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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52화 (352/963)

352화. 청소의 시작 (2)

“규적과 요뢰가 죽었다고 들었어.”

“그렇다.”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른하기 그지없던 얼굴이 오랜만에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떤 놈인데?”

“아직 정확한 파악은 못 했다. 다만 백도 정파 쪽일 확률은 낮다.”

“다 하남성에서 뒈졌다며? 무림맹이 하남성에 있잖아. 그럼 무림맹 놈들 아니야?”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데?”

“무림맹은, 아니 백도 정파는 절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아. 너희가 너희의 존재를 들킨 게 아니라면 말이야.”

“흐음.”

“그 외에도, 시체에 난 흔적 자체가 정파의 무공이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무공에 문외한이지만, 내가 부리는 정보원들은 모두 일류야. 녀석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청년이 피식 웃었다.

“대단한 정보원 납셨군.”

“…….”

“개방이라고 했나? 정파 최고의 정보 단체가?”

“그렇다.”

“네가 부리는 정보원들, 그 개방 놈들에게 걸린 건 아니겠지?”

“관부와 전쟁을 치르고 싶다면 움직이겠지.”

“흠!”

“믿어라. 난 너희가 싫지만, 그보다 더 싫은 것이 불명확함이다. 놈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 중이야.”

“흐아아암!”

거나하게 하품을 한 청년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거참 지랄맞게도 됐구만. 하여튼 병신 같은 것들, 중원의 머저리들한테 그리 허무하게 당하다니. 이래서 나이로 재능을 채우려는 놈들은 안 되는 거야.”

목소리에서 빈정거림이 느껴졌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여상도는 생각했다. 이놈들은 정상이 아니라고.

제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 한들 같은 편이 아니던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았다면, 마땅히 동료의 죽음에 분노해야 정상이었다.

한데도 그런 게 없다. 전우를 향한 최소한의 애도도 없었다.

“그래서? 언제쯤 놈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건데?”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용의자의 위치는 확보하고 있다.”

순간 청년의 눈이 반짝거렸다.

“위치?”

“그렇다.”

“재미있군. 우리 쪽 사람을 건드리고도 대놓고 움직이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무림맹 측 인사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거다. 무림맹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을 테니까.”

“그거야 댁 생각이고. 가능성은 열어 둬야지.”

“맞는 말이다.”

“됐고, 어디 있는데?”

“허창 인근이다.”

“허창…… 허창이라.”

청년이 턱을 쓰다듬었다. 수염 한 톨 없이 매끈하게 드러난 턱선이 몹시도 날카로웠다.

“인원은?”

“둘, 혹은 셋.”

“자세히 모르는군.”

“요뢰와 규적을 죽일 정도의 고수다.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부리는 놈들 좀 갈아 치워. 천하의 도지휘사 양반이 잡졸을 부리니까 눈과 귀가 막히는 거야.”

기가 차는 말이었다.

게다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청년의 눈은 기대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둘, 혹은 셋이라…….”

가만히 청년을 보던 여상도가 툭 던지듯 물었다.

“자네가 갈 생각이신가?”

“글쎄? 안타깝게도 나는 이곳을 틀어쥐고 있어야 해서 말이야. 움직이고 싶어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어.”

“그렇군.”

“그건 그렇고…….”

훅!

순간 여상도의 눈이 흔들렸다.

제법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던 청년이 눈 깜짝할 새에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

여상도는 순간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코 앞에 들이닥친 청년의 눈. 그 두 눈에서 뿜어지는 야수의 광기는 인간의 정신력을 극도로 황폐화시킬 만큼 매서웠다.

“노친네.”

“…….”

“나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말이야, 댁은 그러면 안 되지 않나?”

“……무슨 말이냐?”

“명색이 도지휘사인데, 규적은 그렇다 쳐도 요뢰가 죽었으면 관부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도지휘첨사가 강호인에게 죽은 거, 이거 대사건이잖아?”

여상도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고 말한 게 너희였다.”

“그거야 우리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고. 잘하면 이번 일로 무림맹까지 들쑤실 만한 명분을 만들 수도 있는데, 그걸 안 했네?”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삐쭉 돋아난 송곳니가 유독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짐승 밥이 되고 싶나, 영감?”

무서운 살기가 전해져 왔다.

여상도는 그 앞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쏟아지는 살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걸 바라나?”

오히려 대범하게 되묻는다.

가만히 여상도를 바라보던 청년이 이내 씨익 웃었다.

“역시 도지휘사. 배포가 아주 남달라.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겠지만, 다음은 없어. 알겠나?”

“유념토록 하지.”

“관병을 풀어. 풀어서 무림맹부터 들쑤시도록 해.”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다.

분명 정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멍청하지도 않다. 오히려 세력 간의 갈등을 전략적으로 풀어내는 능력만큼은 백전노장 못지않았다.

여상도가 물었다.

“그리되면 용의자들이 도망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놈들을 잡은 이후에 풀어야지.”

“……?!”

청년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림맹의 짓이든 묵룡부 그 깜찍한 놈들의 짓이든, 그도 아니면 지나가던 은거 기인의 돌발 행동이든 상관없어. 이곳은 이곳만의 규칙이 있잖아?”

“…….”

“함부로 날뛰다간 목숨이 날아간다는 거, 놈들에게도 알려는 줘야지.”

“고수를 파견할 건가?”

“물론이지.”

“누구를…….”

그때였다.

짝!

여상도의 얼굴이 좌측으로 홱 돌아갔다.

거리가 한참 떨어졌는데도 뺨을 맞았다. 어떻게 뺨을 때렸는지, 또 언제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퉤!”

여상도가 뱉은 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입 안이 터진 것이다.

청년이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질문, 자주 하면 짜증 난다구. 전에도 말했을 텐데?”

“…….”

“됐고, 그놈들이나 확실히 주시해. 잡아다 포를 떠 버려야지.”

“제법 많은 병력을 보내야 할 것일세.”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알아서 한다.

언뜻 들으면 이곳에 침투한 최고 지휘자라고 생각될 만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여상도는 알고 있었다. 이 청년이 신화교에서 파견한 최고 우두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곳 하남성에는, 저 청년이 두려워하는 진짜 고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 고수야말로 신화교가 하남성에 파견한 최고 권력자라는 것을.

“아랫것들에게 말해 두겠네.”

“이만 가 보셔.”

여상도가 말없이 거처를 나섰다.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앉은 청년은, 여상도가 나가자마자 키득키득 웃었다.

“무료한 일상에 이 정도 재미는 있어야지. 좋구만.”

요뢰, 그리고 규적.

그 둘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상으로 올라갈 만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면 모를까, 너무 오랜 시간 십팔무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잘됐어. 고여 버린 윗물이 날아가야 깨끗한 아랫물이 치고 올라올 수 있는 거지.”

실제로 새로운 십팔무장의 대기 인원만 다섯이 넘었다. 어쩌면 지금쯤 열 명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자신의 명이면 불을 지고 기름밭에 뛰어들 놈들도 있었다.

“그나저나, 무림맹이 아니라면 대체 누굴까? 여상도 저 늙은이가 능구렁이긴 해도,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텐데.”

현재 여상도는 손과 발이 완전히 묶인 상황이었다. 외부에 도움을 청할 만한 수단도 없다.

물론 비밀 첩보 조직이 존재하긴 한다. 그 정도 숨통은 틔워 주고 있었기에 이런 조사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조차도 첩보조장들은 신화교의 감시를 받고 있지만.

“재미있어.”

청년의 동공이 황금빛으로 달아올랐다.

“어찌 되었건, 본교 소속 무장을 죽였으니 낯짝이나 한번 구경해 볼까?”

* * *

“지루하군.”

당관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벌써 열흘째 야산 이곳저곳에서 밤을 보냈다. 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적들이 의심할까 싶어서였다.

연호정이 말했다.

“수련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몸만 움직인다고 수련이라더냐.”

“지루해하시는 걸 보니 정신 수양도 안 하시는 것 같은데요?”

“좌선한다고 다 수양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면 가만히 있어도 수련이 된답니까?”

“물론이지.”

뜻밖에도 당관은 진지했다.

“땅을 밟고,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무(武)란 세상 모든 곳에 흩어져 있다.”

독과 암기를 주력으로 다루는 사람에게서 쉽게 나올 말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뜻밖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무속자연(武屬自然)의 무리(武理)를 알고 계십니까?”

신기해서 물은 것인데, 정작 그 말을 들은 당관은 더 놀랐다.

“네놈이 무속자연을 아느냐?”

“알죠.”

“허!”

당관은 어안이 벙벙했다.

“깨달음의 궁극에 이르러서야 접할 수 있다는 무리를 네가 어찌 알고 있단 말이냐?”

당관 역시 아버지인 당형 덕에 무속자연의 무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자연에 녹아들려는 시도를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시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지금에서야 조금씩 건드려 보는 수준이거늘, 이 싸가지 없는 놈은 어떻게 그걸 알고 있을까?

“그냥 오다가다 주워들었습니다.”

“……흐음.”

탐탁지 않은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네놈도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다 싶으면 자연으로 눈을 돌려 보거라. 보고, 느끼고, 깨닫고, 체감하는 과정에서 무(武)는 또 한 차례 성장할 수 있는 법이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하긴, 알아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툴툴거리던 당관이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다음은 어디로 이동하면 되는 거냐?”

“이제 이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음?”

연호정이 발로 땅을 툭툭 찼다.

“바로 이곳, 여기서 싸울 겁니다.”

당관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괜찮은 지형이기는 하다만.”

다가오는 적들을 맞이하기에 나쁘지 않은 지형이다. 산세는 완만하지만 들어오는 입구가 작았고, 후방엔 커다란 절벽이 있다.

단점과 장점을 동시에 안고 있는 지형이었다. 입구에서 싸우면 유리할 것이요, 절벽까지 밀리면 피할 곳이 없는 것이다.

“아군도 도우러 올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은 안 한다. 그나저나, 아군이라니?”

당관이 절벽 위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 계집애를 말하는 거냐?”

묵비는 진즉에 절벽 위, 난간처럼 툭 튀어나온 바위에 앉아 수풀로 위장하고 있었다. 저격(狙擊)으로는 제격인 장소였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당관은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차피 물어본다고 말해 줄 놈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밤이 지나 아침 해가 떠오르고, 그 해가 어느덧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접어들 무렵.

푸드드드득!

한 마리 시커먼 새가 연호정을 향해 날아왔다.

전서응을 받아 서신을 확인한 연호정이 외쳤다.

“옵니다! 한 시진에서 한 시진 반 사이에 이곳으로 당도할 겁니다!”

“병력은?”

“숫자는 일백, 무장급은 최소 셋 이상입니다.”

“호오.”

연호정이 묵비를 향해 외쳤다.

“난전(亂戰)이 벌어질 때까지 공격하지 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묵비가 자신의 말을 들었음을, 연호정은 확신했다.

부웅.

연호정이 광룡부를 들었다.

“슬슬 예열이나 해 둘까요?”

“거 좋지.”

당관이 어깨를 풀었다.

“간만에 살풀이 좀 하겠어.”

한 시진 후.

후욱!

무지막지한 살기를 뿌리는 일단의 무리가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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