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밝음을 겨누다 (8)
거처로 들어온 모용군을 모용연화가 맞았다.
“아버지!”
모용연화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아버지의 의복 여기저기가 거칠게 뜯겨 있었던 것이다. 누가 봐도 한바탕 싸운 뒤의 모습이었다.
“괜찮으세요? 설마 연호정 그 작자가……?!”
“연화야.”
“네?”
“거처로 돌아가라. 혼자 있고 싶구나.”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모용연화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우웅. 우웅.
자신의 기세를 완벽하게 다듬고 있던 모용군. 그러나 딸과 말을 섞는 순간, 잘 다스리고 있던 마음에 파랑이 일었다.
마음의 흔들림은 곧 정돈된 기세까지도 흔들리게 만들었다. 광포하기 그지없는 뇌정공의 기파에 모용연화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단숨에 알아차렸다. 아버지의 기분이, 그녀가 보았던 어떤 순간보다도 최악이라는 것을.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
“그래.”
모용연화가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그리고 한참 후.
쾅!
모용군의 주먹이 벽을 뚫고 깊이 박혔다.
내공이 무의식적으로 육신을 보호하는 경지였다. 당연히 그의 주먹은 멀쩡했지만, 정작 그의 정신은 멀쩡하지 못했다.
“……광신삼교?”
그게 대체 뭐지?
황궁과 관부에 침투하여 천하를 전복하려 하고 있다고? 묵룡부 역시 그 삼교 중 하나로 인해 세워진 조직이라고?
……그리고 그 조직들의 힘이 그리도 대단하단 말이지?
모용군의 눈에 핏발이 섰다.
쾅! 쾅!
그답지 않은 거친 주먹질이었다. 그가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벽에 큼직한 구멍이 뻥뻥 뚫렸다.
“헉헉.”
어찌나 화가 났는지 숨소리까지 거칠어졌다. 모용군 정도의 내가고수가 호흡조차 다스리지 못할 정도라면, 심동(心動)이 보통 크다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모용군은 모용군이었다. 참을 수 없는 격정과 혼란 속에서도, 그의 무의식은 어느새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리 화를 내고 있는가.’
이게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모욕을 당한 것도 아니요, 자신의 민낯이 낱낱이 까발려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연호정에게 고마워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화가 나는가? 왜 울분을 참을 수 없는 건가?
‘단순히 놀랐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것을 상대가 알고 있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순간 모용군의 눈이 번쩍였다.
그가 형제들을 제치고 가주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재능과 무서운 결단력, 혈육조차 내칠 수 있는 냉철함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장점을 타고났더라도 머리가 뛰어나지 않으면 형제들을 숙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뛰어난 두뇌가 과거를 빠르게 되짚었다.
‘그래, 그놈은 나를 보고 있던 게 아니었다.’
연호정.
모용군은 연호정과 함께 명가를 무너트렸다. 그 이후 수도 없이 부딪치며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한 번씩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놈의 주적(主敵)은 내가 아니었어.’
연호정은 언제나 자신에게 날을 세웠다. 그러나, 자신을 무너트리는 게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섬뜩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은 단순히 자신을 무너트리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정치적으로 말살시키려는 시도도 많았지만, 놈은 언제나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예민한 모용군은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최고다.’
자부심? 자존심? 자존감? 뭐라고 말해도 좋다.
자신의 적이라면, 절대 다른 곳을 봐선 안 된다. 오직 자신을 봐야 한다. 모용세가의 수장은 다른 곳에 여유를 줄 정도로 만만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은 달랐다.
‘대체 왜?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기에?’
예전에는 연호정 역시 자신처럼 권력을 좇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제 놈의 가문을 무림 최고로 만들기 위해서, 나아가 천하를 거머쥐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했던가?
어느새 모용군은,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연호정을 보면서도 그놈 역시 자신과 다를 게 없다고 단정 짓고 말았던 것이다.
“……즉.”
모용군의 얼굴이 형용하기 힘든 모습으로 일그러졌다.
“놈은, 이 나를 상대하는 데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로군.”
연호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삼교라는 놈들에 대해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정보를 자신에게 알려 줬을 리가 없다. 열 번, 아니 백 번은 신중하게 생각한 후 자신에게 말해 줬을 것이다.
말하자면 연호정은 삼교를 무너트리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었음에도 자신까지 상대한 것도 모자라 무림 정치의 판도를 뒤엎고 있었던 것이다.
“……!!”
문득 모용군은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놈이……?!’
이중, 삼중의 일을 처리했다.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일을 지금까지 이 악물고 버텨 온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희대의 천재라도 가능할지 의문이다. 연위나 제갈문호가 도움을 주기야 했겠지만, 애초에 그만한 거인들을 움직이게 한 것도 연호정이었다.
연호정은 그 모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었고, 모든 사태에 끼어들고 있었으며, 나아가 어떠한 일도 실패 없이 끌고 왔다.
“허허허.”
모용군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었단 말이지?”
연호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년답지 않은 연륜으로 가득한 눈빛, 상황이 변할 때마다 자유자재로 바뀌는 대처 능력.
그리고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보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가히 예지 능력이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을 신산(神算)의 지혜.
“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정도가 아니라, 이미 나를 앞서 있었단 말이지?”
모용군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연호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여야 한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죽여야 해. 놈은 괴물이다. 지금도 이럴진대 오 년 뒤에는 얼마나 클 것이고, 십 년 뒤에는 얼마나 더 성장할 것인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연호정의 십 년 뒤를 생각하니 눈앞이 막막했다. 놈이 이 아수라장 같은 무림에서 십 년을 버티면, 그때는 무림 전체가 떼거지로 덤벼도 잡기 힘든 진짜 괴수가 될 것이다.
아니, 십 년이나 걸릴까? 놈의 능력과 재능을 생각하면 당장 내년이라도 그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머릿속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속삭였다.
‘안 돼. 언젠가는 죽여야 할 대상이지만, 지금은 안 된다. 절대 놈을 자극해선 안 돼.’
왜? 적어도 지금은 놈보다 내가 강한데? 차라리 작정하고 놈을 암살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놈이 그것도 생각지 않고 내게 그런 정보를 전했을 리가 없잖아?’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어이가 없군.”
천하의 모용군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고민으로 시간을 축내고 있는가.
모용군이 벽에 머리를 기댔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 머리는 무섭도록 차가워지고 있었다.
‘분명해. 놈은 그 광신삼교란 족속들에 대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예상이 아닌 확신이었다.
아주 잠깐 그게 거짓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접었다.
신이나 연호정이나, 그런 중차대한 정보로 서로를 속일 만큼 작은 그릇이 아니었다. 이것은 선을 넘고 말고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연호정과 싸우며, 모용군은 그의 기(氣)에서 느껴지는 진심과 절박함을 읽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드러난 진심을 꾸밀 수는 없는 법이었다.
‘놈이 내 앞에서 그렇게나 마음을 활짝 열었다는 것은, 이제는 버티기 어렵다는 뜻이다.’
삼교, 묵룡부, 자신.
그 모든 일을 처리하면서 어떻게든 버텨 왔지만, 이제는 한계가 온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찾아와 공동의 적부터 처리하자고 한 것이다.
그리고 연호정의 그 선택은 참으로 옳은 것이었다.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드니, 연호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연함으로 초조함을 숨긴 그 야수의 얼굴이.
‘나도 의신회를 싫어하오. 당신과는 다른 이유지만.’
‘당신에게 있어 무림맹은 성지(聖地). 그 성지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이의 눈에, 감히 무림맹을 건드리려 한 놈들이 곱게 보이지는 않겠지.’
모용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군. 의신회 운운하며 날 떠보려 하다니.”
감겨 있던 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듯했다. 어렸을 적, 종일 쭈그려 앉다가 갑자기 일어섰을 때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그때였다.
스르륵.
모용군의 기감에 무수히 많은 기척이 읽혔다.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작정하고 기도를 드러내는 이들. 개개인의 무공이야 모용군 입장에선 코웃음이 날 만큼 수준이 낮았지만, 개중에는 무시 못 할 기운들도 꽤 많았다.
‘개방인가.’
개방도 수십 명이 거처 일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모용군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일까 싶어 감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용군은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연호정에게 그 말을 듣기도 했거니와, 더는 날을 세울 힘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달이 밝았다.
“긴 밤이 되겠군.”
* * *
연위와 제갈문호, 묵비와 연지평이 거처로 돌아온 연호정을 맞았다.
“헉! 형님?!”
연지평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누가 봐도 괜찮은 몰골이 아니었다. 입가에는 피가 묻었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으며 잘 차려입은 옷은 여기저기 베이고 뜯긴 자국으로 가득했다.
제갈문호가 서둘러 물었다.
“모용군과 싸운 겐가?”
“가볍게 붙었습니다. 그 작자의 진심도 확인할 겸.”
“이 사람아, 자네 몰골을 보게. 그게 어디 가볍게 붙은 정도인가?”
“만에 하나 그 작자가 정말 삼교와 연이 있었다면 제 선에서 손을 써야 했습니다. 몸도 풀 겸, 상대의 의도도 읽을 겸 간만에 땀 좀 뺐습니다.”
수틀리면 죽여 버릴 기세로 싸웠다는 뜻이었다.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강단에 제갈문호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연위가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네가 보기에 어떻더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구 할 구 푼의 확률로, 모용군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음.”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모용군이 삼교와 손을 잡진 않았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갈문호가 물었다.
“확실한가?”
“제 개인적으로는 확신합니다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해서 구 할 구 푼이라 말한 것입니다. 앞으로 함께한다 한들, 긴장을 놓지는 말아야겠지요.”
“후우, 그렇구만.”
제갈문호가 연호정의 어깨를 두들겼다.
“고생했네. 참으로 고생이 많았어.”
“아닙니다. 이 정도야 뭐.”
연호정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일단 후개에게 부탁해 모용세가의 거처 일대에 감시의 눈을 붙였습니다.”
“잘했네.”
“그리고 내일 정오까지 삼교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을 전부 모아 주십시오.”
“내일 정오?”
연호정은 모용군과 나누었던 대화를 그대로 들려 주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답군. 하기야, 아는 사람의 면면을 보는 것만큼 확실한 일이 없지.”
“그간 삼교에 관한 조사 사항도 준비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과거 얼마나 박 터지게 싸웠든, 이제는 손을 잡고 공적을 처단해야 할 동지가 되었다. 정보 공유는 필수였다.
연위가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다. 지난날의 감정을 다 해소할 수는 없겠지만, 동맹을 맺은 순간부터 서로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오.”
“이 사람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제갈문호가 답한 뒤,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을 토했다.
“아는데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걸 보면, 다른 의미로 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게 하는 사람도 많지가 않거늘.”
“그 대단한 능력으로 삼교를 겨누어야 하오. 좋게 생각합시다.”
“그래야지요.”
짧게 한숨을 내쉰 제갈문호가 포권을 취했다.
“내일 정오 파군각으로 오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그리고 연 군장, 고생 많았네.”
“살펴 가십시오.”
“그래. 아! 그 전에.”
“예?”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만약 모용군 그자와 함께한다면, 어디부터 노릴 생각이신가?”
“드러나 있는 곳부터 노려야 놈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있겠지요.”
“중천(中天)의 밝은 곳부터 노리자…… 역시 신화교로군.”
“예.”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 모용군과의 회담이 끝나면, 곧장 움직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