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성화(聖火)를 밝히는 자 (3)
이틀 뒤.
“흐음.”
연위의 눈이 호수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그랬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차를 마시는 자리라고 표정 관리는 한다. 하지만 연위는 큰아들의 얼굴에 서리가 한 겹 끼어 있음을 간파했다.
“신화교의 마지막 정보 거점은 허창(許昌) 인근입니다. 세 번째가 천자산(天子山)인 걸 보면, 비상시에 허창 말고도 정보를 보낼 곳이 최소 두 곳은 더 있을 겁니다.”
정보를 탈취하여 주고받는 연락책의 경우 무수히 많은 거점을 운영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거점이 바로 첫 번째 거점과 마지막 거점이다. 주로 운용하는 거점은 놔두되, 첫 번째와 마지막 거점만큼은 여러 군데를 마련해 두는 것이 안전하다.
정보를 제대로 탈취한다고 하면 거점을 열 곳 이상 두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나마 네 군데면 적다고 볼 수 있었다.
“무림맹 측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모른다고 판단하고 거점을 지었겠지.”
“그럴 겁니다. 하지만 거점 하나하나가 부실해 보였습니다. 아마 임시로 지은 것일 테고,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제대로 세워 가기 시작할 겁니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나저나…….”
연위가 혀를 내둘렀다.
“날아가는 전서구를 일일이 따라잡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무림맹이 있는 대별산에서 이 차 거점을 거쳐 삼 차인 천자산까지, 그리고 천자산에서 마지막 허창까지 모조리 훑고 돌아왔단 말이다.
이건 내력이나 체력의 고강함을 따지기 전에 정신력 문제다. 어떻게든 잡겠다는 극한의 정신력이 아니면 제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따라잡을 수 없다.
심지어 돌아올 땐 역순으로 하나하나 다시 확인까지 했단다.
아들이 독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집요한 줄은 몰랐다.
‘그럴 만도 한가.’
아들은 수십 년의 생을 살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과거에 돌아왔다고 했다.
연위는 아들의 고백이 사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한 얘기인지를 떠나, 연위는 아들의 고백이 사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을 떠올리면, 아들의 집요함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
“고생이 많았다. 오늘은 눈 좀 붙이거라.”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이놈아, 그 먼 거리를 다녀오고 나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으냐?”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과거를 후회하느니, 지금 죽을 것 같아도 발바닥에 땀 나도록 움직이는 게 낫습니다.”
“…….”
“일단은 맹 내 상황이 잠잠하더군요. 조만간 공공대사께서 답변을 주신다면, 그 이후에 움직여도 될 것 같습니다.”
“음.”
“당분간은 이쪽에 집중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정쟁의 흐름에서 눈을 떼지 말아 주십시오.”
말은 부탁이지만, 어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다. 제대로 마음을 먹은 연호정에게선 무시무시한 박력이 풍겼다.
생각해 보면, 아들은 그간 너무 여러 군데에 손을 대고 있었다. 모용군을 견제하랴, 멸사군을 신경 쓰랴 정신없는 와중에 무림맹의 앞날을 예측하고 삼교의 태동까지 주시했다.
절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비록 아슬아슬했지만, 아들은 그 모든 걸 끝까지 잡고 버텼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내 그간 ‘사람’을 신경 쓰느라 네게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구나.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정쟁의 흐름은 이 애비가 제대로 주시하고 있을 터이니, 아무 걱정 말고 달려 보거라.”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누구 목이 달아날 상황이 아니라면, 그래도 오늘은 쉬었으면 한다.”
“아버지.”
“이건 가주로서의 명령도, 아버지로서의 권유도 아니다. 부탁이다.”
“…….”
“네 말마따나, 결정적인 순간에 후회하느니 노력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애비가 보기에, 지금 네 안색이 너무나도 좋지 않다.”
단순히 피곤해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꽤 오랜만에 삼교 하나를 보고 달리는 중이라 그럴까? 연호정은 다소 흥분한 상태였다.
그 흥분과 살의, 걱정과 분노, 결의와 갈등이 연위에겐 모두 느껴졌다.
“내가 아는 큰아들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도 한 수 앞, 두 수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천재다. 하지만 지금 네 모습에선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
“오늘만 쉬자. 쉬면서 머리를 식혔으면 한다.”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오늘은 밖으로 나돌지는 않겠습니다.”
연위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장강 이남의 상계(商界)가 제법 요동치고 있다더구나. 마침 그 건으로 봉공회의가 잡혀서 자정까지는 돌아오기 힘들 듯하다. 회의도 할 겸 봉공들도 살필 겸 다녀올 테니, 푹 쉬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오냐.”
그렇게 연위가 거처를 나섰다.
연호정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식이라.”
기우희를 처음으로 제대로 써먹었고, 그와 동시에 신화교의 정보 거점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젠 그 정보 거점들 주변에 진법(眞法)을 이용한 감시탑을 세우는 일을 주도해야 했다. 당연히 쉬고 있을 새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 오늘만 쉬자.”
그는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의 눈을 믿었고, 마음을 믿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이 평소와 다르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빈틈이나 허술함이, 아버지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물론 하루 쉰다고 이 다급함이 사라질 것 같진 않았지만, 최대한 마음을 다스릴 생각이었다.
연호정은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심장 박동 소리가 천둥처럼 들릴 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막상 누우니 묘하게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지만 연호정의 머리는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쟁은 아버지와 군사님, 정보는 후개, 모용군은 형님이, 멸사군은 묵비가 맡고 있다. 다들 믿을 만한 이들이지만, 사람은 결코 완벽하지 않아. 근시일 내로 어딘가에 삐걱거리는 곳이 생길 거다.’
연호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소한 문제 하나가 조직 전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흔치는 않지만,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긴장을 풀 수는 없는 노릇.’
정말이지 오랜만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마음은 자꾸만 삼교로 가는데, 그쪽에 집중하면 다른 쪽에서 빈틈이 생길 것 같다.
사람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세상일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자신이 끼어든다고 문제가 해결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자신의 고민은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참 머리를 굴리던 연호정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이건 쉬는 게 아니잖아.”
그는 일부러 머리를 비우려고 마음을 먹었다.
억지로 머리를 비우려 들면 오히려 잡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도 연호정은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연호정의 숨소리가 점점 골라졌다.
확실히 피곤하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숙면에 든 연호정의 표정은 묘하게 지쳐 보였다.
반나절 뒤.
쾅!
“정아!”
문이 열리며 제갈아연이 들어왔다.
꽤 고생했는지 그녀의 눈 밑도 시커멨다. 그래도 눈빛은 초롱초롱한 것이, 뭔가 성과를 냈음을 알 수 있었다.
“찾았어! 마침 본가에 딱 괜찮은 진법이…… 얼레?”
제갈아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사람 일 시켜 놓고 저는 벌러덩 자빠져 잠이나 자고 앉았네? 이런 악덕 상사가 있나!”
한창 씩씩대던 제갈아연은 결국 창가 옆 의자에 앉았다.
일그러진 얼굴로 연호정을 보던 제갈아연의 표정이 점차 무표정하게 변해 갔다.
‘하긴.’
그녀는 연호정의 성격을 알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연호정은 밑의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자기는 뒤로 빠져 놀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힘든 일을 했으면 했지.’
게다가 이렇게 큰소리를 내면서 들어왔으면 잠에서 깨야 정상이었다. 아니,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기감을 읽고 깨어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모르게 자고 있다는 건, 그만큼 연호정의 피로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제갈아연이 품에서 잘 접힌 종이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쳇, 열심히 찾은 건데. 하긴, 아주 급한 일은 아니니까.”
어차피 적측의 거점들이 당장 사라질 것도 아니었다. 진법이야 환경만 맞으면 며칠 만에 구축할 수 있으니, 쉴 때는 충분히 쉬어 주는 게 좋을 것이다.
‘적이라.’
제갈아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무림을 노리는 모종의 세력이 있다고?’
그녀는 그런 조직이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들었다.
물론 그녀는 왜 이제야 알려 주냐며 연호정을 탓하지 않았다. 연호정이나 아버지나 지금까지 말을 아꼈다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정이나 아버지가 그렇게 긴장한 걸 보면 확실히 보통 적이 아니라는 건데.’
그녀가 한참 ‘적’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였다.
“저…….”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갈아연이 눈을 끔뻑거렸다.
“누구야? 어? 혹시 지평이야?”
“아, 예.”
“들어와, 들어와.”
연지평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제갈아연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바빠서 자주 보지도 못하네.”
“그러게요. 잘 지내셨습니까, 누님?”
“물론이지. 이야, 다시 봐도 지평이는 참 착해. 싸가지가 바가지인 내 동생도 좀 보고 배웠으면 싶다.”
“쿨럭.”
“그나저나 정이는 자는데? 정이한테 볼일 있어서 온 거야?”
“아, 예. 근데 자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볼일 있어서 왔는데 완전히 곯아떨어져 버렸더라고.”
“…….”
“…….”
“……커허험!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까?”
“응? 어, 당연하지. 나중에 다시 왔다가 이놈 깨서 또 어디 나다니는 거 찾아다니려면 머리 아프잖아.”
“그, 그렇군요.”
사람 자는데 옆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참 묘한 일이다.
제갈아연이 손을 까딱거렸다.
“너도 와서 좀 앉지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누님 말동무나 해 줘라.”
“예, 예?”
연지평은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형이 자는데 옆에서 조잘거리는 게 영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밖에 평상이 있습니다. 거기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제갈아연이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복식 호흡으로 질렀는데도 계속 자는 거 보면 진짜 깊게 잠든 거야. 봐봐, 네가 왔는데도 숨소리 하나 튀질 않잖아.”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에헤이, 그러지 말고 여기 와서 앉아.”
연지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갈아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봤을 때는 몰랐는데 너 엄청나게 발전했구나? 작정하고 붙으면 나도 지겠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야. 너는 못 느끼는 모양인데, 네 기도가 마치…….”
두 사람은 생각보다 편히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연지평은 한 번씩 연호정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그렇게 반 시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겨울철의 산속이라 그런지 해가 지는 시간도 빨랐다. 어느새 창밖의 풍경이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제갈아연이 깔깔깔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 상대를 만났어. 그간 쌓인 피로가 확 날아가는 기분이야.”
연지평이 진중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저와의 대화로 피로를 푸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너는 정말 어른이 다 됐다. 어째 형보다 더 어른스럽네.”
“쿨럭!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아니기는,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는데.”
“콜록콜록!”
“고뿔 걸렸니?”
“……아니요.”
제갈아연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종종 우리 거처로 놀러 와. 차 좋은 놈으로 대접해 줄게.”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누님.”
만족스레 웃던 제갈아연은 문득 창가에 비쳐 드는 노을빛을 바라보았다.
“뻘겋네. 어디서 불이라도 난 것 같다.”
“그러게요.”
“으, 나는 불이 싫어.”
“왜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내가 익힌 심법은 목기(木氣)를 기반으로 한 신공이라, 그 망할 변태 새끼한테 힘으로 밀릴 뻔했잖아.”
“아!”
“그때 이후로 불만 보면 넌더리가 나더라. 화기(火氣)에 당하지 않을 정도로 신공을 연마하면 된다고 하던데, 그걸 어느 세월에 대성할지도 모르겠고.”
“누님의 오성이 워낙 뛰어나시니 누구보다 빨리…….”
그때였다.
“그렇지.”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침상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화기에 민감한 것은 목기와 수기라…… 그래, 그렇지. 그것은 신화(神火) 앞에서도 마찬가지지.”
“컥! 너 언제 깼어?”
연호정이 밝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가자. 좋은 생각이 났다.”
어디냐고 물어볼 새도 없었다.
파아아앙!
곧장 창밖으로 몸을 날린 두 사람이 순식간에 까마득한 점이 되었다.
연지평은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제갈아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 이 망할 놈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손 안 치…… 이걸 죽여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