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밝음을 겨누다 (2)
“후우.”
모용우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났군.”
탕마군의 훈련은 상당히 힘들다.
다른 걸 떠나서 인원수만 오백이다. 그 많은 군병을 세밀하게 지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심력이 필요했다. 각 조의 조장들이 도와준다 해도 군장이 없으면 훈련의 제어가 쉽지 않다.
물론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그렇다고 힘이 덜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익숙해졌을 뿐, 군병들의 발전도 빠르기에 그에 맞는 훈련을 매 순간 고려해야 한다.
‘이제 우리도 슬슬 진법 훈련에 들어가야 하는데.’
멸사군이 진법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멸사군에는 제갈세가의 재녀가 군사로 있다. 진법 역시 제갈세가의 것을 분해, 개량하여 멸사군의 특성에 맞게 만들었다고 했어. 세가의 진법을 세가 적통이 직접 가르치는 만큼 그 연성 속도가 빠를 것이다.’
모용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진법에 관한 이해도가 뛰어난 사람이라…… 제갈세가 측 말고 그만한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멸사군과는 다른 진법 훈련이 필요할 터인데.’
탕마군과 멸사군은 특성이 전혀 다르다.
멸사군은 수가 적고 군병들의 무공 특성이 명확하여 시가전(市街戰)이나 침투전(浸透戰)에 능하며, 첨병대로서의 역할 역시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다.
반면 탕마군은 인원만 오백이며 중갑으로 무장한 집단이다. 때문에 기동성이 필요한 전투는 다소 힘들지만, 평야에서의 대규모 전투, 전면전에 특화된 힘의 부대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진법 훈련은 멸사군보다 탕마군에 더 필요하다. 특히 조가 나뉘어 있기 때문에, 조마다 각각의 특성에 맞는 진법이 필요하며, 합쳐졌을 때 무리가 없는 대형 진법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한다.
“후우, 머리가 아프군.”
그때, 창가에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왜?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어?”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연호정의 기척은 조금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멀쩡한 문 놔두고 왜 창으로 들어오나?”
“야심한 시각이잖아. 볼 사람이야 없겠지만, 누가 보면 괜히 오해 살까 봐 무서워.”
“허허.”
모용우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창가 난간에 연호정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들어와서 앉게.”
“그러지.”
모용우의 맞은편, 푹신한 의자에 앉은 연호정이 웃으며 팔걸이를 두들겼다.
“엄청 좋은데? 예산이 많이 나오나 봐? 명품이네, 명품.”
“형님이 선물해 주셨네.”
“통도 크네.”
모용우가 웃으며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오늘 일은 다 끝났는가?”
“끝나고 말고 할 게 뭐 있겠어. 오늘은 좀 쉬었어.”
“잘했네. 그간 연제는 너무 바쁘게 살았어. 쉬지 않고 달리다간 분명 지치는 때가 올 걸세.”
피식 웃은 연호정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갑자기 머리는 왜?”
모용우가 입맛을 다셨다.
“탕마군 훈련 때문에.”
“왜? 말을 안 듣던가? 말 안 들으면 한 번씩 족치는 것도 나쁘진…….”
“그런 건 아닐세. 워낙에 잘들 해 주고 있어. 오히려 내 역량에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네.”
“겸손하군.”
“진심일세.”
“근데 탕마군 훈련은 왜? 평소처럼 하면 되잖아?”
“진법 때문에 그렇다네.”
연호정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탕마군도 슬슬 진법 훈련에 들어가는구먼?”
“그렇다네. 소문에 멸사군의 진법 훈련이 아주 성공적이라고 들었네만, 진짜 그런가?”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법 훈련에서 나는 빠졌어. 아연이와 묵비한테 일임해서 어떻게 훈련했는지는 잘 몰라.”
“연제답군.”
“다만, 한 번 붙어 보기는 했지. 진지하게.”
모용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떻던가?”
“무지막지하더군. 아닌 말로, 서로가 작정해서 붙는다는 가정하에 큰 타격도 주지 못하고 박살 날 것 같았어.”
모용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연제의 무공으로도 말인가?”
그는 연호정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게 아니었다. 연호정이 진짜 대단한 이유는, 가지고 있는 무공을 그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구사하기 때문이다.
극에 이른 실전 능력, 그리고 방심하지 않는 성격.
섣부른 말일 수도 있지만, 연호정의 전투 능력만큼은 중원 제일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과 무공의 강함은 별개지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무섭더군. 단순히 진형을 짜고 움직이는 수준이 아니었어. 서로의 진기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진세(陣勢) 자체를 증폭하는 느낌이랄까. 어지간한 공격은 그 기세만으로도 다 튕겨 내더구만.”
말이 어지간한 공격이지, 연호정 정도의 고수라면 설렁설렁 가한 공격도 치명적인 살초가 된다. 그만한 공격들을 기세만으로 튕겨 낸다면, 과연 대단한 진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굉장하네. 멸사군은 한층 더 발전했군.”
“다 사람을 잘 만난 덕이지. 군병들도 워낙 강함에 목말라 하고 있고.”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진법이 고민이라면 모용세가의 진법을 가져오면 되잖아?”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닐세. 하지만 역시 그건 안 되겠더군.”
“왜? 모용군이 허락해 주지 않을까 봐?”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환영하시겠지. 탕마군이라는 전력을 진짜 모용세가의 힘으로 둘 수 있다고 생각하실 테니.”
“음, 그건 그렇구만. 그러니까, 형님이 모용세가의 진법을 탕마군에게 가르치지 않는 건 탕마군이 모용군의 사병화(私兵化)가 되는 걸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건가?”
“그런 이유도 있고, 결정적으로 탕마군에게는 탕마군다운 진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네. 적어도 내가 아는 본가의 진법 중, 탕마군에게 어울리는 진법은 없다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딱 맞는 진법이 어디에 있겠어? 좀 꽉 끼거나 헐렁해도 조금씩 맞춰 가는 거지.”
“연제의 말이 맞네. 다만, 그래도 본가의 진법과 탕마군의 특성은 너무 달라.”
“으흠.”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아연이더러 탕마군에게 어울리는 진법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볼까?”
모용우의 눈이 커졌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부탁인데 못 할 것도 없잖아. 물론 실제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전적으로 아연이의 능력이지만.”
“음.”
“어때? 말해 볼까?”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 이쪽은 이쪽대로 알아보겠어.”
“자신감 대단한데?”
“자신감이라기보다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네. 게다가 나와 자네의 사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선 안 되잖나. 제갈 소저가 우릴 도와주면, 여러모로 잡소문이 날 가능성이 있네.”
“뭐, 그것도 그렇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가를 제외하고 진법에 조예가 있는 사람, 한번 찾아보도록 하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연제가 도와준다고 하니, 벌써부터 든든하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예전보다 훨씬 차분하군.’
무공이 강해지거나 아는 게 많아진 것만이 성장이 아니다.
환경에 맞춰 마음가짐을 다르게 하는 것. 그 역시 성장의 일면이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모용우는 또 한 발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모용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 시간에 예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는가? 물론 연제를 봐서 반갑긴 하네만.”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뭐, 굳이 말 돌릴 필요는 없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
“당상아 군병, 혹시 탕마군에서 빼 줄 수 있을까?”
모용우의 눈이 커졌다.
“당 군병을?”
“응.”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라기보다…… 음, 내 입으로 설명하기는 좀 그렇군.”
“말씀해 보시게. 탈퇴를 시키려면 최소한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당가주 알지?”
“물론일세.”
“당가주가 슬슬 딸내미를 제대로 교육해 보고 싶은 모양이야.”
“흐음.”
“두 사람 사이 안 좋았던 거, 알지?”
“아네. 그것 때문에 당상아 군병이 많이 힘들어했지.”
“중간에서 우리 아버지가 많이 노력하셨어. 덕분에 지금은 부녀지간이 제법 화기애애해졌더군.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
“그건 잘된 일이로구먼.”
“당가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지금이라도 딸내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해 주고 싶어 하는데, 탕마멸사의 유군 부대는 대장의 영향력이 강하잖아?”
“그렇지.”
“그래서 내게 부탁하더라고. 같은 부대장이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당 군병을 반강제로 입대시킨 게 나니까.”
모용우가 피식 웃었다.
“정말 황당했지.”
“형님도 거부하지 않았잖아.”
“자네가 그렇게 밀어붙이는데 내가 어찌 거부하겠나?”
“킁, 말은 좋네.”
“음.”
의자에 등을 묻은 모용우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탕마군 전체로 봤을 때, 당 군병이 탈퇴해도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세. 오히려 탈퇴를 한다면, 진법 훈련에 들어가기 전인 지금이 적기라고 볼 수 있네.”
“그건 다행이군.”
“또한, 연제 말마따나 군장의 영향력이 강한 유군 부대의 특성상 탈퇴시키는 것에 별문제도 없을 걸세. 다만…….”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당사자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연제의 부탁이라도 탈퇴시키고 싶지 않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의사니까.”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무리하게 탈퇴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어. 형님 말대로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
“이해해 주어서 고맙네.”
“아냐. 내가 괜히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서 미안하지.”
“하하, 연제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온 것도 꽤 오랜만이지 않나 싶네.”
“그런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우가 다소 섭섭한 얼굴로 말했다.
“벌써 가시는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라도 한잔해야 하지 않겠나.”
“당가주한테도 전해 줘야지. 그리고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지금도 늦었어. 더 늦으면 화살 맞지 않을까 싶구먼.”
“아쉽구먼. 하면 조만간 시간 좀 내게. 동생 얼굴 다 잊어버리겠네.”
“엄살은.”
연호정이 웃으며 창가로 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잘되고 있어?”
“음?”
“모용세가 쪽 말이야.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잘하고 있기야 하겠지만.”
모용우가 피식 웃었다.
“걱정되나?”
“걱정이라기보다는 단순한 궁금증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군.”
“아직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네. 당분간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아.”
“다행이구만.”
“아! 한데…….”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모용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걸린다기보다는…… 그래, 걸리니까 찝찝해하고 있었겠지.”
“무슨 일인데?”
“연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네.”
“흐음.”
“일전, 형님께서 연화를 제법 크게 혼내셨다네. 그 뒤로 거처에서 자숙하고 있다가 오늘 형님과 독대를 했다더군.”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묵룡부 쪽과의 대화가 무조건 나왔겠군.”
“그렇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신경이 쓰였던 것은 아니야.”
“그럼?”
“뭔가…… 머리로 이해하기 힘든데, 낌새가 이상하네. 냉정하게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게 없는데, 뭔가 꾸미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냄새가 난다?”
“그래. 냄새가 나네.”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부녀가 오늘 만났다…… 묵룡부 측 얘기가 무조건 나왔을 거다…… 음.”
그가 미소를 지었다.
서늘한 그 미소에, 아직 전부 가시지 않은 흑암제의 광기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다.
“거지 양반한테 한 번 더 신세를 져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