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청소의 시작 (1)
연위가 제갈문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군사.”
제갈문호가 씨익 웃었다. 연위의 표정만 봐도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잡았답니까?”
“그렇소. 당가주가 이겼다고 하오.”
“다행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며 당차게 말하고 떠났지만,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대는 미지의 고수, 그 실체와 강함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조직의 하수인이었다.
그러나 역시 당관은 당관이었다. 사천의 패자로 군림하는 독암(毒暗)의 왕은 역시나 대단했다.
“다만 잡긴 했는데.”
연위가 입맛을 다셨다.
“생포는 못 했다고 하오.”
“그렇습니까.”
“나 역시 애초부터 생포를 바라진 않았지만, 냅다 죽인 모양이외다.”
제갈문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가주의 성격을 아시잖습니까? 연 군장 역시 생포를 바랐다면 그 부분을 분명히 말해 두었을 겁니다.”
“맞는 말이오.”
“상대의 강함, 무공 종류 등 아는 게 극히 적은 상황에서 섣부르게 생포하려다가 반격을 당하면, 자칫 전우(戰友)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이게 낫습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오.”
“자, 이제 문제는…….”
“모용가주.”
“그렇습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모용가주의 수완은 대단하오. 어떻게든 잘 구워삶았을 것이오.”
“모용가주의 능력은 믿지만, 문제는 도지휘사 여상도 공(公)의 상황을 모른다는 겁니다. 만에 하나 여 공이 저들과 한패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그 부분,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제갈문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렇습니까? 나 역시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하남 도지휘사 여상도 공의 청렴함과 충의(忠義)는 대단하오. 게다가 지략도 출중하니, 신화교와 손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오. 오히려 역공을 가하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 중이라면 모를까.”
“여상도 공을 아십니까?”
“예전에 두어 번 뵌 적이 있소. 사담을 나눈 적은 없지만, 사람 됨됨이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소.”
“사람은 언제나 바뀌는 법입니다.”
“때로는, 절대 바뀌지 않는 가치라는 것도 있소이다.”
연위가 이렇게까지 자신하는 걸 보면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닌 듯했다.
제갈문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모용가주에게 연락이 오기 전까지 당가주는 후개와 함께 대기토록 하겠습니다. 만일 놈들을 끌어들이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다면 그때는…….”
“출동시켜야 하오.”
“그렇습니다.”
누구를 출동시킨다는 것일까?
제갈문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공공대사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시오.”
사흘 후.
“모용가주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제갈문호가 건넨 서신을 읽은 연위의 눈에서 벼락이 쳤다.
“역시.”
어려울 수도 있는 거래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이제 놈들을 유인해 잡고 나면…….”
“곧장 개봉부로 치고 들어갈 겁니다.”
“좋소.”
연위가 검병을 두들겼다.
“먼저 개봉부로 가겠소. 뒷일을 부탁하리다.”
“알겠습니다. 아! 한데, 연 군장에게 따로 연락을 받은 게 있습니까? 근래 유독 바빴던 탓에 연 군장이 보낸 서신을 아직도 읽지 못했습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호정 말이오?”
* * *
하남성 허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산.
“여기서 어기적거리고 있으니 왠지 옛날 생각이 나는구만.”
모닥불 앞에 손을 가져다 댄 연호정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옛날 생각이라니요?”
“명가 말이야.”
“아, 그 천하제일가라고 하던?”
“응. 이곳 근처에 명가가 있었거든. 지금은 뭐 폐허가 되다시피 했지만.”
“무림맹의 영역으로 지정되었다면서요?”
“한창 공사 중일 거야. 아직 어떤 용도로 쓸지 정확히 말이 나온 건 없지만, 적어도 수성(守城)에 있어서 지형과 성벽이 완벽에 가깝거든. 그냥 놔두기엔 너무 아깝지.”
“그렇군요.”
묵비가 빙긋 웃었다.
“패배를 안겨 준 조직의 영토에 다시 돌아온 기분, 어때요?”
“별 감흥 없어. 그냥 그때 생각이 좀 떠오를 뿐이야.”
불을 받아 일렁이는 연호정의 눈빛이 유독 깊어 보였다.
“참 정신없이 박살 냈는데 말이야. 생각해 보면 나도 무모했지.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어서 달리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너무 막 나가긴 했어.”
“모용가주와 손을 잡고 무너트렸다면서요.”
“그랬지.”
뭘 떠올렸던 것일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하긴, 언제나 그랬지. 매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계획대로 된 적은 얼마 없었어. 결국 내가 내린 선택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몸부림치기 바빴던 것 같아.”
“다 그렇게 사는 거 아닌가요.”
사람들은 말한다. 연호정의 안목과 지혜가 능히 천하 정점에 이르렀다고.
연호정은 그 사실을 부정했다.
물론 눈치가 빠르고, 허점을 찌르는 능력도 출중하다. 그 역시 자신의 장점을 겸양 떤답시고 부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신산(神算)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다. 그저 ‘이렇게 하겠다.’라고 한번 마음을 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을 뿐이었다.
무모하다면 무모하고, 추진력이라면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똑똑하다고 세상일 전부를 꿰뚫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런 면에서 연 공자는 대단해요. 머리를 써야 할 때와 직감으로 승부를 봐야 할 때를 아는 것 같거든요.”
“직감이라.”
“그때도 그랬어요?”
“명가 때?”
“아니요. 그 흑제성 때요.”
흑제성.
연호정에겐 과거이자, 이제는 뒤바뀌어 버린 미래에는 태어나지 않을 흑도 최강의 연합.
지금의 묵룡부와는 기원부터 목적까지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어떤 의미로는 연호정에게 있어 가장 빛나는 순간이던 때이기도 했다.
“글쎄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연호정이 입맛을 쩍 다셨다.
“그때도 정신없이 달리기는 했지. 애초에 의도하고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그저 작은 패거리에 불과했어.”
“흑제성이라…… 이름이 거창하기는 하네요. 연 공자의 별호를 딴 거죠?”
“그래.”
흑암제(黑暗帝).
흑암이란 곧 지독한 어두움을 뜻한다. 동시에, 흑암지옥(黑暗地獄)을 뜻하기도 했다.
흑암지옥은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이 다스리는 지옥으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심연 그 자체를 뜻한다.
불교의 십대지옥 중 마지막 지옥이며, 마지막 심판에 따라 윤회를 하거나 흑암에 떨어지게 된다.
흑암지옥은 자식을 낳지 않으면 떨어지는 지옥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정확히는 자식을 낳지 못한 것 역시 과거의 업(業)으로 인한 결과이며, 흑암은 그 업을 심판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흑암지옥은 자손 번식이라는 생물의 본능을 거세당한 악인을 벌하는 곳이다.
그래서 마지막 지옥이다. 생명의 순환을 결정짓는 마지막 심판대의 갈림길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호정은, 바로 그 무서운 지옥을 본뜬 별호로 불리며 천하를 종횡무진했다.
적들이 거쳐야 할 마지막 지옥으로서 살아온 남자인 것이다.
“모두가 그렇지. 이 무림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탁탁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가 연호정의 단조로운 목소리를 꾸며 주는 악기가 되었다.
“칼과 칼이 부딪치면 누구 하나는 죽어. 생사결에서, 승자는 패자의 최종 관문이 되는 거지. 지금껏 내 손에 죽은 모두가 날 넘어서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있어 끝내 넘지 못한 마지막 하나의 봉우리였을 따름이야.”
“…….”
“내가 붙인 별호는 아니지만, 난 그렇게 살아왔다. 흑암제라는 별호가 생긴 후, 전쟁은 몰라도 전투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어. 그전까지 숱한 패배를 겪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얼핏 보면 씁쓸한 것 같기도 했고, 또 다르게 보면 기대로 가득한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달라. 이제는 그런 무서운 별호로 불리고 싶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흑암제라는 칙칙한 별호보다는 벽산호장이란 별호가 훨씬 있어 보이잖아?”
묵비가 피식 웃었다.
“그렇긴 하죠.”
“지금 생각해 보면 흑암제란 별호도 웃겨. 마지막 관문? 개소리지. 결국 나도 사람이야. 정작 난 마지막에 뒤통수 맞고 죽었는데, 흑암은 무슨 흑암이냐.”
“당가주님, 아니 그때의 당관에게 암기를 맞고 죽었다고 했죠?”
“그랬지.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죽어 줬을 것을. 하긴, 그렇게 죽었다면 나름대로 흑암제로서 잘 죽은 게 되는군.”
연호정의 말을 들으며, 묵비는 생각했다. 사람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라고.
그녀는 연호정의 고백을 믿었다. 그가 수십 년의 삶을 살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는, 믿기지 않는 그 말을 완전히 믿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처럼 뛰어나고 경험 많은 강자조차도 거대한 운명의 흐름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흑암 속의 경주다. 그렇다면, 역시나 연호정처럼 주변 눈치 안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불태우며 사는 게 마음 편할 것이다.
연호정을 보는 묵비의 눈이 깊어졌다.
‘나는?’
그간 연호정을 보면서 항상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점이 있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목표가 있었다. 목표를 달성하면, 그 즉시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하고 달렸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팍팍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묵비가 보기에, 팍팍함과는 별개로 연호정은 자신의 인생을 진정 사람답게 살 줄 아는 남자였다.
적어도 연호정이라면, 죽기 전 남은 사람을 걱정할지언정 자신의 삶에 후회를 남기지는 않을 테니까.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난 지금으로도 만족해. 하지만 나중에도 이럴까? 언젠가는, 나만의 삶을 위해 훌쩍 떠나 버릴 때가 올 수도 있을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연호정과 연위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에 잠겼던 묵비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연 공자도 성장했네요.”
“뭐가?”
“내가 알던 연 공자는 당한 건 그대로 갚아 주는 사람이었거든요. 두 배, 아니 열 배로요.”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아.”
“하지만 지금은 연 공자의 삶을 끝장냈던 당가주님과 제법 친하게 지내잖아요.”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음, 그건 그렇군. 하지만 뭐, 지금 따지고 들 수도 없잖아? 그 양반 입장에선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인데.”
“그것도 그렇지만요.”
“게다가 뒤통수는 맞았지만, 그때도 당가주님을 나쁘게만 보진 않았어. 적어도 전쟁에 나설 때만큼은 믿음직한 아군이었거든.”
“지금도요?”
“물론이지.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믿음직해.”
그때였다.
“내 얘기 하는 거냐?”
연호정과 묵비는 놀라지 않았다. 당관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오셨습니까?”
모습을 드러낸 당관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언제 네놈과 전쟁을 치렀다는 거냐?”
연호정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냥 해 본 소립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음침한 놈.”
“그나저나, 역시 승전보를 가져다주셨군요.”
“생사결의 미덕도 모르는 반쪽짜리였다. 별것도 아니었어.”
“그런 것치고는 소매를 제법 많이 태워 드셨네요.”
“시끄럽다.”
당관이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모용 놈에게는 연락이 왔느냐?”
“예. 성공했다고 합니다. 신화교 놈들을 유인할 생각이라던데요.”
“그래?”
당관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좀 그럴듯한 놈들이 올까 싶군.”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약하면 죽는 거지. 하지만 난 약하지 않아.”
역시나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네놈 일은 잘 처리했느냐?”
“물론이지요.”
연호정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재미 볼 일만 남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