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어둠이 돌아오다 (3)
후우우웅.
늦겨울의 바람이 제법 잠잠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털옷을 껴입어도 추운 날씨. 그런 날씨 속에서 당상아는 가벼운 무복 차림으로 연무장에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스읍. 후우.
평소의 길고 잠잠한 호흡과는 달리 그녀의 호흡은 무척이나 짧고 깊었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찌익.
벽에 고정된 작은 종이가 차디찬 바람에 펄럭이다가 찢어져 날아갔다.
순간 당상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피이이이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철전(鐵錢) 두 개가 좌우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퍼벅! 채앵!
날아가던 종이의 한 가운데가 뻥 뚫렸다. 철전 두 개가 시간차를 두고 같은 곳을 뚫어 낸 것이다. 종이를 뚫은 철전은 벽에 박히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펄럭!
뚫린 종이가 더더욱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당상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힘 조절이 안 되네.”
그녀의 암기술은 무척 섬세했다. 제대로 단련된 안법(眼法)과 유연한 손목, 거미줄처럼 퍼트리는 무형의 기망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바로 내공 출력의 조절이었다.
‘아직도 안 되다니.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그간 무림맹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당상아는 홀로 떨어져 수련에 매진했다. 물론 탕마군 소속이기에 합동 훈련에서 빠진 적은 없지만, 그때를 제외하곤 밥 먹는 시간도 잊고 수련에 힘썼다.
그 덕분일까? 그녀의 무공은 몇 달 전과 또 다른 경지에 진입해 있었다.
그러나 무공 역시 다른 무수히 많은 공부와 마찬가지로, 더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부족한 점이 보이게 마련이었다.
당상아가 점점 수련에 미쳐 가는 이유였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면서 더 분명한 단점을 느끼니, 그것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나풀나풀 날아가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가능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종이의 중앙을 뚫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중앙을 누르고 날아간 철전을 벽에 박아 종이를 고정하려는 의도였다.
무슨 차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당상아에겐 결정적인 순간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느냐, 정체하느냐의 차이였다. 이유인즉, 이것 자체가 극도로 섬세한 내공 조절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 섬세한 내공 조절이 가능해야 더 높은 곳에 이르렀을 때, 보다 다양한 무리(武理)를 구현할 수 있다. 즉, 강해진다는 말이었다.
당상아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노력이든 재능이든, 부족하다면 부족한 대로 인정해야 해. 안 되면 될 때까지 해야지.”
실망감을 시원하게 털어 버린다. 다른 사람이 성장한 것처럼, 그녀 역시 많이 성장한 듯싶었다.
그리고 그 성장의 원동력은, 바로 ‘관계’의 정립에 있었다.
피이이이이잉! 칭!
당상아의 눈이 커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철전 하나가 호선을 그리며 종이를 채 가더니, 벽에 턱! 하고 꽂혔다.
그녀가 원했던 이상적인 내공 조절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 무림맹에서, 저런 고급스러운 암기술이 가능한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내공의 문제가 아니군.”
당상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당관이 뒷짐을 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당관이 특유의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야를 넓혀라.”
“네?”
비록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많이 좋아졌다. 당상아가 흔들리지 않고 수련에 힘쓸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그간 쌓인 갈등이 너무 깊었다. 당상아가 아버지께 쉬이 가르침을 청하지 못한 이유였다.
“내공이란 의념(意念)의 산물이다. 해서 내공을 움직이는 주체 역시 이것이다.”
당관이 손가락을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의지, 의념, 집중.
당상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더 집중하지 못했다는…….”
“네 집중력은 충분하다. 그러나 한 가지를 간과했어.”
“네?”
“의념으로 내공을 다루는 것이라면, 내공을 쌓은 것 역시 의념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의념은 무엇과 이어져 있는가?”
“……?”
“이것이다.”
당관이 엄지로 자신의 명치를 쿡쿡 눌렀다.
당상아의 눈이 빛났다.
머리, 다음은 가슴.
“상단전(上丹田), 그리고 중단전(中丹田)인가요?”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어. 중요한 것은 너의 마음가짐에 따라 내공의 성질도 미세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성질이 바뀌다니요? 내공의 발전은 있었지만, 그 성질은 예전과 같은데…….”
당관은 아무 말 없이 당상아를 바라보았다.
딱히 노려보는 건 아니고, 지긋이 바라보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당상아는 괜스레 무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만요.”
당상아가 눈을 감고 내공에 정신을 집중했다.
‘똑같은데?’
조부님께 직접 배운 도반삼양귀원공(導反三陽歸元功)의 내력이었다. 조부님께서 극미량의 내공으로 격체전력(隔體傳力)을 해 주신 덕에 그간 쌓아 둔 내공의 질이 무서운 속도로 상승했지만, 그렇다고 이 내공이 조부님의 내공은 아니잖은가?
당상아는 다시 눈을 뜨고 아버지께 질문을 던지려다가 참았다.
‘괜히 저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야. 내가 못 본 것일 뿐.’
그녀는 아버지의 실력을 믿었다. 비록 꼬일 대로 꼬인 관계였지만, 아버지의 실력은 진짜였다. 아마 육대세가 수장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내공을 조금 더 깊게,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응?’
당상아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이제 알겠느냐?”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까지 넌 아버지가 건넨 내력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갔을 뿐이다. 네 재능과 노력, 그리고 아버지의 격체전력으로 누구보다 빨리 강해질 수 있었지만, 그것을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진 못했었지.”
그렇다.
당상아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가 연성한 내공은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조부님, 성천십삼좌의 일인 암왕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부님께서 격체전력을 해 주신 것은 내공량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공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였다. 말 그대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당연히 조부님의 내공을 닮아 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내공은, 암왕의 그것과 미세하게 달랐다.
“너의 내공은 여전히 아버지의 내공과 닮았다. 하지만 그 근본이 바뀌고 있어. 내 눈에는 그것이 보인다.”
“……!!”
“그것이 바로 진짜 너의 내공이다.”
당상아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왜……?!”
왜 이제야 내공의 성질이 바뀐 것인가? 라는 의문은 둘째였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연성한 내공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착각한 바보 같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이걸 착각할 수 있단 말인가?
“수동적으로 살아서 그렇다.”
“……수동적으로요?”
“내공이란 곧 마음이다. 시전자의 마음, 의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아(自我)의 힘도 커진다.”
“…….”
“네 단전의 기(氣)가 이제야 너의 것이 되었다는 건, 그간 아버지에게 의존했던 너의 미숙함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당관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제 너의 내공을, 너만의 방식으로 조절해라. 아버지는 네 나이 때도 극강(極强)의 내공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너와는 달라.”
당상아의 눈이 빛났다.
당관이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던졌다.
픽! 후우우웅.
비수처럼 날아간 손수건이 어느새 벽 근처에서 힘을 잃고 살랑살랑 떨어져 내렸다.
그때, 당상아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치잉!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철전이 손수건을 끌어당기고 벽에 박혔다.
당상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비록 종이보다 무거운 손수건이지만, 그래도 성공한 것이다.
“아버……!”
고개를 돌려 당관을 부르려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아버지가 뒷짐을 지곤 저 멀리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당관이 걸음을 멈추었다. 물론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서둘러 그에게 다가온 당상아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네가 예뻐서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네?”
당관이 당상아를 바라보았다.
“그따위 꼬락서니로 어디 가서 당가의 재인(才人)이라 말하지 마라. 부족해도 한참 부족해.”
“아, 네.”
“가문의 이름값은 결코 가볍지 않아. 그 이름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거든, 적어도 그것보다는 나아져야 할 것이다.”
당상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제 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았다. 아마도 자신에게 조언을 해 준 것이 부끄러우신 것이리라.
“네. 더 정진할게요.”
당관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당상아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시게요?”
“…….”
“식사 안 하셨으면, 저랑 같이 먹어요.”
“안 돼.”
“아! 바쁘신가 보군요.”
당상아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었다.
당관이 더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먼저 찾아올 놈이 아니다. 도끼까지 들고 왔으니 작정을 한 모양이군.”
“네?”
당상아가 의아한 얼굴로 당관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연 군장님?”
그렇다. 그곳에서 연호정이 걸어오고 있었다.
멸사군장의 정복을 입고, 어깨에는 광룡부까지 걸쳤다. 철 부딪치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리는 걸 보니, 의복 안에 교룡쇄도 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완전 무장이었다. 근래 연호정이 저런 식으로 무장을 갖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당관은 당상아가 보지 못한 것도 보았다.
“다르군.”
“네?”
당관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애송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가? 눈빛이 달라졌는데.”
당상아가 다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흑백이 또렷한 눈빛은 여전했다. 그녀는 연호정의 눈빛이 뭐가 달라진 건지 알아보지 못했다.
잠시 후, 연호정이 당씨 부녀 앞에서 멈추었다.
“가주님.”
당관이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그 흉한 도끼까지 들고서.”
“따로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오죽하시겠나.”
“한데…….”
연호정이 당상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오? 뭔가 달라졌는데?”
“네, 네?”
“기도가 미세하게 달라졌어. 내공량이 늘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따로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이지?”
당상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아버지야 당가의 내공에 익숙하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설마 연호정이 자신의 변화를 한 눈에 꿰뚫어 볼 줄은 몰랐다.
“뭐가 됐든 축하한다. 예전보다 훨씬 잘 맞는 옷을 입은 것 같군.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가 돼.”
“가, 감사합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해서, 무슨 일이냐?”
“부탁을 드리기 전에, 이것부터 봐 주십시오.”
우우웅.
연호정이 광룡부의 창대를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팔십 근이 넘는 대부를 마치 손도끼처럼 가볍게 내민다. 여전히 대단한 완력이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당관이 광룡부로 시선을 내렸다.
“흠.”
광룡부의 도끼날을 매만져 본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하군. 어느 장인이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명장(名匠) 소리 듣기에 별 부족함은 없겠어.”
당관의 입에서 나온 평가였다. 그야말로 극찬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한데 이건 왜 보여 주는 거냐?”
연호정이 도끼를 내렸다.
“도끼 몇 자루만 더 만들어 주십시오.”
“뭐라?”
“광룡부보다는 못해도 되지만, 최대한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네놈의 건방짐이 하늘을 찌른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감히 당가의 가주에게 그따위 부탁을 하는 것도 잠시 무시토록 하지.”
“…….”
“무슨 일이냐?”
연호정의 눈이 스산해졌다.
당관은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 볼 일이 좀 생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