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어둠이 돌아오다 (4)
“어때요?”
“네?”
묵비가 웃으며 물었다.
“의선각 의생들이요. 다루기에 불편하진 않던가요?”
기우희 역시 마주 웃어 보였다.
“네. 생각보다 훨씬 편하게 대해 주고 있어요.”
제갈문호는 의선각에서 일할 의원들을 철저하게 성품과 성실성을 중점으로 모았다.
무림맹에 당장 실력이 있는 의원들이 필요했다면 이러한 인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갈문호는 의선각의 성장은 곧 의원들의 성실성과 바름에 달렸다고 생각했고, 기우희가 그 성장의 발판이 되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그들 대다수가 연줄이 없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스스로 공부하고 경험을 쌓은 이들이었다.
당연히 중원의 의술이 최고라고 떠들어 대는 의신회처럼 쓸데없는 자만심이나 자존심도 없다. 비록 기우희가 서역 사람이지만, 실력이나 성품에서의 편견은 거의 없을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다루는 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정말 그래요. 이렇게 선한 사람들인데도 고민이 많아요. 그러고 보니, 멸사군병들이 묵 부장님을 무척 잘 따르던데요?”
묵비가 멋쩍은 듯 웃었다.
“시작이 좋았죠. 연 공자가 초장부터 잘 휘어잡기도 했고요. 제가 잘했다기보다는, 연 공자가 처음 관계를 잘 쌓은 덕분이죠.”
“그렇군요.”
기우희의 웃음이 조금은 어색해졌다.
묵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잠시 부대에 다녀올게요. 편히 쉬고 계세요.”
“아, 네!”
그렇게 묵비가 자리를 비웠다.
홀로 남은 기우희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연 공자.’
그녀에게 있어 연호정이란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사적 친분도 없고, 의원과 환자 사이로 만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연호정은 기우희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어 보았고,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그렇다. 그것은 강요였다. 그러나 아주 시기적절한 순간에 들어온 강요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기우희는 연호정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지만, 좋게 말하면 대의(大義)를 좇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연호정이라는 사람은, 기우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존재였다.
기우희는 나직이 탄식을 토해 냈다.
‘대체 그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그녀는 며칠 전, 영안(靈眼)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능력으로 연호정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활화산 같은 분노, 어두컴컴한 심해를 연상케 하는 슬픔, 퇴색되지 못한 걱정 등등.
그것은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나열이었다. 도무지 합쳐질 수 없는 감정들이 한 인간의 가슴속에서 꾹꾹 뭉쳐져서, 터지기 직전의 폭약이 되어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지금껏 여러 사람의 감정을 보았지만, 그렇게 풍부한 감정들을 본 적은 없었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극한을 경험해 본 사람이야.’
영안은 사람의 감정을 느끼거나 참과 거짓을 구분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읽을 수는 없다. 기우희가 연호정의 정체를, 그의 과거를 모르는 이유였다.
기우희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쿵. 쿵.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기우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누구의 인기척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연호정이 들어섰다.
기우희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헉!”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연 군장님. 많이 다치셨나요?”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한눈에 내상 여부를 알아챈다. 과연 대단한 실력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다. 며칠이면 알아서 나을 거야.”
“그래도 그건 아니죠. 일단 여기 앉으세요. 정확한 진단을 위해 맥부터…….”
“치료받으려고 온 거 아냐.”
“그래도 앉으세요!”
그녀답지 않게 강경한 목소리였다.
물끄러미 기우희를 보던 연호정이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잠시 맥을 짚을게요.”
서역의 의술에는 맥을 짚는 것이 없다. 중원과 서역의 의술 모두 편식 없이 배운 걸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기우희가 연호정의 맥문을 잡았다.
‘……!’
맥을 짚자마자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연호정의 힘찬 혈행이었다.
혈관을 도는 피의 흐름이 몹시 힘차면서도 유장하다. 지금껏 이렇게 힘찬 맥동은 본 적이 없었다.
‘과연 대단하구나.’
기(氣)도 기지만, 육체가 지극히 건강한 상태였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육체를 타고났거나, 그게 아니라면 타고난 육체마저도 탈바꿈시킬 정도의 수련과 가공할 진기 덕분일 것이다.
뭐가 되었든 비범하기 그지없는 육체였다. 기우희는 놀라움을 수습하고 진맥에 집중했다.
잠시 후.
“연 군장님 말씀대로네요. 꽤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며칠 만에 많이 호전되었어요. 이대로 두어도 자연 치유가 가능할 거예요.”
“그렇다니까.”
“그래도 몸을 돌봐 주는 의원이 있는데, 굳이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요.”
기우희가 품에서 침통을 꺼냈다.
“기의 흐름을 조금 더 원활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회복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
“연 군장님.”
“치료받으러 온 게 아니라 했어. 침통 집어넣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치료를 강권하는 것도 애매하다.
결국 기우희는 침통을 다시 품에 넣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애들은 어때?”
“네?”
“의선각 애들 말이야. 휘하에 많은 사람을 두는 게 처음이지 않나?”
기우희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이에요. 그래도 다들 선해서 괜찮아요.”
“실력이 평균 이하라고 들었어.”
“솔직히 좋은 수준은 아니에요. 그래서 교본 작업이 한창이에요.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도록이요.”
“그래.”
아마 이것을 물어보려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의 인사치레였다.
그리고 기우희의 판단은 정확했다.
“며칠 전, 신화교의 십이무장을 잡았다.”
“……!!”
“알지? 십팔무장이 어떤 놈들인지.”
기우희가 침을 삼켰다.
‘그때구나.’
그녀가 영안으로 연호정의 감정을 느꼈던 그날 새벽에 터진 일이었으리라.
“놈이 죽기 전에 몇 가지 정보를 토해 냈다. 내가 모르는 부분도 제법 있더군.”
기우희가 다시 한번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자의 말이 진실이라고 믿나요?”
“그렇다.”
“어째서죠? 십팔무장은 단순히 무공만 강하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교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없다면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무장의 직책을 얻을 수 없어요.”
“그래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연호정의 눈빛이 칙칙해졌다.
“그놈보다 더한 독종도 버티지 못했던 고문이었어. 그게 거짓일 확률은 극히 낮아.”
“……!!”
기우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연호정의 감정을 한 번 느껴 봤기 때문일까? 비록 눈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가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한 고문을 가했을지 상상이 됐다.
“중요한 건 이거야. 나는 사음교(邪淫敎)에 대해서는 제법 빠삭한 인간이다. 하지만 신화교나 광혈교에 대해서는 그만한 지식이 없어.”
연호정이 상체를 숙이고 깍지를 꼈다.
그 느릿한 동작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한층 더 어둡고, 한층 더 묵직한 분위기가 기우희의 목을 조여 왔다.
“원래는 너한테 이 이상 묻지 않으려 했다. 전에 들어 보니 너도 아는 게 많지 않은 듯했고, 들을 만한 것도 다 들었으며, 설령 숨기는 게 있어도 네 입으로 직접 말할 때를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
“네가 내게 말해 주지 않은 게 하나 있지?”
“네?”
“신화교주의 핏줄.”
“……!”
“너를 제외하고, 네 형제자매에 관한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나아가 신화교주가 어떤 사람이며, 왜 네가 핏줄 때문에 고역을 앓고 있는지도 자세히는 듣지 못했어.”
“……중요한 사항인가요?”
“그래.”
“어떤 부분에서 중요한 사항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전에 잠영일호라는 놈을 잡았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그리고 이번에 십이무장을 잡았을 때 확신했어. 신화교는 황궁과 관부를 장악하려 한다.”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단조로운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더군. 힘을 잃어버린 제국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핏줄, 정통성이다. 제아무리 타락했다 한들, 서역 사람에게 장악당할 정도로 만만하진 않아.”
“그만큼…… 권력자들이 썩었을 수도 있죠.”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제국의 권력자들이 그 정도로 썩었다면, 제국은 진작 멸망했어야 해. 선을 넘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
“간신배로 살아도 넘지 못하는 선. 백도도, 흑도도 각자의 선이 있어. 그렇다면 나라를 운영하는 위정자들의 선은 무엇일까?”
“……정통성이로군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 하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네 말마따나 정통성이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뇌물을 받아 처먹든, 무력으로 억압을 당하든 최소한의 정당성이 있어야 해. 그리고 제국 정치의 가장 큰 정당성은 바로 핏줄, 정통성이다.”
“…….”
“말해 봐. 신화교주는 중원의 제국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지?”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기우희가 답답한 한숨을 쉬었다.
“연 군장님은 정말 날카로우세요.”
“…….”
“맞아요. 저는 신화교에 대한 모든 정보를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말씀드릴 생각도 못 하고 있었지요. 저도 애써 잊고 있었던 거니까요.”
연호정이 서늘하게 웃었다.
“잊고 있던 기억, 다시 떠올려 봐. 그리고 그걸 내게 말해 줘.”
* * *
“뭐?!”
동각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십이무장께서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다고?”
“그, 그렇습니다.”
노인이 침을 삼켰다.
“십이무장님의 실력이면 이미 허창을 넘어 개봉에 도착하셨어야 정상입니다. 한데 여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계시답니다.”
동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일로……?!”
규적은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실력을 떠나서,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한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증발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마, 누군가에게 당하기라도 하신 것인가?!”
노인은 저도 모르게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할 뻔한 걸 참았다.
‘모르는 일이다.’
이곳은 무림맹에서 가깝다. 그리고 무림맹은 백도 무림인들의 성지와도 같다. 그만큼 많은 고수가 드나드는 곳이란 말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십이무장씩이나 되는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을 만한 고수가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또 모르는 일이다.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복귀하면서 보았는데,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불이 난 흔적이 있었습니다. 간략하게나마 조사해 본 결과 벼락 때문이라는 둥, 이름 모를 여행자가 피운 모닥불로 인한 화재라는 둥 말이 많기는 했었습니다만.”
동각의 눈이 서늘해졌다.
“불?”
신화교는 불을 숭배한다.
당연히 신화교도들 역시 열양공을 익혔다. 그중 십팔무장이라면 최고급의 열양공을 익힌다.
마음만 먹으면 산불을 일으키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십이무장께서 왜 산불을 일으켰냐는 것인데.
“혹, 싸움의 흔적은?”
“거기까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장 가서 알아보게. 만에 하나 누군가 싸운 흔적이 발견된다면…….”
동각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차라리 싸운 흔적이 있기를 바랐다.
규적이 아무런 말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면, 윗선에서는 마지막 목격자인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때는 윗선에 보고토록 한다. 상위 무장을 소환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