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어둠이 돌아오다 (2)
흔적을 지워 내는 개방도들의 실력은 놀라웠다.
규적의 청로순화공은 신화교의 절학으로서, 중원의 어떤 열양공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 그러나 청로의 불꽃도 불은 불이다. 벼락 때문이든 모닥불 때문이든, 언제고 산불은 날 수 있는 법이었다.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모인 수백 명의 개방도들은 순식간에 산불을 잡고 그곳에서 벌어졌던 전투 흔적을 몽땅 지웠다.
이 드넓은 중원 대륙에서 한발 빠른 정보를 얻기 위해선 빠른 신법과 추적술이 필수인 법. 말하자면 흔적을 쫓는 것만큼이나 지우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연호정과 규적의 생사결이 벌어졌던 장소는 순수하게 산불이 난 것처럼 꾸며졌다.
빠르고 신속하며 정교한 작업이었다.
* * *
새벽 동이 트기 전.
제갈문호가 비밀리 파군각으로 입성했다.
“오셨소?”
“어떻게 되었습니까? 연 군장은요?”
“곧 올 것이오. 아직 씻고 있소이다.”
“허어! 다치진 않았답니까?”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치긴 했소만 당장 의원에게 가야 할 정도는 아니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연위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연호정이 씻으러 가기 전 말해 준 사항들이었다.
제갈문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위지휘사사의 진무라고?!”
진무는 종오품 관직으로 그리 대단한 직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도 좋을 만큼 낮은 자리 또한 아니었다.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애초에 새외의 인물이 관부의 관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황실이 힘을 잃고 관부가 부정부패에 찌들었다고는 하지만, 중원인이 아닌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다니?
‘관부에 줄을 댄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장악했다고 봐야 하는 건가?’
제갈문호의 눈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연 군장이 긴장할 정도의 고수라 하였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 군장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야. 그만한 고수가 고작 진무의 신분이란 말이지?’
연호정은 강하다.
그가 이룩한 경지도 대단했지만, 그의 무시무시한 전투술을 제갈문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엇비슷한 경지라면, 운이 안 따라 주는 경우를 제외하곤 연호정이 질 리가 없다. 오히려 그 기가 막힌 전투 능력으로 옷깃 하나 스치지 않고 상대를 압도할 사람이 연호정이다.
즉, 연호정과 싸운 상대는 단순한 경지로 보면 연호정보다도 높은 위치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연호정, 그리고 모용우보다도 한 차원 높은 경지.
달리 말하자면 육대세가의 가주급에 육박하는 경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면 적은……?”
“죽었소.”
“아쉽구려.”
생포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제갈문호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연위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얘기는 큰애에게 더 들어 봐야 알겠지만, 큰애 역시 어지간하면 생포하려 했을 것이오.”
“그 말씀은, 생포해 봤자 의미가 없었을 거란 뜻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생포하려 들다간 오히려 본인이 당할 정도의 고수라서 부득이하게 죽였을 수도 있소이다.”
“그도 그렇군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제갈문호는 문득 연위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어째,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
“제가 모르는 다른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들이 생사의 싸움에서 무사히 돌아왔으니 기쁨과 걱정이 교차할 만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연위를 봐 온 제갈문호는 알 수 있었다. 이 사태 외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저 다른 생각을 좀 했소이다.”
“그렇습니까.”
“슬슬 큰애가 오는 모양이오. 자세한 얘기는 호정에게 들읍시다.”
“그럽시다.”
잠시 후, 연호정이 문을 두들겼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생각보다 훨씬 안정적인 목소리였다.
“들어오거라.”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호정의 신색은 몹시 깔끔했다.
하지만 제갈문호는 연호정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범부는 느낄 수 없는, 무림인들만이 알 수 있는 혈향이었다.
제갈문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호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그리 말하면 내가 뭐가 되나? 나는 만날 앉아서 문서에 침만 발라 대는 서생 나부랭이 아닌가?”
제갈문호의 가벼운 농담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공허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연위가 의자를 뒤로 끌었다.
“앉거라.”
“예.”
그렇게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자네도 피곤할 터이니, 대화는 짧고 굵게 끝내는 게 좋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그에게서 뭔가 알아낸 것이 있는가?”
연호정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신화교 측의 고수입니다.”
“그건 알고 있네.”
“신화교에는 십팔무장(十八武將)이라는 고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신화교의 행동 대장급 고수들이라 합니다.”
“행동 대장이라…… 자, 잠깐! 십팔무장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하면 그만한 고수가 열여덟이라는 뜻인가?”
“예.”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오늘 제가 잡은 무장은 십팔무장 중 열두 번째에 해당하는 자였습니다. 그 무공은 육대세가의 가주에 비해도 크게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싸움이란 실제로 붙어 보지 않으면 그 결과를 모르는 법이다. 발 한 번 잘못 디딘 걸로 몇 수 아래의 무사에게도 단칼에 목숨을 빼앗길 수 있는 게 이 바닥이었다.
물론 고수일수록, 경험이 많을수록 그런 실수나 변수가 줄어든다. 언제든 변수가 생길 수 있지만, 어지간해선 이룩한 경지와 무공의 특성으로 결판이 나는 게 고수 간의 격전이란 말이다.
즉, 신화교 측에는 육대세가 가주급에 필적할 만한 고수가 열여덟이나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실수도, 변수도 쉬이 용납하지 않는 진짜 고수들이 무려 열여덟.
제갈문호와 연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물론 무장마다 무공의 격차는 존재합니다. 특히 십일무장부터 십팔무장까지, 십 위권 이후의 무장들은 실력 차이가 제법 나는 편이라 합니다.”
“하면 십 위권 안의 고수들은?”
“그들끼리의 격차는 크지 않다고 합니다. 해서 십호무장(十號武將)부터 일호무장(一號武將)까지는 서열의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전시 상황에선 상위 번호의 무장이 하위 번호의 무장에게 명을 내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으음.”
“물론 그렇다고 놈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놈이 말하기를, 일호부터 십호까지는 육대세가 가주급 이상, 그중에는 소림과 무당파 장문인급의 고수도 존재한다 하였습니다.”
“……!”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전반적인 무공 수위는 차이가 없지만 그중 유독 강한 고수 한두 명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수장들 모두가 초절정고수로, 한 지역에서 수위를 다툴 만한 무력의 소유자들이다. 물론 전대를 제외한 현역에 한해서.
말하자면 홀로 전황을 뒤바꿀 수 있는 고수란 뜻이다. 한데 그런 고수가 신화교에만 무려 열여덟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십팔무장이 선봉장 격이라면 그 위로 원로원 등의 전대 고수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무공 수위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십팔무장보다는 확실히 더 강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수장 이상의 무공.
“그 말은.”
연위의 표정이 극도로 심각해졌다.
“신화교 측에, 성천십삼좌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도 많다는 뜻이냐?”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신화교주를 포함, 적어도 두셋은 존재할 거라 예상하지만 아직 그들에 대해 확신할 만한 정보가 없습니다.”
“…….”
“아버지께서도 아시겠지만, 소위 초절정의 영역도 지극히 광활합니다. 저 공공대사님만 해도 이 영역의 극의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중요한 것은, 신화교 하나만 해도 그 고수진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다른 두 집단까지 합세한다면…….”
연위가 툭 던지듯 말했다.
“잡아먹히겠구나.”
중원은 넓다.
대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고수들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며, 전대는 물론 아직도 살아 있는 전전대까지 아우르면 삼교와 싸우기에 큰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단순히 백도와 흑도만 해도 원수처럼 대립하는 사이다.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에, 중원 전역을 하나로 묶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황실.”
“그렇습니다. 다른 단체는 모르겠지만, 신화교는 황실과 관부를 장악하려는 모양입니다. 만일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이 저들 손에 떨어지게 되면, 그때는 제대로 된 싸움을 시작조차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연호정이 제갈문호에게 물었다.
“제갈세가는 대대로 유림(儒林)의 석학들과 친분을 나누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중엔 관부에 연이 닿은 사람도 많다지요?”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있네. 하지만 작정하고 선을 대려면, 얼마나 움직여 줄지는 모르겠네.”
“제가 생각기로, 지금은 신화교에 허위 정보를 보내는 것보다는 놈들이 황실과 관부에 얼마나 깊게 침투해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장악하려 드는지 알아보는 게 먼저일 듯합니다.”
“내 생각도 같네. 그래서 말일세.”
잠시 망설이던 제갈문호가 결심한 듯 말했다.
“광신삼교의 존재를 슬슬 알려야겠네.”
연호정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군사님.”
“물론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은 아닐세. 의심이 가지 않는 자, 결코 변절하지 않을 만한 자들부터 한 명씩 전달할 생각일세.”
“……위험할 겁니다.”
“위험하지. 그러나 손 놓고 있는 것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일 걸세.”
제갈문호의 얼굴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건 나에게 맡기게나. 혹시 몰라 봉공들에 대해 지금껏 조사를 해 왔네. 나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셋 있네.”
아무도 모르게 뒷조사를 했단다.
연호정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자칫 역풍을 맞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무림맹 군사의 힘으로 봉공들의 뒤를 캤다. 이걸로 꼬투리를 잡힌다면 제갈문호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흔들릴 것이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았나. 그리고, 내 입지가 흔들리면 자네가 도와주게. 그러면 되지 않나.”
“…….”
“어찌 되었든, 알아낸 것은 그것이 전부인가?”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알겠네.”
제갈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게, 연 군장.”
“예, 군사님.”
“자네에게는 항상 미안하네. 음지에서 그리 고생을 하는데도 보상은커녕 자네에게 더 의지하고만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따름이야.”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래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일세.”
“……?”
“자책하지 말고 시원하게 나아가게.”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흔들릴 때, 자네와 가주께서 나를 잡아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네. 그러니 자네 역시 주변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활개 쳐 보게나. 누군가 자네를 손가락질하면, 그때는 내가 자네를 지켜 줄 걸세.”
“…….”
“오늘 고생이 많았네. 이만 푹 쉬시게나.”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제갈문호가 방을 나섰다.
가만히 있던 연위가 피식 웃었다.
“사람 참.”
연호정은 제 할 일을 했다. 그러니 괜히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제갈문호의 마지막 말은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자신의 진심임과 동시에, 연위에게 넌지시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호정아.”
“예.”
“고생했다. 오늘은 푹 쉬거라.”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예.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좀 쉬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