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연합 (5)
대별산맥을 달리는 세 남녀의 신법은 은밀하고도 빨랐다.
당관이 힐끔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은 평온한 얼굴로 산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은밀 기동을 위해 시끄러운 교룡쇄는 놓고 왔지만, 어깨에는 보란 듯이 광룡부를 걸치고 있었다.
저런 무장을 했음에도 용케 기척을 죽이고 잘 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만한 크기의 도끼는 그 자체로 공기의 저항을 크게 받는지라 철쇄만큼이나 은밀 기동에 쥐약인데도.
‘흠.’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당관은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물었다.
“대체 어디서 너 같은 놈이 튀어나온 거냐?”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지간한 절정고수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 겨우 따라잡을 만한 속도임에도, 두 사람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벽산연가는 검학(劍學)에 정통하지 않았느냐? 한데 네놈은 어쩌다가 그런 흉악한 물건을 들게 되었느냐, 이 말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제 성질머리에는 이게 낫더군요. 검가(劍家)라고 꼭 검만 휘둘러야 하는 것도 아니고.”
“웃기는 놈이로군.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곧 재능이 없다는 것. 없는 재능이라면 피땀을 흘려서라도 가문의 정통을 이으려 노력해야 마땅한 법이거늘.”
“당가는 그럴지 몰라도 본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가법에 철저하시지만, 이런 부분에선 유연하시거든요.”
“……너희 연씨들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족속들이야.”
“저희가 보기에는 당씨들이 더 이상합니다.”
“시끄럽다.”
연호정이 당관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대충 뜻을 해석해 보면 ‘지가 먼저 말 걸어 놓고 시끄럽대.’, ‘하여튼 당씨 놈들은.’ 등의 말이었다.
당관은 연호정의 중얼거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들리지도 않았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이것 하나는 묻고 싶었다.
“제아무리 가풍이 다르다 한들 마땅히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는 법이다.”
“그건 그렇지요.”
“가문의 정통 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 후계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법. 너처럼 잔머리 잘 굴리는 놈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압니다.”
“하면? 네놈이 네 애비 몰래 연가의 검법이라도 익혔다는 것이냐?”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그래도 제가 연가의 장남입니다. 본가의 검학 대부분은 다 외고 있지요.”
“한데?”
“다만, 제대로 연성해 본 적은 없군요.”
당관이 눈썹을 찌푸렸다.
“네놈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이냐? 그런 정신머리로 어찌 가문의 적통이라 하겠느냐?”
“적통은 저 말고도 또 있지 않습니까.”
“……?!”
“오히려 본가의 연씨검법(燕氏劍法)은 저보다 지평이 더 많이 꿰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검의(劍意)에 한해서만큼은 저보다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당관의 얼굴에 황당함이 드리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뭐가요?”
“너 설마, 네 동생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할 작정인 게냐?”
연호정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저 같은 개백정이 가문의 후사를 맡을 수 있을 거라 보셨습니까?”
“……?!”
“설령 검법에 정통했다 한들, 자격이 되지 않는 놈이 가문을 이어서는 아니 되지요. 본가의 가주로는 저보다 지평이 더 어울립니다.”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지평이 낫긴 낫습니다. 어쩌면 본가 역사상 최고의 가주가 될 수도…….”
“너, 진심이냐?”
“예?”
당관의 얼굴이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졌다.
“네 동생에게 후계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말, 진심이냐고 물었다.”
“그럼 이게 뭐라고 애써 거짓말까지 합니까?”
“……!!”
“지평은 잘할 겁니다. 그 정도 믿음은 있어요.”
“네놈은 가주 자리에 욕심도 없단 말이더냐?”
연호정이 코웃음을 쳤다.
“무가의 가주가 되면 누가 돈이라도 줍니까? 아니면 띵까띵까 놀기만 해도 무공이 늘어요? 그도 아니면, 하늘이 어여삐 봐 주기라도 한답니까?”
이런 미친.
당관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도 열지 못했다.
연호정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일견 한가롭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한 가문의 가주라는 자리를 낮게 보는 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대단하다고 보지요. 그래서 저보다 지평이 더 낫다고 하는 겁니다.”
“그 대단한 자리에, 네가 앉고 싶은 욕망은 없다는 것이냐?”
이미 흑제성의 성주로서 수만 명의 흑도 사파를 거느려 본 연호정에겐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또한 그렇기에 연호정은 알고 있었다. 한 조직의 수장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어쩌면 당관의 말마따나, 흑제성의 성주보다는 벽산연가의 가주가 되는 게 더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일 수도 있었다.
연호정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제 주제를 아는 사람입니다. 불한당들의 우두머리 정도라면 모를까, 한 가문의 가주가 되는 것은 무리입니다. 차라리 천하제일을 노리는 게 마음이 더 편할 듯합니다.”
당관의 눈이 번쩍거렸다.
“네 꿈이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냐?”
“천하에서 무공이 가장 강해지는 것.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겠지요. 특별하니까요. 하긴, 무공과 실전의 상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진짜 천하제일(天下第一)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모를 겁니다.”
“…….”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제게 있어서 정명한 조직의 수장이 되는 것보다는 천하제일을 노리는 게 더 쉬워 보여서요.”
꼬아서 들으면 참으로 오만한 놈이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호정의 진심이었다.
흑제성은 작정하고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피 튀기는 아수라장을 헤쳐 나오니 어느새 그의 곁에 강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들과 함께 흑도를 다스리며 천하를 상대로 일장 난투를 벌여 보자고 만든 조직이 흑제성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연호정 역시 크게 성장했다.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책임감에 대해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강함이 최고의 덕목인 흑도 사파라서 가능한 일이었을 뿐이다. 연호정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절대로 연씨 문중의 주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주가 되면, 지금의 사천당가와 다를 바 없이 오만하기 그지없는 전투 조직으로 돌변해 버릴 테니까.
“웃기는 놈이로군. 세상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놈이라고 해야 할지, 야심도 뭣도 없는 반쪽짜리 얼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뭐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뭐가 되었든, 본가의 가주 자리에 지평이 더 어울린다는 제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뭐가 말입니까?”
“형제란 그저 관계를 정의하는 단어일 뿐이다. 이 살벌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하는 경쟁자에 불과하지. 네 성질머리도 보통은 아닌데, 대체 동생에게 무엇을 빚졌기에 그리 양보하는 거냐?”
“양보라…….”
연호정의 미소가 씁쓸해졌다.
신랄하게 쏘아붙이던 당관조차도 그의 미소를 본 순간엔 입을 다물었을 만큼, 어딘지 사연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걸 몰랐습니다.”
“뭘?”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경쟁자이기 전에, 보호하고 아껴 주고 나아가 날 넘어서길 바라야 할 애정 어린 대상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
“한때나마 당연히 아껴 줘야 할 형제를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그보다 몇 곱절은 더 잘해 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
“뭐, 마음은 그렇긴 한데 영 쉽지 않더군요. 하도 바빠서 말입니다. 어쩌면 바쁘다는 것도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당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란 놈은 참으로 알 수가 없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가끔 제가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는 알겠다. 네놈이 반쯤 미쳤다는 걸.”
연호정이 피식피식 웃었다.
“미쳐야 살 수 있는 세상 아닙니까? 껄껄.”
“웃지 마라.”
“컹.”
“뭐냐, 그 품위 없는 소리는.”
“천하의 당가주님과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잖습니까.”
“미친놈.”
“안다니까요.”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그가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연호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훅!
세 사람이 이전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산길을 내려갔다.
잠시 후, 커다란 바위 뒤에서 가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이십니까?”
가득상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직 새싹도 나지 않은 수목들로 둘러싸인 거대한 숲이었다.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기냐?”
“그렇습니다. 방도들을 풀어 일대를 살펴본 결과, 놈은 아직 저곳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당관이 연호정을 보았다.
“그렇다면 확실하군. 도지휘첨사 이상급 고위 관료로 예상되는 그놈, 신화교 측 인물임이 분명해.”
“그렇군요.”
“…….”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당관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네놈의 눈이 얼마나 화려하게 불타오르고 있는지를.
연호정이 가득상에게 물었다.
“일단은 하남성부터 끊어야 하오.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리라 믿소.”
“물론이오. 다만, 이번 작전이 시작되면 신화교에는 어떤 식으로든 비상이 걸릴 것이오. 나아가 황궁과 관부까지도.”
“알고 있소.”
“하남성부터 끊는 것이 아니라, 하남성 안에서 다 끝내야만 하오.”
“걱정하지 마시오.”
가득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 공자, 그리고 묵 소저. 건투를 빌겠소.”
포권으로 예를 표한 연호정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러거라.”
“혹시 말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버겁…….”
“시끄럽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따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만 가라.”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승전보를 기다리겠습니다.”
파악!
그렇게 연호정과 묵비가 산 아랫길을 타고 서쪽으로 질주했다.
지금까지의 신법도 최선을 다한 게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이곳으로 올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달리는 남녀,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두 사람의 신법은 혀를 내두를 만큼 빨랐다.
가득상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가주님께서 원하실 때 시작하시지요.”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질질 끌겠느냐. 후딱 해치워 버려야지.”
* * *
거점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마당에 나와 하늘이라도 올려다보는 게 더 나았다. 워낙 나뭇가지가 빽빽해서 그조차도 잘 보이진 않았지만, 요뢰의 눈은 무수히 많은 나뭇가지의 틈을 뚫고 별빛 가득한 하늘을 보았다.
“후우.”
가볍게 내뱉는 숨결에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확실히 중원의 추위는 남다른 면이 있어. 황량하기 그지없는 내 고향의 서늘함과는 전혀 달라.”
우웅. 우우웅.
요뢰의 동공이 은은한 적광(赤光)을 뿜었다.
“사실, 며칠 동안 머물 생각이었던지라 좀 잘까도 싶었다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데 기분이 좀 묘하더라, 이 말이지. 콕 집어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어. 그래서 잠도 안 자고, 살풀이도 없이 이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걸세.”
느릿하게 눈을 감은 요뢰가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마안(魔眼)이 피처럼 붉어졌다.
“과연 내 직감이 옳았군. 이토록 재미있는 장난감이 나타날 줄이야.”
그가 바라보는 곳.
저 멀리 수풀 너머에서, 짙은 녹의(綠衣)를 입은 중년 사내가 오만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아아악.
요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독특한 기도로군. 천하에 이름 석 자 정도는 새겼겠어. 정체가 무언가?”
중년 사내, 당관의 대답은 압권이었다.
“이름이 두 자라서 유감이다. 어차피 곧 잊게 될 이름일 텐데, 쓸데없는 데에 신경 쓸 시간에 도망이라도 쳐 보는 걸 권고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