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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26화 (326/963)

326화. 어둠이 돌아오다 (1)

움찔!

묵비가 의아한 눈으로 기우희를 바라보았다.

기우희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차를 다 마시고 침소에 들려고 일어나던 참이었는데,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묵비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의원님?”

“…….”

“의원님!”

“……네.”

“왜 그러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아뇨.”

기우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랍니다.”

“한데 왜……?”

“갑자기 기분이 좀 안 좋아져서요. 그냥 기분 탓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괜찮은 것 맞죠?”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묵비는 그녀의 미소가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말 괜찮아요. 설령 아프다 해도 의원이 자기 몸 하나 못 고치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묵 부장님도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도 절 호위해 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뭘요. 오히려 제 얘기 상대가 되어 주시느라 의원님께서 곤혹이셨죠.”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호호, 그럼 푹 쉬세요. 바로 옆방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곧장 연락하는 거, 잊지 않으셨죠?”

“물론이에요.”

“그럼 갈게요. 푹 쉬세요.”

그렇게 묵비가 방에서 나갔다.

털썩.

기우희가 그대로 침상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다. 아름답게 빛나던 청안(靑眼)에는 슬픔과 두려움, 알 수 없는 동정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연 군장님.”

영안(靈眼)이란 곧 평범한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준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 굳이 표현하자면 이능(異能)이다. 타고났지만 의술로도, 무공으로도 해석할 수 없기에 그저 신이(神異)하다는 진부한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그녀의 영안은 특별했다.

어릴 적부터 가면을 뒤집어쓴 온갖 사람들에게 시달려 온 그녀는 타인의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영안은 그녀에게 상대의 말이 참이면 참, 거짓이면 거짓이라고 알려 주었다.

물론 항시 알려 주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순간순간 신내림을 받는 것처럼, 자체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이 능력은 기우희가 바라는 진실과 상대의 감정을 알려 주곤 했다.

그리고 근래 들어 기우희가 가장 속내를 알고 싶었던 대상은 바로 연호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영안은 연호정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니, 연호정만이 아니라 연위에게도 통하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무공, 거기에 상단전에 절대적인 방어막을 둘러칠 만큼 영력이 발달한 사람은 들여다볼 수가 없다. 그녀의 타고난 이능은 대단했지만, 절대 만능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보고,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멀리 떨어진 사람의 감정을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녀는 최초의 놀라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주르륵.

기우희의 양 볼 위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왜 우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녀가 직접 들여다본, 그녀의 영안이 포착한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 * *

“헉! 이, 이게 뭐야?!”

가득상이 입을 쩍 벌렸다.

사방천지가 불바다다. 다행히 마을까지 침범할 정도로 큰불은 아니었지만,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범위가 두 배는 더 넓어질 것 같았다.

“제기랄! 빨리 움직여! 은신이고 나발이고 눈치 보지 말고 얼른!”

“예!”

번개 같은 연락망에 모여든 개방도 이백여 명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흙과 물을 나르기 위해서였다.

무림맹에서 백 리가 훌쩍 넘게 떨어진 거리지만, 중원 대륙 전체의 크기를 생각하면 상당히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있다. 연락 한 번에 개방도들이 이리 많이 모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퍼어엉! 퍼어어어엉!

연위는 단숨에 불이 난 곳의 중앙으로 내려서 사방으로 장력을 갈겼다.

검극사기의 절대적인 내공력이 강렬한 열기로부터 그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고 있었다. 불보다 무서운 게 연기라지만, 내가고수의 호흡은 범부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깊고 길다.

연위는 숨도 쉬지 않고 막강한 장력을 이용, 무서운 속도로 불을 진압했다.

“역시 대단하시군.”

가득상은 연위의 고요한 신위에 혀를 내둘렀다.

단순히 무공이 강하다고 가능한 행위가 아니었다. 화재가 발생한 곳의 취약점을 단숨에 간파할 수 있는 눈과 불꽃의 흐름을 읽어 내는 능력 없이는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가 없다.

“제길, 화기가 너무 심해서 기감을 느끼기가 힘들군. 연 공자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파바바박!

주변에서 가장 크고 멀쩡한 나무 꼭대기로 올라선 가득상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불바다가 된 팔부 능선 쪽에서 기이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왜 저기만?’

다른 곳은 다 불이 붙었는데, 저곳만 동그랗게 파여 있었다. 이 거리에서 저 정도 크기면, 실제로는 반경 이십여 장 정도가 화마(火魔)의 공세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었다.

가득상이 외쳤다.

“연 가주님! 북동쪽입니다!”

“알고 있네.”

한참이나 떨어졌는데도 연위의 담담한 목소리가 가득상의 귀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굉장한 내공력이었다.

“호정의 내공을 느꼈네. 생각보다 훨씬 멀쩡해.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불부터 잡는 것이 먼저일세.”

“우리 방도들이 더 오고 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어요!”

“아네. 그저 빠른 진압을 위해 중심이 된 곳의 불길만 먼저 잡을 생각이야. 곧 끝나니 걱정하지 말게.”

“아, 예!”

연위의 말은 정확했다.

그가 화마의 중심을 잡자, 화기의 흐름이 뚝 끊어졌다. 인위적으로 만든 불이라도 불은 불이지만, 중간에서 기맥(氣脈)을 끊어 버리니 맹렬하게 타오르던 화마가 크게 주춤했다.

파아악!

할 일을 끝낸 연위가 단숨에 연호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괜찮은 것이냐, 이놈.’

제아무리 연위라도 이 정도 거리에서 연호정의 내공을 찾아내긴 힘들다. 내력의 근원이 같아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우우우웅!

단숨에 거리를 좁힌 연위는, 순간 호흡이 답답할 정도의 습기를 느꼈다.

불이 제법 거세게 났는데도 여기만 습도가 진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이 호정이 말한 수기(水氣)의 원천, 현무기인가?’

파아앙!

습기의 근원지로 내려선 연위의 눈에 비로소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화르륵! 화르르륵!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위협적인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하늘은 어둡지만,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 때문에 주위는 밝았다. 그러나 연위가 바라보고 있는 곳만큼은 화광(火光)도, 달빛도 다가서지 못할 정도로 어두워 보였다.

그곳에 연호정이 있었다.

피범벅이 된 몸, 손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끼를 들었다.

격한 전투로 산발이 된 머리카락은 잔뜩 젖어 목덜미와 어깨에 제멋대로 들러붙어 있었다.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연위는 쉽사리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스르르르륵.

환영처럼, 혹은 환상처럼.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도끼를 들고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호정 주변으로, 어둠이 안개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허상일 것이다. 하지만 허상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서운 어둠은 스러지지 않았다.

뚝. 뚝.

도끼에서 떨어진 피와 살점이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화마도, 달빛도, 천둥도 연호정이 있는 장소를 침투하지 못했다.

그는 어둠을 두르고 서 있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환상의 영역에서, 오직 그 하나만 오롯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호정아.”

아들은, 범상치 않은 미래이자 과거를 살다 돌아온 자신의 자식은.

저 인외(人外)의 장소에 서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며, 어떤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일까.

자식을 완전히 이해하기 시작한, 천하의 어떤 부모보다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연위조차도 지금은 아들의 마음을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슬프냐.’

아들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잔뜩 분노해서 비명 같은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면, 걱정은 되되 이해는 했을 것이다.

한데 슬퍼하다니? 아들은 무엇 때문에 저리 슬퍼하고 있을까?

과거로 돌아왔음에도 또다시 마주친 숙적을 보며, 피비린내 가득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참담한 숙명을 깨닫곤 슬퍼하는 것일까?

예전처럼 악귀가 될 수 없음에 슬퍼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정도를 벗어나 버린 스스로를 깨닫고 슬퍼하는 것일까?

아들은 대체 왜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오셨습니까.”

연위는 퍼뜩 놀라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아들의 주위를 배회하던 어둠이 사라졌다. 그곳에는 지친 아들의 씁쓸한 얼굴이 있었다.

연위가 연호정에게로 걸어갔다.

저벅. 저벅.

아비의 발소리는 그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 무겁기만 했다.

아들과의 거리는 결코 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연위는 그 거리가 구만리라도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를 서서히 좁히며, 연위의 눈이 연호정 너머로 향했다.

‘……!’

그곳에는 처참하게 망가진 한 사내가 있었다.

놀랍게도, 이미 사람의 형체를 잃어버린 그 사내는 아직 살아 있었다. 대체 어떻게 다룬 건지, 팔다리가 수십 조각이 나고 복부가 열렸는데도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짐승이 뜯어먹다 남긴 시체를 보는 것만 같았다.

‘…….’

연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감은 눈을 다시 떴을 때, 어느새 아들이 앞에 있었다.

연위가 담담하게 물었다.

“몸은 어떠하냐?”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대답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도 연위는 아들의 말이, 목소리가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연위는 다시 한번 죽지 않은, 아니 죽지 못한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꿈틀. 꿈틀.

아직 살아 있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반 각이 지나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것이다.

연위의 시선이 다시 연호정에게로 향했다.

씁쓸하기 그지없던 아들의 얼굴이 어느새 무표정하게 변했다. 무감각해졌다는 표현도 괜찮겠다.

뭐가 됐든,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사람의 모습과 흡사한 목각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가만히 연호정을 주시하던 연위가 그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았다.

팅!

다 상해 버린 손도끼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연호정이 연위를 보았다.

“아버지?”

“흉한 물건이다. 그런 걸 들고 있으니, 네 얼굴도 그리 흉해진 것 같다.”

도끼라서 흉하다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 묻은 피가, 저 이름 모를 적의 원혼과 연호정이 토해 낸 분노를 가득 머금은 물건이기에 흉하다는 것이다.

주르륵.

도끼를 쥐었던 연위의 손도 피로 가득해졌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연위가 피가 묻지 않은 깨끗한 손으로 연호정의 손을 잡았다.

“가자.”

그가 연호정을 이끌고는 무림맹 쪽으로 걸어갔다. 연호정은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그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동안, 아들을 데리고 가는 동안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름답지 못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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