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밝음을 겨누다 (6)
거처에서 나온 모용군이 길목에 서 있는 연호정과 마주했다.
“…….”
묘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모용군이었다.
“전쟁터에라도 나가시는가?”
연호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댁과 관련된 일이라면, 차라리 전쟁이 낫소.”
“자네의 고평가는 언제 들어도 달달하니 좋군.”
말은 그리했지만, 모용군은 은근히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은 완전 무장을 하고 왔다.
멸사군장의 복식은 아니었다. 붉은색 질 좋은 무복 위에 꽤 두툼한 백색 장포를 걸쳤는데, 그 태가 좋은 걸 떠나서 몸에 걸친 무기들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장포 안, 상체를 좌우 대각으로 가르고 있는 흑회색 철쇄가 갑옷처럼 단단해 보였다.
어깨에는 벽산호장의 유명한 병기, 광룡부가 걸쳐져 있었고, 요대에는 제법 단단해 보이는 수부(手斧) 두 자루가 검처럼 달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강이 바깥쪽에는 잘 동여맨 각반과 함께 단도가 묶여 있었다. 필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 또 다른 병장기를 숨겨 두고 있을 것이다.
완전 무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차림이었다. 실로 전쟁에 나가는 전사(戰士)의 풍모였다.
모용군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의 기공술이 대단하다는 건 잘 알았네. 다른 곳엔 전혀 피해를 주지 않고 오직 내게만 살기(殺氣)를 쏘아 낸 그 기술, 기공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술수지.”
“칭찬 고맙소.”
“이제 설명해 보겠나? 이 야심한 시각에 예까지 찾아와서 내게 살기를 드러낸 이유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그 미소가 모용군의 심박수를 조금씩, 조금씩 올렸다.
‘뭐지?’
실력이나 살기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예전보다 또 한층 성장한 것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연호정의 재능은 잘 알고 있었다.
모용군이 긴장한 것은 연호정의 돌발 행동 때문이었다.
연호정과 날을 세우며 대립하고는 있지만, 녀석은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과격하게 나온 적이 없었다.
분명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다. 연호정의 무력이 아니라 그의 의도가 무서웠다.
“일단 자리를 옮깁시다. 내가 아는 곳에 대화하기에 알맞은 장소가 있소.”
모용군이 차갑게 웃었다.
“대화라?”
“그렇소.”
물끄러미 연호정을 노려보던 모용군이 뒷짐을 졌다.
“안내하게.”
“그리하리다.”
연호정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며, 모용군은 생각했다.
‘무슨 일이지?’
설마 딸내미가 묵룡부에 정보를 전달한 게 걸린 건가?
‘그럴 리가.’
물론 세상에 완벽은 없다. 그러나 모용군은 모용연화가 묵룡부에 정보를 보낸 과정이 발각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자신의 철저함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연호정의 반응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게 걸렸으면 오히려 연호정은 침묵했거나, 아니면 뒷공작으로 반격을 가했을 것이다.
‘묵룡부 건은 아니다. 하면?’
물론 그것 외에도 이런저런 일을 많이 벌여 놨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무림맹 밖에서 진행된 일들이었다. 그조차도 세가의 부흥을 위한 일 처리가 대부분이라, 타인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 모용군은 생각을 정리했다.
‘나나 본가가 벌인 일 때문은 아니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어가는 연호정의 등은 산사태 앞에서도 굽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그간의 휴식과 모용우와의 대화 이후, 모용군은 과거의 자신을 되찾았다.
직감과 지능을 첨예하게 세웠던 과거 그때처럼.
무서운 정치력으로 무림맹이 창설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낸 그때의 그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오늘 연호정이 찾아온 이유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을 공격하거나 매장시키기 위함도 아니라는 것을.
‘아니, 그것도 아닌가.’
조금 전 자신을 향해 쏘아 낸 연호정의 살기는 진짜였다. 그 농밀함은 진심이 아니면 우러나올 수 없는 살벌함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곧 알게 되겠지.’
이 젊은 괴물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여기는?”
“와 봤소?”
“물론일세.”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본맹 곳곳에 있는 여러 싸움터 중 하나지.”
탕마멸사 합군이 회랑단을 섬멸하러 출정하기 전, 공공대사가 연호정과 모용우 두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그곳이었다.
“대화하기에 좋은 장소라…….”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대화가 칼의 대화였던가?”
“글쎄.”
연호정 역시 차갑게 웃었다.
“그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다르겠지.”
모용군이 턱으로 연호정의 다리를 가리켰다.
“단도도 다루시는가?”
“필요하다면.”
“필요하면 다룬다…… 말 그대로 전신전력을 다할 때를 말함인가?”
“실전에 임할 때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소이다. 다만 상대가 누군지에 따라 다르겠지.”
“나를 상대할 때는 차라리 병기가 많은 게 좋다?”
“그렇소.”
쿵!
광룡부의 두꺼운 날이 땅에 박혔다.
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파가 발산되었다. 연가신단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다.
“실전 이전에, 그동안 우리가 서로의 무(武)를 견주어 본 적이 없지 않소? 장난처럼 권각 몇 수 나눠 본 걸 제외하면 말이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그것도 그렇군. 항상 말로만 죽이네, 살리네 했었더랬지.”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가볍게 손속이나 나눠 보겠소?”
“손속이라…….”
지이잉! 지이잉!
모용군의 손끝에서 시퍼런 전광(電光)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손속 좋지. 본디 무인이란 상대의 무(武)에서 진심을 읽는 법, 나 역시 바라던 바일세.”
“좋소.”
연호정이 웃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시작해 봅시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게.”
파악!
연호정의 돌진은 산뜻했다.
특유의 직선적이고 빠른 돌진이 아니었다. 충분히 빠르기는 했지만, 전력을 다한 게 아님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휘둘렀다.
부웅!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팔십 근이 넘는 중병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여전히 살벌하기만 했다.
모용군의 손이 움직였다.
쩌어어어엉!
맑은 쇳소리와 함께 연호정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 실력의 삼 할도 안 보여 주는군.”
“가볍게 하기로 했으니까.”
“그런 뜻이 아닐세. 삼 할도 안 되는 힘으로 휘두른 게 이 정도라…… 과연 강하구먼.”
“다시 가오.”
팍!
조금 전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모용군의 감각을 혼동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병기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쩌엉!
종전보다 묵직한 충돌음이 터졌다.
몇 걸음 물러나며 충격을 상쇄한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의신회를 기억하시오?”
번쩍!
모용군이 단숨에 공간을 가로질러 연호정의 측방에 도달했다.
“기억하지.”
쩌저저정!
짧은 순간 부딪친 병장기들에서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사아아아악!
얇은 나뭇가지들이 강한 돌풍에 흔들렸다.
전력을 다한 충돌은 아니었지만,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고수들의 격전이었다. 제아무리 가벼운 손속이라 한들 충격파만으로 외물에 피해를 주는 경지였다.
양손으로 광룡부의 창대를 쥔 연호정이 창대 끝으로 모용군의 옆구리를 노렸다.
후우웅!
바람처럼 회피한 모용군이 손가락을 튕겼다. 날카로운 지풍(指風)이었다.
퍼억!
절묘하게 몸을 튼 연호정을 지난 지풍이 나무 한 그루에 작은 구멍을 뚫어 냈다.
“군사님께 들었소. 당신이 의신회를 증오하는 이유를.”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그랬나.”
“그렇소.”
쩌어어어엉!
연신 교차하는 병장기들만 아니라면, 정말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배우고 익힌 무도(武道)를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펼쳐 낼 수 있을 만큼 숙련된 고수들의 비무였다. 호흡의 깊이와 끈질김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격렬하게 부딪치면서도 이런 대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나도 의신회를 싫어하오. 당신과는 다른 이유지만.”
“천하의 잡것들이지. 애초에 사람 몸뚱이 고치는 게 업인 자들이 세력을 형성해 권력을 노리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야.”
“그 생각에는 동감하오. 아니, 그 이유가 거의 전부지.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
“안 그래도 고깝게 보았을 것을, 감히 본맹까지 건드리려 하였어. 내가 만일 맹주였다면, 벌써 의신회의 뿌리를 뽑았을 것이야.”
“그랬겠지.”
파아아악!
절묘하게 광룡부를 다루며 모용군을 상대하던 연호정이 돌연 각법을 구사했다.
상단을 노린 강력한 단타각(短打脚)이었다. 모용군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퍼엉!
허공을 채찍처럼 후려친 각법에 공기가 터져 나갔다.
“당신에게 있어 무림맹은 성지(聖地). 그 성지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이의 눈에, 감히 무림맹을 건드리려 한 놈들이 곱게 보이지는 않겠지.”
“잘 아는군. 새삼스레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쩌엉! 쩌어엉! 퍼어엉!
연호정이 뒤로 훅 밀려났다. 모용군의 장력에 일격을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해는 없다. 공격을 흘리는 연호정의 실력이 대단하기도 했지만, 모용군의 장력에 실린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재차 자세를 낮추었다.
“어쩌다 그리 무림맹에 집착하게 되었소?”
“웃기는 소리. 무림맹을 얻는다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과 진배없는 일. 사내로 태어나 천하를 노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무림맹은 천하가 아니오. 천하의 일부일 뿐.”
“천하에서 가장 커다란 일부지.”
“묵룡부를 상대할 자신은 있으시고?”
스륵.
공격에 나서려던 모용군이 검을 내렸다.
투명한 눈으로 연호정을 응시하던 모용군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을 떠보려는 것이라면 그만하지. 어차피 자네는 내가 양천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 단정하고 있지 않나?”
“잘 보셨군.”
“뭐가 되었든, 그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군.”
“그렇소? 하면 혹시 이 얘기는 어떻소?”
“……?”
“관부와 황실에 침투한 미지의 조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미지의 조직 중 하나가 양천의 뒤를 봐주며 묵룡부를 세우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
“……!!”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순간 연호정의 몸에서 불꽃 같은 살기가 터져 나왔다.
퍼어어어엉!
폭음을 내며 돌진한 연호정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광룡부를 휘둘렀다.
쾅!
모용군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격을 넘어 이격, 삼격에 사격까지 치고 들어오는데, 그 연환격(連環擊)의 속도가 벼락처럼 빨랐다.
쾅! 콰르릉! 퍼어어엉!
묵직한 폭음과 함께 모용군이 재차 뒤로 물러났다.
깜짝 놀랄 만한 발언에 심력이 흐트러졌다. 그래서 연호정의 기세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질 못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연호정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 무겁고 탄력 좋은 광룡부의 창대가 눈에 띄게 휘어질 정도로 몰아친 공격이었다. 강철의 성문이라도 날려 버릴 만한 막강한 무공이었다.
푸스스스스.
붉은 살기가 화염처럼 불타올랐다.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올라오는 주작기.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청룡의 뿔과 주작의 날개, 현무의 등껍질을 달고 있는 하얀 야수의 광기였다.
오로지 공격만을 노리는 사신일체(四神一體)의 괴물.
“이런 말, 네놈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겠다. 네놈이 살아온 길, 모용군이라는 사람의 역사를 걸고 대답하기를 바란다.”
후우우우우웅.
바람이 불었다.
먼지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연호정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모용군을 노려보았다.
오른손에는 광룡부, 그리고 왼손에는 어느새 풀려나온 교룡쇄가 똬리를 틀었다.
완전한 임전 태세였다.
“삼교(三敎)에 대해 알고 있다면 순순히 불어라. 거짓 따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