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42화 (342/963)

342화. 연합 (2)

시간이 흘렀다.

곧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 그러나 방 안에 모인 이들 중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

침묵이 무겁다.

제법 그럴듯한 향을 풍기던 차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애써 타 왔는데 어째 안 드십니까?”

당관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도(茶道)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 타 온 차, 마셔 봤자 내 혀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래도 애써 타 왔는데요.”

“시끄럽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당관 성격상 이런 식으로 나오리란 걸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까칠한 반응이었다.

하기야 저 자존심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독이라도 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나마 연위와 만나고 딸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그 살벌한 성격이 조금은 무뎌진 것 같았다.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묻겠다.”

“말씀하십시오.”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 내려는가?

“그놈들, 대체 어디서 암약하고 있던 놈들이냐?”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연호정에게로 향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새외라는 것 외에는 잘 모릅니다. 저 멀리 서북방 어딘가에서 발원했다고 보고 있긴 한데, 그조차도 확실하지는 않아요.”

“서북방이라면 청해나 신강을 말하는 거냐?”

“서장도 포함될 겁니다. 물론, 그 역시 확실하진 않습니다. 애초에 놈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게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저 역시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움직이진 않았어요.”

“흥! 말은 좋군.”

당관의 눈이 고약한 살기를 발했다.

“새외의 잡것들이란 말이지.”

비록 가문의 일이 아니면 ‘공동 의식’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그였지만, 중원인으로서의 자부심 하나만큼은 차고 넘치는 사람 역시 그였다.

애초에 사천성은 새외 무림 침공의 일차 관문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누군가는 청해성이 새외와의 전쟁의 일차 관문이라 하지만, 실제로 중원(中原)에서의 전쟁이라 한다면 사천이야말로 진짜 무대다.

즉, 당관에게 있어 새외 무림의 침공이란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가문의 역사가 새외와의 피비린내로 점철되어 있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증오심을 불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장이라면 포달랍궁(布達拉宮)이나 뇌음사(雷音寺)도 있을 텐데, 설마하니 놈들도 한패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삼교와 그들은 전혀 다른 길을 추구하는 종교 단체입니다. 반목한다면 모를까, 힘을 합쳤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포달랍궁이나 뇌음사의 움직임은?”

“후개의 말로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다고 합니다. 물론 작년의 정보였으니, 지금은 또 모르겠습니다. 뇌음사의 경우 슬슬 기지개를 켜려는 것 같다고는 하는데, 정확한 건 아직 불명이지요.”

“조용하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 그 미친 땡중들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지. 놈들의 사상은 지나치게 사이(邪異)해. 그나마 포달랍궁은 괜찮지만, 뇌음사 그놈들은 그냥 사파의 잡것들이나 다를 바 없는 놈들이야.”

실제로 뇌음사의 역사를 찾아보면, 그들 역시 시작은 선진 불교를 따라간 수양자들의 집단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천축국의 유가기공(瑜伽氣功)을 받아들이고, 수양보다는 힘에 대한 집착이 생기기 시작한 뇌음사는 서역과 동방의 기이한 술법과 무공을 얻어 와 독자적인 무림 세력으로 발전했다.

그중 뿌리를 잊지 않고자 따로 떨어져 나간 것이 대뇌음사(大雷音寺)요, 이단으로 발전한 것이 소뇌음사(小雷音寺)다. 당금 무림에서는 그들을 그렇게 나누고 있었다.

당관이 말하는 뇌음사는 바로 소뇌음사를 뜻했다.

“연관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서장은 놈들이 수백 년간 지배했던 구역이야. 네 말마따나 삼교라는 족속들이 그리도 막강한 힘을 구축했다면, 포달랍궁이든 뇌음사든 삼교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요.”

그때, 연위가 끼어들었다.

“그들에 대한 대처 이전에,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옳소.”

“동의하오.”

당관이 입맛을 다셨다.

“위지휘사사 진무 관직인 놈을 죽였다고 했느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잡졸이니 걱정할 건 없겠군.”

무시무시한 자신감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도지휘첨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진무 역시 나름의 위세가 있는 직위였다. 아니, 애초에 무림인으로서 관리를 죽인 것 자체가 충격적인 일이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뭐, 그쪽이야 그렇다 쳐도 지금 오고 있는 놈은 다르지요.”

“도지휘첨사라 했나?”

“정확히는 도지휘첨사급 이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도지휘사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까지는 무리겠지요.”

도지휘사는 한 성의 군정을 장악하는 무시무시한 관직이다. 제아무리 정치를 허투루 한다 해도, 이런 일에 끼어들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당관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의 병력을 통솔하는 도지휘첨사는 전쟁 준비는 물론 군사 훈련의 부서도 담당하는 놈들이다. 최소 도지휘첨사 이상급이라면, 하남성의 군력(軍力) 대부분이 이미 저쪽에 넘어갔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깝깝하게 되었군.”

당관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지휘첨사라…… 종이품(從二品) 이상이라면 모를까, 그 밑인 첨사라면 몰래 죽여 버려도 어떻게든 수습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방 안의 분위기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다.

연위가 헛기침을 했다.

“가주. 지나치게 위험한 발언이오.”

“삼교란 족속들이 정녕 황실과 관부를 장악했다면 이미 위험은 코앞이오. 어떻게 대처해도 위험할 판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소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위 말마따나 지나치게 위험하고 과격한 말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당관이 창가를 힐끔거렸다.

“이제 정오가 다 됐는데, 그 망할 놈은 왜 안 오는 거요?”

“곧 오지 않겠소?”

연위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각 후.

훅!

스멀스멀 다가오는 하나의 기운이 파군각 전체를 에워쌌다.

묵비와 연지평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음습하면서도 엄청난 폭발력이 느껴지는 이 기도의 소유자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당관이 조소를 머금었다.

“우습군.”

실제로 심경이 복잡하든, 단순한 보여 주기식이든 지나치게 유치하지 않은가.

적어도 당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 모용군과의 정면 승부가 가능한 두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자 역시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오.”

“흥! 어련하시겠나.”

“다른 게 아니라 호정 때문에 그럴 거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연위가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모용군과의 싸움에서 제일 전선에 서 있던 사람이 바로 호정이오. 그리고 모용군은 자신의 상대로서 호정을 인정하고 있었소.”

“…….”

“한데 호적수라고 생각했던 적이 사실은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었으며, 최종 목표도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소. 모용군의 자존심도 크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관이 가만히 연호정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하여간 너도 더럽게 얽혔구나.”

“신경 안 씁니다.”

“싸가지 없는 놈.”

잠시 후.

드르륵.

문이 열리고, 모용군과 제갈문호가 들어섰다.

“…….”

방 안의 공기는 이제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용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연위, 잔뜩 살기에 젖은 눈을 빛내는 당관, 긴장한 얼굴의 묵비와 연지평, 그리고…….

‘…….’

너무나도 투명하여 그 속을 읽을 수 없는 연호정의 깊은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제갈문호가 나섰다.

“앉으시지요.”

모용군이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문을 닫고 들어온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바쁘시기도 할 테고, 쓸데없는 과거지사를 논해 봤자 마음만 불편해질 것을 압니다.”

제갈문호의 목소리는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수양 깊은 선비의 목소리. 의도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목소리 덕에 한없이 무겁기만 하던 공기가 한층 가벼워지는 듯했다.

스륵.

제갈문호가 탁자 위에 문서들을 올려놓았다.

“모용가주께서 먼저 읽어 보시지요.”

모용군은 말없이 문서를 읽었다.

살벌한 기도와는 달리 그의 눈은 신중하기만 했다. 문서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손끝에 깊은 집중력이 엿보였다.

잠시 후, 그가 문서를 내려놓았다.

“다 읽었소.”

꽤 충격적인 내용이 많을 텐데도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제갈문호가 말을 이었다.

“당가주께서도 보시지요.”

당관이 홱 소리가 나도록 문서 뭉치를 집어 들었다.

펄럭!

당관은 모용군과 달랐다. 거칠게 종이를 넘기는 손끝에서 신경질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하지만 그 역시 육대세가의 수장이며 무림의 거물이었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났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모용군 못지않은 신중함으로 가득했다.

잠시 후, 당관 역시 모든 문서를 읽었다.

“의선각주 기우희, 그 계집이 신화교주란 망할 놈의 딸래미라고?”

“그렇습니다.”

“웃기는 계집이로군.”

제갈문호가 말을 덧붙였다.

“다른 건 몰라도 기 의원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에 관해서는 저와 연가주, 그리고 연 군장과 묵 부장 모두가…….”

“의심 안 하오.”

“예?”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싸가지가 그런 것도 확인 안 하고 맹에 적군의 끄나풀을 들였겠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제 능력에 대한 신뢰, 감사할 따름입니다.”

“능구렁이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 들었더냐?”

“예.”

당관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연위가 입을 열었다.

“일단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적에 관한 정보를 공유했소. 적어도 지금껏 조사한 사항까지는.”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들 아시겠지만, 한정된 정보를 더 깊고 자세히 파 보았을 뿐, 실질적으로 놈들에 관한 진짜 정보는 없었습니다.”

그게 문제였다.

신화교는 황실과 관부에 침투했고,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음교는 묵룡부를 세우는 데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고, 여전히 묵룡부를 중원 진출의 교두보로서 탐내고 있다.

결국은 그것이 전부였다. 적들이 어디에 있는지, 침투했다면 어떤 조직을 얼마나 장악했는지, 놈들의 전력은 어느 정도인지 등에 관해선 아무것도 파악된 게 없었다.

“즉.”

신경질적이었던 당관의 목소리가 북풍처럼 싸늘해졌다.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도지휘첨사 놈을 잘 구워삶아야 한다는 것이로군.”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아가, 그자가 정말 신화교의 교인이라면 절대 무림맹에 발을 들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제국의 공권력을 사용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모용군이 말했다.

“그자가 첫 번째로군.”

“무슨 말씀이신지요?”

“일단 그자부터 잡아 보면 되는 것 아니오?”

“물론 그렇습니다만…… 위험하다는 걸 모르진 않으실 겁니다.”

모용군은 제갈문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심유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며 기묘한 공기를 만들어 냈다.

연호정이 물었다.

“인맥이 있으십니까?”

모용군이 답했다.

“아슬아슬하지.”

“된다고 믿겠습니다.”

“정면에서 부딪칠 건가?”

“누가 나서든 그게 가장 좋겠지요.”

“이번엔 자네가 빠지는 게 좋겠군.”

“저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은 나왔군. 나와 자네가 뒤에서 받치도록 하지. 정면에서 부딪칠 자만 고르면 되겠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천하의 제갈문호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모용군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가주.”

당관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용군은 그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신화교 측 고수로 추정되는 도지휘첨사, 당신이 잡아 보겠소?”

“……뭐라?”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손도 근질근질하실 테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뭔 소리냐?”

“싸워 주시라고요.”

“……?!”

“아, 놈들은 열양공에 특화된 놈들입니다. 독은 안 쓰시는 걸 추천…….”

당관이 기어이 성을 냈다.

“뭔 소리인지 자세히 설명부터 하거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