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청소의 시작 (3)
“이대로 가면 됩니까?”
“그러라잖아.”
“제기랄, 왜 맨날 이래? 중간에 얘기라도 좀 해 주던가!”
“언제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거 봤냐? 시끄러워! 일단 달려!”
“하나만! 하나만 더!”
“뭐!”
“걔들도 온대요?”
“우리 쪽으론 안 와.”
“그럼 어디로 간대요? 하기야, 지도를 보면 걔네들이 힘쓸 만한 곳이 아니긴 합니다만.”
“네 말에 답이 있네. 힘을 쓸 만한 곳으로 갔다.”
“호오.”
“시끄러워! 숨 차! 시간 못 맞추겠다! 일단 달려!”
“아, 그럽시다!”
* * *
석경(石硬)의 눈이 깊어졌다.
“저기로군.”
“그렇군요.”
“기척이 애매해. 하나인 것 같기도 하고, 둘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셋인 것 같기도 하군.”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요?”
“그건 모르지. 다만, 놈들의 무공이 일파의 수장급이라고 들었다. 그 정도 무공이라면 우리의 군세(軍勢)를 읽었겠지.”
“미리 알았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살기를 읽고 준비는 하고 있었을 거란 말이로군요.”
“다 그런 거 아닌가. 자네도 알잖아.”
“그렇지요.”
석경과는 달리 곡강(曲康)의 얼굴에는 은근한 자만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현존하는 십팔무장 중 가장 늦게 무장이 된 사람이었다. 당연히 계급도 마지막 십팔의 무장이었다.
그간 무수히 많은 싸움을 거치며 살아왔지만, 무장으로서 작전에 투입된 적은 없었다. 당연히 상위 무장으로 올라서기 위해 공(功)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이 컸다.
동시에, 무장으로서의 자부심 역시 엄청났다. 하물며 함께 온 병력의 면면도 대단하니, 기대와 자만도 함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곡강을 보며 석경이 혀를 찼다.
“방심하지 마라. 놈들의 손에 요뢰와 규적이 죽었어. 실력 없는 반편이들이었다면 우리가 이 정도 병력까지 끌고 왔겠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력을 끌고 왔지요. 그래서 안심하는 것이고요.”
석경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생사의 경험이 충분한데도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천성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달리 말하면, 천성이 오만한데도 이 자리까지 오른 것으로 보아 재능 하나는 뛰어나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그 재능을 꺾을 만한 적수를 만나지 않는 한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 하고, 빨리 마무리 짓도록 하지.”
“그러시지요. 아! 그러고 보니 죽이는 게 아니라 생포였지요?”
“가능하면 생포가 좋고, 아니면 죽여도 상관없다고 하였다.”
“그거 좋군요.”
곡강이 진한 살소를 머금었다.
애초에 그는 적으로 규정된 자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생포하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무조건 죽일 기세로 밀어붙일 것이다.
“가세.”
그렇게 석경과 곡강, 그리고 십삼무장 무성(無聲)을 선두로 신화교의 고수 일백오십 명이 진군했다.
‘흠.’
석경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형이 묘하군.’
입구가 좁고 길다. 좌우로는 절벽이 제법 높아서, 극상의 신법을 구사해도 올라가기 힘들 듯했다.
확실히 이곳 땅은 고향과 달랐다. 지형이 훨씬 더 역동적이었고, 그만큼 더 복잡했다.
새삼 왜 이곳 놈들이 전략 전술에 밝은지 알 것 같았다. 이 넓은 중원 땅 이곳저곳에서 오만 전투를 치르다 보니, 지형과 날씨에 따른 대처법을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함정일까요?”
곡강의 물음에 석경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곳에서 가장 큰 효과를 보는 것은 낙석지계(落石之計)다. 기름통을 던지고 불화살을 쏘기도 하지.”
“그렇군요.”
“하지만 기척이나 살기가 느껴지지도 않고, 놈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그만한 준비를 해 두었을 거라 보긴 어려워. 게다가 놈들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인력을 떠나, 그만한 함정을 만들 시간이 부족했을 터.”
“맞는 말씀입니다.”
그때, 무성이 입을 열었다.
“그 모든 것이 함정의 일부였다면?”
무성은 그 이름과 같이 말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옆에서 말을 걸지 않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입 한번 떼는 일이 없었다.
석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얘기가 안 되지. 그럼 도지휘사가 놈들과 손을 잡고 함정을 준비했다는 게 되는데, 그리 생각하면 우리가 애초부터 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무성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나저나.”
석경의 눈에서 별빛 같은 광채가 뿜어졌다.
“이거 굉장하군.”
후욱!
저 멀리서부터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기세의 농밀함이 실로 대단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패기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무저갱의 기운이 동시에 느껴지는데, 둘 중 어느 쪽도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굉장해.’
누가 더 강하냐를 떠나, 이토록 다른 기질을 발산하는데도 묘하게 조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힌 무공은 다르지만, 기(氣)로써 서로를 잘 보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즉, 한패다 이건가?’
그때였다.
파악!
두 줄기 폭풍 같은 기도가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느닷없는 돌진이었다. 석경과 곡강, 무성 모두가 순식간에 전투 준비를 마쳤다.
후웅.
하지만 이름 모를 두 고수는 당장 싸움에 임하려는 게 아니었다.
“흐음.”
멀찍이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중년 사내, 당관이 턱을 쓰다듬으며 신화교 측 고수들을 둘러보았다.
“두 놈 죽었다고 우르르 끌고 왔군. 면면이 제법이야. 특히나…….”
당관이 석경을 바라보았다.
석경 역시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당관을 노려보았다.
‘강하군.’
그 덩치 큰 놈과는 확실히 다르다.
느껴지는 무공 수위는 엇비슷하다. 석경이 미세하게 더 강한 듯도 싶었지만, 거의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마음가짐이 달라.’
요뢰는 힘, 내공, 체력 등 무인이 갖춰야 할 대부분의 항목에서 만점을 받아 마땅한 고수였다. 그러나 무인이라면 필시 경계해야 할 태도 역시 갖추고 있었다.
방심, 오만.
어쩌면 그것은 대다수의 강자들이 가진 약점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놈은 그렇지 않았다. 이 무리를 이끌고 온 고수 중 가장 강하면서도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절대 지지 않겠다는 기백이 느껴졌다.
‘이제야 제대로 된 놈들이 왔군.’
그때였다.
“흥미진진하구만.”
연호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우우우웅.
어깨에 걸쳐진 광룡부가 무서운 이명을 토해 냈다.
천적(天敵)을 보는 자, 단전에서부터 들끓어 오른 분노의 감정이 맹렬한 살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살기는 고스란히 광룡부에 실려, 매서운 울음을 토하게 했다.
과거, 연호정이 죽자고 싸운 조직은 사음교였다. 신화교와는 제대로 된 싸움을 벌여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신화교나 광혈교 역시 사음교와 다를 바가 없는 놈들이었다.
결국은 삼교다. 삼교로 인해 그가 지켜야 할 것들이 파괴되었으며, 우애를 나누었던 소중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저들은 바뀐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의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그 모든 영역에서 연호정은 삼교에게 분노하지 않을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너희 셋, 십팔무장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진한 살기가 묻어난다.
석경의 눈이 깊어졌다.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나?”
“데리고 온 저 떨거지들은 신화병(神火兵)이로군.”
오만함으로 똘똘 뭉쳤던 곡강의 얼굴에도, 무표정하던 무성의 얼굴에도 놀라움과 긴장감이 드러났다.
석경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네놈, 어찌 우리에 대해 그리 잘 아느냐?”
“너희 편이 알려 주던데.”
“우리 편?”
“십이무장 말이다. 고문 좀 했더니 술술 불더군.”
헛소리다.
십팔무장은 단순히 무공이 강하다고 오를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다.
무공은 기본이며, 교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인증해야 오를 수 있다. 무장급 정도가 되면 꿈에서라도 반역을 저지를 확률은 낮다.
즉, 제아무리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한들 교의 정보를 토설할 리가 없다. 그 정도 정신력으로는 애초에 무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당장 오만하기 그지없는 곡강조차도 제 목숨을 버렸으면 버렸지, 교에 관한 정보는 단 하나도 토설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연호정을 노려보던 석경이 말을 이었다.
“시간 아까우니 쓸데없는 대화는 이쯤 하지. 즉, 본교의 무장을 죽인 게 네놈들이란 것이로군.”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이곳은 전장이었다. 괜한 말싸움으로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죽이거나 생포한다. 그거면 된다.
석경의 말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네놈들의 낯짝을 보니 별 의미는 없을 것 같다만, 처음이자 마지막 통첩을 주마.”
화르륵.
석경의 동공이 새파랗게 변했다.
규적이 익힌 청로순화공을 그 역시 익힌 것이다. 하지만 규적과는 또 다른 수준에 도달한 기세였다.
더 깊고, 더 뜨겁고, 더 살벌하다.
홀로 이곳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듯한 무지막지한 기파가 전해져 왔다.
“투항하라. 당장은 목숨을 잃지 않을 것이며, 훗날 죽게 된다 한들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을 선사해 주겠다.”
무서운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의 자신감은 합당했다. 이 정도 병력 차이라면 천하에서 가장 소심한 자라도 용기를 가질 만했다.
두 집단의 병력 차이는 그렇게나 컸다.
“싫다.”
그러나, 연호정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석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말이 끝이었다.
“전원 전투 준비.”
후욱!
순간 연호정과 당관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화르르르르륵!
이 소로길 전체에 용암이 흐르는 듯했다. 일백이 넘는 고수들이 뿜어내는 무지막지한 화기(火氣)에 공기마저 화들짝 놀라 도망치려 했다.
연호정이나 당관이나, 열양공을 익힌 고수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한데 똘똘 뭉쳐 피워 내는 이 무지막지한 화기 앞에서는, 천하의 고수인 둘이라도 접근이 쉽지 않을 듯했다.
‘역시 쉽지는 않겠군.’
살기는 살기고, 현실은 현실이다.
연호정은 냉정한 눈으로 고수진을 살폈다.
‘하나같이 강하다. 나아가 모두가 방심 없이…… 응?’
연호정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곡강이 있었다.
마흔이 채 되지 않은 연배. 그 나이에 무종지벽을 돌파한 것을 보면 정말이지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일 것이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곡강의 표정에서 은근한 자만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쿵!
견봉에 걸친 광룡부로 땅을 찍은 연호정이, 다시 도끼를 들어 곡강을 겨누었다.
“너, 이름이 뭐냐?”
연호정의 안목은 정확했다.
“……시러베자식이.”
곡강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언뜻 보아도 십 년은 차이 날 만한 어린놈이었다. 그런 놈이 제게 도끼를 겨누고 있으니, 곡강의 심사가 있는 대로 뒤틀렸다.
곡강이 다시 입을 열기 전, 연호정이 말했다.
“나, 연호정이다.”
“……?”
“알고 있나?”
석경과 무성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천하제일 후기지수.’
그들이라고 벽산호장의 명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뜨겁게 불타오르는 이름이었으니까.
‘과연.’
벽산호장 연호정.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
검가로 이름 높은 연가에서, 특이하게 거대한 도끼를 주 병기로 사용하며 엄청난 명성을 드리운 이 시대 최고의 천재가 그였다.
곡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도끼를 들고 있었군. 미친놈. 그럴싸한 무기 하나 들었다고 세상이 다 네 것…….”
“들어와.”
“……뭐?”
“최약체끼리 먼저 붙어 보자고.”
“……?!”
“아니었어? 너, 거기서 제일 약하잖아? 선봉으로는 딱 제격인데?”
순간 곡강의 몸에서 살기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