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성화(聖火)를 밝히는 자 (4)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일 차 정보 거점 인근에 도착한 연호정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허리야. 그게 뭔 소리야?”
연호정의 천종운행비는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연가신단의 내력으로 폭발하는 신법의 속도는 이미 한 종파의 우두머리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의 업히다시피 왔지만, 너무 과하게 달렸다. 제갈아연의 허리가 뻐근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연호정이 손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보기에 어때?”
“어떠냐니?”
“이 지형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해 봐.”
제갈아연의 눈이 반짝거렸다. 연호정이 실없이 이런 질문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진지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제갈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딱히 이상한 점은 없는데? 일 차 거점이 저기, 숲속이라고 했던가?”
“그래.”
“위치 하나는 잘 잡았네. 확실히 신경 쓴 티가 나. 처음부터 의심하고 살펴본 게 아닌 이상, 천하의 고수라도 그냥 지나치고 말 정도야.”
“그것 외에는?”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해서 은신과 엄폐에 용이하다는 것 정도? 마을에서도 적당히 떨어졌지만, 위치가 위치인 만큼 마을을 감시하기에도 편하고. 그런데…….”
제갈아연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나무가 정말 많네.”
“바로 그거다.”
아직 겨울의 추위가 가시지 않은 판국이었다. 헐벗은 나무에 새로 나뭇잎이 나려면 두 달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한데도 신화교 측의 정보 거점이 보이질 않았다. 수목이 워낙 빽빽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은, 엄폐만을 위해 이런 지형에 거점을 잡았을 것 같진 않아.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은밀한 장소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그 말은?”
“반드시 이런 장소여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제갈아연의 눈이 반짝거렸다. 흥미로운 걸 발견한 호기심 넘치는 소녀의 눈빛과 비슷했다.
“다른 거점들도 이래?”
“그래. 묘한 기시감을 느꼈는데, 생각해 보니 모든 거점 주변에 수목이 우거져 있었다. 애써 찾기가 힘들 정도로.”
“흐음.”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는 신화교의 적도와 만난 적은 있어도, 고수와 싸워 본 적은 없었다. 그가 싸운 이들은 대부분이 사음교 측의 마인(魔人)들이었다.
그러나 신화교 측 고수들의 특성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불을 숭배한다.’
신화(神火), 그리고 성화(聖火).
신화교의 교주는 곧 최초로 불을 안겨 준 신의 대리자로서, 교도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다. 사음이나 광혈처럼, 그들의 신뢰 역시 광신(狂信)의 영역에 달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쓰는 무공은 전부 화기(火氣)를 기반으로 한다.
물론 단순한 화기는 아니다. 듣기로 그들의 열양공(熱陽功)은 중원의 열양공과는 궤를 달리하며, 지닌바 화기 역시 압도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사음교 측 고수의 말에 의하면, 신화교의 무공을 대성한 자가 발산하는 화력은 거의 용암에 준한다고 하였다.
그 정도 화력이라면 상성조차 무시한다고 봐야 한다.
‘동시에, 화기를 기반으로 한 무공을 성장시키기 위해 그 희생양으로 쓰일 목기(木氣)가 강성한 곳에서 수련한다고 했다. 그렇게 일정 이상의 경지를 구축한 이후에는 반대로 상성을 억누르기 위해 수기(水氣)가 풍부한 곳에서 열양공을 연성한다 했지.’
거센 불에 물 몇 방울을 던지면 더 거세게 타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연호정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목기가 왕성하다. 모든 거점이 그러하다. 단순히 무공 연성 때문이 아니라, 발각되었을 경우의 도피와 은폐를 위함이겠지. 나아가, 이런 곳이라면 몇 수 위의 고수가 공세를 가해도 힘에서 밀리지 않을 것이다.’
철옹성이라는 말이 있다. 절대적인 수비가 가능한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거점 책임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장소야말로 철옹성에 가깝다. 화력을 집중하면 이곳 전체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될 테니까.
“이번 적들은 하나같이 극양의 무공을 익혔다. 수백 년간 열양공만 파 왔으니, 열양공의 수준만큼은 중원의 무공보다도 뛰어나다고 봐야 해.”
제갈아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목기가 풍성한 이런 곳에 거점을 잡은 이유가 설명이 되네.”
“그래.”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즉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버지께서 휴식을 취하라고 하신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 정도 이상함은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짙은 흥분과 도를 더해만 가는 피로로 인해 상대를 신화교가 아닌 사음교를 대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파악이 늦어졌던 것이다. 그답지 않은 실수였다.
“네가 찾은 진법 중 수기(水氣)를 기반으로 하는 게 몇 개나 되지?”
“총 열다섯 개 중 두 개야.”
“적군.”
“애초에 오행기(五行氣)를 끌어다 쓰는 진법이라는 것 자체가 드물어. 최고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거든.”
“음.”
“게다가 기를 제어하고 통제하는 진법은 순리를 따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망가질 수밖에 없지.”
“얼마나 지속되지?”
“제대로 만든다는 가정하에 최소 두 달. 제조 자체는 사람만 붙어 주면 그리 어렵지 않아.”
“잘됐군.”
“대신 진법을 완성시킬 수원(水源)이 필요해. 그것도 없이 진법을 설치하면 진법의 영역 바깥은 엄청나게 건조해질 거야.”
연호정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마을 북동쪽 부근에 길게 이어지는 좁은 강이 있었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긴 하지만, 진축(陣軸)을 잇는다면 가능은 해. 대신 축을 잇기까지 보름은 걸릴 거야. 은밀하게 작업하려면 거기서 닷새 정도 더 걸릴 테고.”
“스무날이라.”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시 정보를 보낼 때까지 사십오 일의 시간이 있어. 이제는 사십이 일이 남았군.”
“착수할까?”
“물론이지.”
“이곳 하나만?”
“아니. 이곳과 허창, 마지막 거점인 두 곳을…….”
그때였다.
파악!
연호정이 제갈아연의 입을 틀어막고 단숨에 후방으로 물러났다.
당황한 제갈아연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왜 그래?!]
[조용.]
화답하는 전음에서 엄청난 무게감이 느껴졌다.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거대한 바위 뒤에 숨은 연호정이 저 멀리 북쪽을 바라보았다.
‘고수?!’
화르르르.
불타오르는 듯한 기파가 환각처럼 전해진다.
이름 모를 고수 역시 존재감을 한껏 죽이고 있었지만, 휴식과 연가신단, 그리고 균형을 이룬 사신기로 기감이 엄청나게 날카로워진 연호정의 감각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느닷없이?’
굉장한 고수다. 기감으로만 판단한 진기의 완성도는, 놀랍게도 육대세가 가주급에 필적할 정도였다.
아버지나 모용군과의 비교는 어렵지만, 적어도 팽가주나 남궁가주인 남궁인에 비해도 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쉽게 볼 수 없는 초절정고수. 그만한 고수가 무림맹에서 불과 수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왔다.
연호정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이것들, 겁도 없군.’
사음교로 치면 선봉을 맡은 무장(武將)급 고수가 나타난 격이다.
‘굳이 이 시점에? 대체 왜? 설마 이 정도로 조심성이 없는 건가? 아니면 절대적인 자신이 있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하지만 상대의 기도가 거점 앞에 다다랐을 때, 연호정은 생각을 멈추었다.
그가 은밀하게 내공을 운용, 청력을 극대화했다.
“십이장(十二將)님 오셨습니까.”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틀 전 모옥에서 들었던 중년 사내가 분명했다.
잠시 후, 이름 모를 고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반쪽짜리가 연락을 보냈다고 들었다.”
묵직하다.
목소리 자체는 다소 높은 편인데, 묘하게 낮고 울림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굉장한 위엄이었다. 전달되는 목소리에서 일대종사(一代宗師)의 품격이 드러났다. 진기의 완성도나 밀도를 떠나, 강자로서의 위압감 자체가 대단했다.
“그렇습니다.”
“무슨 정보였느냐?”
“드, 듣지 못하셨습니까?”
“…….”
“헉! 죄송합니다! 소인이 대죄를……!”
“괜찮다. 나는 십일장이 아니야. 즉답지 아니하였다고 벌을 줄 만큼 인정 없는 사람이 아니다.”
“송구할 뿐입니다.”
“해서, 어떤 정보였느냐?”
“무림맹 유군 부대의 수장인 연호정이라는 후기지수에 관한 정보였습니다.”
“연호정이라면, 근래 명성이 자자한 그 후기지수를 말함이냐?”
“그렇습니다.”
“하다못해 봉공도 아니고, 고작 그런 애송이의 정보만 보냈다는 게냐?”
“그렇습니다만, 보내온 내용이 사실일 경우 충분히 놀라운 사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서신을 이리 줘 보거라.”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진실을 기반으로 한 가짜 정보를 투척한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막상 적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언급되니, 기분이 묘했다.
꾸욱.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놈들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은 기분과 그 이상의 냉정함이 몸을 지배했다.
스륵.
제갈아연이 연호정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냉정해지라는 뜻일 것이다. 연호정은 은밀하게 호흡을 골랐다.
잠시 후.
“이게 사실이냐?”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정보원을 따로 파견했습니다.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연호정이란 인물에 대해 충분한 조사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조심히 다뤄야 할 정보라는 건 확실하군.”
“그렇습니다.”
“혹, 놈들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이 믿기지 않는 정보를 대놓고 흘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
연호정은 괜스레 가슴이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전무(全無)하다고 사료되옵니다. 다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고 있습니다.”
“반쪽짜리한테 잠영일호가 붙었다고 들었다. 놈은 현재 어디에 있느냐?”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뭐라?”
“그, 그것이! 그는 성화패(聖火牌)와 원로원의 친필 서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상부와 직접적으로 교신하는 것을 허락받았기에, 저희 측의 명령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원로원이라…….”
연호정은 십이장이라 불리는 고수의 목소리에서 옅은 웃음기를 느낄 수 있었다.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이빨 다 빠진 늙은이들. 갈 때 다 된 인간들은 항상 그게 문제야. 쓸데없는 전통과 핏줄에 목을 매는 것, 본교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었군.”
“송구할 따름입니다.”
“알았다. 어차피 잠영일호 그놈 역시 권력에 눈먼 놈일 뿐이야. 겸상도 하기 싫은 머저리지만,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절대 배신 따위 하지 않을 놈이지.”
“그, 그렇습니다.”
“알겠다. 차후 다시 들르도록 하겠다. 제대로 지키고 있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스륵!
십이장이라 불린 고수의 기척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후우, 죽겠군. 무장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갑자기 어인 일로 여기까지 오셨을까.”
투덜거리던 목소리의 주인이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아연. 지금 이대로 맹으로 복귀해. 지금의 기도를 유지해야 한다. 절대 걸려선 안 돼.]
[넌?]
[쫓아간다.]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전음에서 강인한 의지를 읽었다. 말린다고 안 갈 녀석이 아니었다.
[조심해. 무리하지 말고.]
[알았다.]
사락!
연호정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