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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24화 (324/963)

324화. 성화(聖火)를 밝히는 자 (6)

제국의 힘이 약해진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국은 존재하고 있으며, 예전만은 못해도 민생을 아우르는 데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제국이 힘을 잃자 자연히 무림의 힘이 강해졌다. 무림은 제국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치안에 힘을 썼으며, 특히 백도 정파의 무문들은 민생 안전에 최대의 힘을 기울였다.

물론 관림상호불침(官林相互不侵)이라는 조약은 아직도 유효했다. 어찌 보면, 제국이 해야 할 일을 무림이 떠맡은 것 역시 그러한 조약을 위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실과 관부에서는 조약을 위반했다고 따질 수가 없었다. 정작 힘이 없어서 민생 안전에 힘을 쓰지 못한 것은 그들이었기에, 오히려 무림이 나서 준 것에 감사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무림은 황실과 관부를 넘보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나라는 천하를 지탱하는 뿌리다. 무림이 난장을 쳐서 나라가 사라지면, 그땐 정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유명 문파에서 제자 중 소수를 골라 황실과 관부에 보내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무림에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워낙 많기에, 제국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한 번씩 이름난 재인(才人)들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제국은 어렵사리 지탱됐다. 무림은 황실과 관부를 존중했고, 그들의 영향력을 대행하는 관리에게 깍듯했다.

연호정이 규적의 관복을 보고 어떤 관직인지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하나의 단체를 세우려면 그 지역의 문파들은 물론 관부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흑제성 정도의 초거대 세력을 만들려면 제국 그 자체를 신경 써야만 한다.

흑제성의 수장 흑암제로서, 연호정은 황실과 관부의 예복과 정복은 물론 그들이 하는 일과 수입 등등 거의 모든 사항을 외워 두고 있었다.

“놀랍군.”

규적의 눈이 깊어졌다.

호승심과 살의로 빛나는 그의 눈에 의외라는 빛이 떠올랐다.

“아주 어려 보이는데, 용케 진무의 복식을 알고 있어. 나이에 비해 식견이 대단하군.”

“역시 그랬나.”

연호정의 입꼬리가 하늘이라도 찌를 듯 날카롭게 올라갔다.

“신화교는 황실과 관부에 암약하고 있다…… 알고는 있었다만, 이렇게 직접 보니 확실히 네놈들이 애를 쓰긴 썼다.”

움찔!

규적의 눈에서 호승심이 가라앉았다.

대신 놀라움과 격정이 그 빛을 대신했다.

“네놈이 그걸 알고 있었다고?”

진무의 관복을 알아본 것이야 식견이 있으면 그럴 수 있다. 이 정도 고수가 느닷없이 기습을 가했으니, 자신이 신화교 측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화교가 황실과 관부에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뚜둑.

손가락을 푼 연호정이 재차 자세를 낮추었다.

“꼬락서니를 보니 너도 크게 되기는 틀린 놈이다. 통성명? 웃기지도 않은.”

“…….”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분풀이 좀 하다가 땔감으로 잘 써먹어야겠다.”

원래 연호정은 규적의 뒤를 밟아 그의 행적을 철저하게 조사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규적의 신법이 빨랐고, 기감 또한 날카로웠다.

아마 거기엔 삼교를 향한 연호정의 분노도 한몫했을 것이다. 냉정하게 기를 갈무리 한다고 했지만, 끊임없이 마음을 다스리긴 힘들기도 했으니까.

나아가, 인기척을 줄이고 규적이 작정하고 달리는 속도를 따라잡긴 무리였다. 그래서 아예 잡아 놓고 털어 버릴 생각을 한 것이다.

“분풀이? 땔감이라…….”

규적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연호정의 발언에 극도로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상대의 반응을 환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 할 수 있다면 해 보거라, 애송이.”

퍼어어엉!

규적의 몸이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준비, 시작 같은 말이 없어도 언제든 먼저 공격을 가한다.

실전의 묘미를 아는 자와의 싸움. 지닌바 힘의 크기는 비슷했으나 융통성이 모자랐던 범오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고수와의 생사결이었다.

타다다닥!

연호정이 무서운 속도로 접근했다.

속도는 비슷했지만, 혈익휘천으로 접근했던 이전까지와는 달리 짧고 탄력적인 보행으로 무수히 많은 발자국을 만들며 나아간다. 언제, 어떤 반격이 와도 대응할 수 있는 몸놀림이었다.

‘이놈.’

변형된 보법 하나만 봐도 상대가 얼마나 실전에 능한지를 알 수 있다.

규적의 눈에 다시 진한 흥분이 채워졌다.

‘제대로 놀아 볼 수 있겠어.’

파아아악!

이번에는 규적도 마주 달린다.

두 사람이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부딪쳤다.

쾅!

첫 교합은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똑같은 몸통 박치기다.

후우우우웅! 콰드득!

백호의 바람을 불러낸 연호정, 그의 두 발이 지면을 파고들었다.

화르르르륵! 투둑! 투두둑!

청로의 화염을 불러낸 규적, 그의 두 발이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힘으로 버티고 나아가는 사람은 연호정이었다. 지파를 떠나, 삼교 측 고수와 참으로 오랜만에 붙는 그였다. 극도의 살기와 흥분으로 타오르는 그의 근력은 예전과 또 달랐다.

규적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파아아악!

유연하게 몸을 눕힌 규적이 그대로 연호정의 팔을 잡고 뒤로 날려 버렸다.

연호정의 힘이 대단하다지만, 규적의 힘이라고 약하지 않았다.

치이이익!

규적의 손에 잡혔던 연호정의 양 팔뚝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잡힌 순간 현무기로 화기를 차단했는데도 화상을 입을 뻔했다.

찰나지간에 공력을 침투시키는 능력이 일품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누구의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전(一戰)임을 보여 주는 환상적인 내공 조절이었다.

쾅!

규적의 뒤로 날아간 연호정이 힘찬 진각을 밟았다.

곧장 연호정에게 달려들던 규적이 재빨리 몸을 세웠다. 상대의 진각에서 심상치 않은 반격의 기세를 읽어 냈기 때문이다.

파파파팡!

쏘아지는 속도가 빨랐던 만큼 제동을 위한 발길질만 네 번이나 필요했다.

속도가 빠르게 줄었지만, 규적의 몸이 연호정의 공격 사정권 안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왔다.

연호정의 두 눈이 살광으로 물들었다.

콰르릉!

강렬한 진각으로 뽑아낸 힘을 무지막지한 권풍(拳風)으로 토해 낸다.

규적의 눈이 커졌다.

‘백보신권(百步神拳)?!’

강렬한 진각과 폭발적인 권풍으로 상대를 완전히 분쇄해 버리는 소림의 전설적인 무공.

중원 무공에 깊은 견식은 없지만, 풍월로 들은 백보신권과 몹시 유사한 동작 같았다. 그 파괴력 역시 권풍이 쏘아지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막강했다.

물론 연호정의 무공은 백보신권이 아니었다.

실로 오랜만에 펼쳐지는 백호공, 백호군림(白虎君臨)의 일보진각(一步震脚)으로 지력을 뽑아 올려 호왕살(虎王殺)의 일격을 발출해 낸 것이었다.

‘늦었다!’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너무 시기적절한 순간에 쏘아졌다. 회피가 아니라 방어를 해야 옳았다.

쿠르릉!

규적 역시 강한 진각으로 몸을 세우곤 중단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신화교의 고급 절기, 염왕팔권(炎王八拳)의 화룡출도(火龍出道)였다.

두 고수의 강하고 뜨거운 권격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앙!

폭음과 함께 규적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힘에서 밀릴 리가 없었다. 규적이 밀려난 건 출수가 늦어 권풍에 제 위력을 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바바박!

한 박자 빨리 충격을 해소한 연호정이 재차 규적을 향해 뛰어들었다.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려 내치는 살벌한 무공 대결이다. 한 방만 제대로 들어가도 타격당한 부위가 그대로 증발할 것이다.

규적이 재빨리 자세를 잡고 연호정을 보았다.

화아아아악!

‘……!’

사방천지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무대 위.

냉혹한 표정으로, 그러나 불꽃보다도 뜨겁고 사악한 안광을 토해 내며 달려오는 연호정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무공의 성취 이전에 기세부터가 다르다. 명부에서 뛰쳐나온 염왕(閻王)의 차사(差使)가 도망친 귀신을 잡으러 오는 듯 살벌한 집착마저 엿보일 정도였다.

이를 악문 규적이 미친 듯이 쌍권을 휘둘렀다.

콰콰쾅!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며 무지막지한 충격파를 터트렸다. 그 충격파가 어찌나 거세던지, 사방에서 타오르던 불꽃마저도 원형을 그리며 훅! 하고 물러날 정도였다.

실전을 아는 초고수들의 격전, 넘치는 파괴력과 기가 질리는 살기 앞에 재해처럼 번지던 산불마저도 접근하질 못하고 있었다.

퍼어억!

연호정의 주먹이 규적의 복부에 박혔다.

빠각!

규적의 무릎이 연호정의 턱을 올려 쳤다.

연호정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턱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정신이 날아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규적이 눈을 빛냈다.

파악!

이 장도 안 되는 짧은 거리라면 연호정과의 속도 차이가 없다. 순간적으로 바짝 접근한 규적이 평권(平拳)으로 연호정의 목젖을 노렸다.

그때였다.

파아악!

“큭!”

아무런 낌새도 없었는데 언제 걷어찼는지 모르겠다. 땅에 박은 발끝으로 차올린 흙더미가 그대로 규적의 얼굴에 뿌려졌다.

의외의 수법에 당황해 상체가 흔들렸다. 규적의 평권이 연호정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연호정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순간 진짜로 정신이 날아갈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과 적을 향한 무한한 살의로 정신을 붙들었다.

그의 두 손이 엄청난 속도로 규적의 상반신을 두들겼다.

퍼퍼퍼퍼펑!

“컥!”

찰나지간 토해 낸 십팔 연타였다. 일격의 위력이 크진 않지만, 내력의 보호를 받는 고수의 내부를 진탕시키기에 무리가 없는 연환 공격이었다.

파바박!

규적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순간의 반격으로 승기를 잡은 연호정이었다. 곧장 공격권으로 들어간 연호정은, 순간 좌측에서부터 다가오는 엄청난 불꽃 세례에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화르르륵! 콰릉!

허공을 가로지른 불꽃이 대지의 표면을 긁고 훅 사라졌다. 후속타를 읽은 규적이 화기를 끌어와 공격 자체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타오르는 불꽃을 끌어와 공격하는 신기(神技)의 기공술, 내공 소모는 제법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몰리고 몰리다 끝내 패배했을 것이다.

우두둑!

연호정이 무릎을 잡았다. 서둘러 피하기 위해 폭발적인 속도로 접근하던 몸을 제동하는 것도 모자라 후방으로 날렸다. 관절이 부서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후두두둑!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 낸 규적이 음침한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꽤 치졸한 수법을 쓰는군.”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지.”

“강자의 승리보다 승자의 강함을 미덕으로 본다는 것이냐?”

“원래 승부란 그런 것이다, 애송아.”

애송이란다. 한참 어린 연호정의 얼굴을 보면, 그 말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들렸다.

하지만 젊은 외양과는 달리 연호정의 목소리에서는 종사의 기품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적측의 고수와 살기 넘치는 공방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그는 흑암(黑暗)을 다스렸던 제왕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규적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에게서 풍겨 나오는 제왕의 기도를 읽은 것이다.

“……좋아.”

규적이 강하게 땅을 밟았다.

콰앙! 화르르르륵!

일순 그의 머리카락이 몽땅 하늘로 치솟았다.

화르륵! 화르르륵!

규적의 몸에서 뿜어지는 화기가 점차 파랗게 물들어 갔다. 청로순화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전초전은 끝났다. 이제는 안 봐줄 게다, 이름 모를 꼬맹아.”

연호정이 사악하게 웃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도끼가 들려 있었다.

“죽여 달란 말이 나올 때까지 산 채로 토막을 쳐 주마, 애송이.”

콰르르릉!

겨울철 밤하늘.

서늘한 구름 사이를 뚫고 천둥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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