은 끝이다. 이제 제대로 붙어 보자고.”

석경이 외쳤다.

“다 죽여 버려!”

파아악!

두 진영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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