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33화 (333/963)

333화. 밝음을 겨누다 (1)

“차 맛이 좋구나.”

“꽤 잘 타지요?”

“놀랐다. 다도(茶道)를 멀리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모용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그곳에 있으면서 배웠어요. 다도에 심취하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해서 익혀 봤는데, 효과는 별로인 것 같아요.”

모용군이 껄껄껄 웃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거야 저 스스로 마음먹기 나름 아니겠느냐.”

“맞아요. 그래도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꽤 긴장했었거든요.”

“그럴 만도 하지.”

“네. 긴장을 풀어 주는 데는 꽤 도움이 되더라고요.”

모용연화는 묵룡부로 가면서 인생을 걸었다.

양천의 인질로서 간 게 아니란 말이었다. 그 마음가짐 하나로 모용연화는 더 성장할 수 있었고, 이윽고 양천의 인정을 받아 지금 이곳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었다.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제야 이 애비를 찾아온 걸 보니 마음을 정한 것이냐?”

모용우가 강렬한 존재감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한 이후.

모용군은 모용연화를 불러 제법 크게 혼을 냈다. 같은 배를 탄 처지라면 과거의 악연은 잊고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 해야 마땅하거늘, 모용연화는 아직도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딸을 혼낸 모용군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결국 딸이 그렇게 성장한 것엔 자신의 탓도 있었으니까. 능력이 좋다면 그런 것쯤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고 가르친 것이 자신이었다.

다만, 이제라도 변하기를 바랐다. 모용우와 함께 자신의 좌우에서 큰일을 해낼 수 있기를 바랐다.

모용군에게 혼이 난 모용연화는 마음이 설 때까지 거처에서 자숙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딸이 직접 찾아와 차를 타 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모용연화의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표정에 자만심이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모용군은 흡족했다.

“숙부님에 대한 제 마음은 아직 풀리지 않았어요. 나름대로 노력은 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마음먹는 거야 쉬운 일이다만, 마음을 푸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야.”

“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요.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배를 탄 처지에 과거의 악연 때문에 상대를 낮게 보는 것은 소인배나 할 짓이니까요.”

“음.”

“노력해 볼게요. 과거의 악연을 깨끗이 잊을 순 없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적어도 그것 때문에 숙부님을 경시하는 일은 없도록 할 거예요.”

모용연화는 아직도 부족한 게 많은 인재다.

하지만 모용군이 딸을 인정하는 것은, 적어도 자신이 입 밖에 낸 말에 나름의 책임을 질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용연화가 그만큼 솔직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모용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네가 그리 마음을 먹었다 하니, 이 애비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마음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다. 네가 한층 더 성숙해져 돌아왔거늘, 그간의 마음고생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모용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종종 꾸짖어 주세요.”

“허허허! 오냐, 내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부녀.

모용연화가 진짜로 변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한 발은 떼지 않았는가. 모용군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래, 이왕지사 왔으니 그간 하지 못했던 얘기나 나눠 보자.”

“네.”

미소로 가득하던 모용군의 얼굴이 순식간에 냉정해졌다.

“양 부주가 맹의 정보를 가져오라 하였다고?”

“네.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흐음.”

모용연화가 한숨을 쉬었다.

“상당히 무리한 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끝난 얘기인데도 정보를 요구하고 있지요. 그것은…….”

“보험이겠지.”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소가 차가웠다.

“내가 무림맹주가 될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을 약속했지만, 정작 내가 맹주가 되지 못하면 헛돈을 쓴 꼴이 되는 것 아니더냐. 양 부주 나름대로 손익 계산을 한 것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조금은 실망했어요.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떠보는 것이다.”

“네?”

“우리 측에서 정말로 맹의 정보를 제공할지, 그러지 않을지를 보려는 것이야. 설령 정보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관계는 지속될 것이다.”

모용연화의 눈이 번뜩였다.

“관계에서의 우위를 점하고자 제게 그런 명을 내린 것이로군요.”

“평등한 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면 많은 것들이 쉬워지지.”

“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글쎄다.”

모용군이 턱을 괴었다.

“양 부주나 나나, 둘 중 누구라도 선을 넘기 시작하면 공멸(共滅)할 것이다. 관계니 우위니 하는 걸 떠나, 적당한 선에서라면 엉덩이 조금 토닥거려 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모용연화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맹의 정보를 유출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렇다.”

“……!”

“물론 극비 정보를 넘길 수는 없지. 다만 적당히 크고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를 던져 줘야 할 터인데.”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이왕이면, 내게도 득이 될 수 있는 정보가 좋겠지.”

“득이 될 수 있는 정보…….”

모용연화의 눈빛이 일순 변했다.

“정적(政敵)을 제거하려 하시나요?”

아직 부족한 게 많다지만 과연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 법이다. 모용군은 모용연화의 날카로운 안목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로선 정적이 사라져서 좋고, 양 부주로선 눈엣가시 같은 백도의 고수를 제거할 수 있어서 좋을 테니,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느냐.”

“위험할 수 있어요, 아버지.”

“위험하지. 다만 우리는 언제나 살얼음 위를 걷고 있다. 분명 위험한 일이나, 그만큼 내게 큰 이득이 될 것이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물론, 그 전에 괜찮은 방패막이 정도는 만들어 두는 게 좋겠지.”

“방패막이요?”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한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미안하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나와 함께하겠단 선택은 좋았소이다. 그러나 그대는 지나치게 과격하오. 그대로 인해 우리 당원 모두가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소이다.’

모용군이 다시 눈을 떴다.

모종의 결심을 한 모용군, 그의 눈빛에 은은한 살의가 깃들었다.

‘대업을 위한 희생이라는 변명은 하지 않겠소. 날 원망하시오.’

그가 입을 열었다.

“공동파의 장문인께서 한 달 뒤에 출맹하신다고 하더구나.”

“등천교 장문인 말씀이세요?”

“그렇다.”

모용군이 모용연화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모용연화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졌다.

“아버지, 설마……?”

“적의 뼈를 취하려거든, 내 살점도 도려내야지.”

“……!!”

“등 장문인께서는 놀라운 무공의 소유자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격하여 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로는, 아군이 되어서 더욱 골치가 아픈 사람이지.”

모용연화가 침을 삼켰다.

적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전투의 미학이다.

하지만 아군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상대의 기물을 따먹는 것은 어지간하면 해선 안 되는 짓이었다. 효용성을 떠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 누가 함께하고 싶어 하겠는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모용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께서 등 장문인을 희생시키시려는 이유가 단순히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겠지요. 그간 등 장문인이 여러 사고를 쳤기 때문일 겁니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걸 변명 삼을 생각은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사람이고, 천하의 사고뭉치라도 내 품에 들어왔으면 어떻게든 지켜 주는 것이 도리니라.”

“……!”

“나는 지금 그 당연한 도리를 지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답지 않은 짓이지.”

“아버지.”

“하지만 말이다, 마음에 거리낌은 없다.”

모용군의 눈이 스산해졌다.

모용연화는 아버지의 저런 독한 눈빛을 처음 보았다. 그녀가 맹에 없는 동안, 모용군 역시 나름대로 큰 변화를 겪은 것이다.

“너는 양 부주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한 것 때문에 실망했다고 했지?”

“……네.”

“나는 그를 이해한다. 원리 원칙도 유연하지 않으면 발전을 더디게 하는 법이야.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

“진정 최고가 될 때까지, 필요하다면 내 사람이라도 제물로 던질 것이다. 협잡질을 할 것이고, 바보가 되어야 한다면 바보처럼 살 것이다.”

모용군이 모용연화를 바라보았다.

“너는 그런 애비라도 믿고 따라와 줄 것이냐?”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모용연화의 얼굴에 이내 작은 미소가 어렸다.

“제게 그런 질문을 던지신 이유는, 저 역시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럴 수도 있다. 아니, 이미 널 희생양으로 쓴 적이 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딸을 묵룡부로 보내 버린 사람이 바로 모용군이었다. 그런 그가 더 독하게 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용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그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 자체가 제게는 큰 선물이랍니다. 혈육이라도 능력이 부족하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법이지요.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저는 두 번 저지를 실수를 한 번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어요.”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딸은 확실히 모용세가의 피를 이었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하자.”

“네. 아! 그전에요.”

“음?”

모용연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 장문인을 방패막이 삼으신다면, 어떤 정적을 제거하려 하시나요?”

모용군이 미소가 희미해졌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고, 그 이름을 들은 모용연화의 얼굴에 진한 긴장이 드리워졌다.

“……쉽지는 않겠어요.”

“그걸 양 부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죽으면 좋겠지만, 설령 죽지 않아도 괜찮다. 이번 기회에 양 부주의 실력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군요.”

“등 장문인의 이동로를 파악해 올 것이다. 내일 양 부주에게 전하도록 하거라.”

“……네!”

* * *

두 사람이 제법 빠른 속도로 길을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가주님.”

“뭐냐?”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이미 따라가겠다고 했으니 굳이 이런 질문은 필요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다. 차라리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했다면 모를까, 당관 성격상 굳이 자신을 데려갈 만한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스륵.

당관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르던 연호정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싸가지.”

“연호정입니다.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상아를 탕마군으로 넣은 사람이 너라고 알고 있다. 모용우는 그저 그것을 승인했을 뿐이고.”

“그렇긴 합니다만.”

“하나만 묻겠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네놈, 모용우와 친분이 있느냐?”

뜬금없이 꽤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왔다.

물론 연호정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눈빛에 의아함만 담았을 뿐.

“그걸 어찌 물으십니까?”

“대답이나 해라, 싸가지.”

쉽게 하기 힘든 대답이었다. 모용우와 깊은 친분을 나눈 것은 아버지께도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사항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눈치는 채셨겠지만.

즉, 이 사실을 말한다는 건 자신의 모든 것을 당관에게 알려 준다는 뜻.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

“이 사실, 어디 가서 말씀하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당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역시 이 솔직한 대답이 가진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럼 빼 와라.”

“누굴요?”

“상아를 말이다.”

“……갑자기요?”

당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럴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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