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성화(聖火)를 밝히는 자 (2)
동각의 눈이 밝아졌다.
“오는군.”
파드드득!
창가에 내려앉은 새가 동각을 보며 찌르르 울었다.
노인 하나가 조심스레 새를 손에 쥐고는 발목에 묶인 연통을 끌러 냈다.
뻑뻑 연초를 피워 대던 동각이 눈살을 찌푸렸다.
“망할 계집년, 세작으로 들어갔으면 사소한 보고라도 빨리빨리 건넬 것이지.”
앞으로 사십오 일 내로 다시 정보를 보내야 할 것이다. 만에 하나 그 원칙을 지키지 않을 시, 상부에 보고하여 경을 치게 할 생각이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소강단의 칠호에게서 온 서신입니다.”
“음.”
현재 무림맹 외성에 거하는 연락책은 총 넷이었다.
각기 철방, 마굿간, 의방, 식자재 창고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초일류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 중 좌장이 바로 식자재 창고인 소강단에 숨어 든 칠호였다. 첫 보고라고 좌장이 직접 연락을 보낸 모양이었다.
동각이 곰방대를 털며 말했다.
“어떤 정보인가?”
“무림맹의 유군 부대인 멸사군의 군장에 관한 상세 정보입니다.”
“그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동각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제아무리 첫 보고라지만, 봉공 중 하나도 아니고 고작 유군 부대 대장 놈에 관한 신상만 보냈단 말인가?”
멸사군과 탕마군의 군장들이 중원 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리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 봤자 후기지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진짜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을 무력이다.
그리고 그 무력만큼이나 젊어서, 당장 신경 써야 할 만한 놈들도 아니었다.
그런 인물을, 그것도 둘 다가 아니라 달랑 하나만 골라서 보내다니? 기우희의 일 처리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노인이 동각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단순히 무시할 만한 정보는 아닌 듯싶습니다.”
“뭐?”
“한 인물에 관한 정보치고는 그 양이 꽤 많습니다. 내용도 생각보다 심각하고요. 직접 읽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음?”
동각이 의아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얼굴은 진지했다. 평범한 화전민처럼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노인은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늙은이를 괜히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동각이 말없이 서신을 받아 읽었다.
잠시 후, 그의 눈이 커졌다.
“뭐야? 무림맹 정쟁의 핵심이라고?”
노인이 눈을 빛냈다.
“서신에 적힌 내용만 보면, 지금껏 벌어졌던 무림맹 내 수많은 정쟁의 최고 핵심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각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무림맹 정쟁의 핵심이라니? 고작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
“이거 혹시 연막이 아닌가?”
노인의 생각도 동각과 비슷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사항을 두고 그렇다, 아니다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막이든 뭐든, 성녀님이 괜히 이런 서신을 보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냥 넘기기에는 의외성이 너무 큰 정보입니다.”
“으음.”
“일단 연호정이란 인물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됩니다.”
동각이 눈살을 찌푸렸다.
“놈에 대해서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십수 년을 머저리로 살다가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청년 고수라고 하지 않았나? 구주명가를 무너트리는 데에 앞장섰고, 심지어는 사음과 연결된 회랑단을 섬멸하는 데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했지.”
다소 성급해 보이는 언행과는 달리 동각 역시 머리로는 누구 못지않았다. 성격이 그럴 뿐, 진지해질 땐 평균 이상의 두뇌 능력을 보여 주는 그였다.
중원의 굵직한 사건이나 주요 정보들은 전부 외워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근 몇 년간, 중원 무림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사건을 일으킨 것은 벽산의 호장이라 불리는 연호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쟁의 핵심이라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동각이 노인에게 물었다.
“본교가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힘을 쓰면, 어느 정도의 정보력을 동원할 수 있지?”
“중원의 어중간한 정보 단체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인의 눈이 번뜩였다.
“독주(督主)가 움직여 준다면, 개방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상세하게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동각이 고개를 저었다.
“창위(廠衛)는 안 돼. 현재 황궁은 무림보다 더한 복마전(伏魔殿)이야. 완전 장악까지 짧게는 이삼 년, 길게는 십 년도 걸린다.”
“역시 무리로군요.”
동각이 혀를 찼다.
“사음이 아쉽군. 양천을 제대로 다뤘으면 이미 묵룡을 우리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무림 정세에도 훨씬 정통했을 것을.”
근래 들어서 양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들었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사음 측의 의도를 간파한 것 같다고 하였다.
‘사음은 더 조심스레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고.’
힘 대 힘으로 싸운다면야 묵룡부 따위, 어찌 사음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무림에는 묵룡부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무림맹은 묵룡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 세력이며, 심지어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숨은 노고수들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즉, 삼교는 중원 무림의 전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전면전을 벌인다면 승리를 예상해 볼 수 있겠지만, 아군의 피해 역시 괴멸적일 것이다. 그런 어정쩡한 승리를 얻을 바에야 애초에 싸우지 않는 편이 나았다.
노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가?”
“광혈(狂血) 측의 도움을 받아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동각의 눈이 깊어졌다.
“광혈 역시 안 돼. 아니, 오히려 창위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훨씬 위험해.”
“역시 그렇군요.”
광혈교(狂血敎).
삼교끼리의 힘은 서로 우위를 논하기 어렵다. 힘이란 것이 무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분명 삼교의 힘은 대등하며 저마다의 특장점이 분명하다.
그중 광혈교는 삼교 중 가장 난폭하고 거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삼백 년 전, 중원의 무신(武神)에게 패퇴 당한 혈신(血神)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은 종파라고도 할 수 있겠다.
“광혈은 짐승의 소굴이다. 우리 신화와 사음은 마귀의 본성을 안고 사람이 되었지만, 광혈은 아니야. 그들은 아직도 삼백 년 전의 마귀 그 자체지.”
“…….”
“최악 중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고민해야 할 집단이 광혈이다. 물론, 이건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하셨으니, 조금 더 천천히 접근해 보도록 하지요. 시간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조심스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낫지.”
노인이 서신을 접었다.
“필사 후, 다음 거점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러게.”
노인은 세필(細筆)을 꺼내 순식간에 서신을 써 내려 갔다.
놀랍게도 필적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필적에 남는 작성자의 정보를 차단하는 정보원의 필법이었다.
노인이 휘파람을 불었다.
삐익!
노인의 휘파람 소리는 무척이나 묘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못 듣고 지나칠 정도로 작은데, 또 잘 들어 보면 묘하게 날카로운 소리였다.
푸드드득.
잠시 후, 시커먼 까마귀가 창가에 앉았다.
까마귀는 청동색 부리에 눈동자가 붉었다. 언뜻 보아도 보통 까마귀가 아니었다.
노인이 까마귀의 다리에 서신을 매달자, 까마귀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푸드드득! 사아악!
순간 동각의 눈이 번쩍였다.
덜컹!
까마귀가 날아오름과 동시에 문을 열고 뛰쳐나간 동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인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그러십니까, 조장님?”
“…….”
“조장님?”
“……음, 아닐세.”
동각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냥 바람 소리였던 모양이야.”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해서 곧장 뛰쳐나왔는데,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예민했나 보군.”
그의 감각은 짐승처럼 예민했다. 어지간한 암살자의 은신도 오 장 밖에서 알아챌 수 있다.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었다.
동각이 문을 닫으며 모옥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자네는 연호정에 대해 상세히 알아 오게.”
“알겠습니다.”
* * *
“차 맛이 좋구나.”
“헤헤, 그렇죠?”
제갈문호가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내 무수히 많은 차를 마셔 봤지만, 역시나 딸이 타 주는 차가 제일 맛있다.”
“킁, 그럼 거처에 자주 들르세요. 차 한잔 타 드리고 싶어도 뵙기가 힘들잖아요.”
“허허, 일이 바쁜 것을 어쩌겠느냐? 너 역시 멸사군의 진법 훈련 때문에 잠도 잘 못 자고 있잖으냐?”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어제부로 다 끝났어요. 이젠 위치나 시기를 잡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더군요.”
“벌써?”
“네.”
제갈문호는 깜짝 놀랐다.
“일전에 분명 본가의 천문금쇄(天門禁碎)와 사상풍운(四相風雲), 그리고 대라구궁(大羅九宮)을 분해한 진법의 일부를 가르치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맞아요.”
“그 진법들은 하나하나가 삼 년을 수련해도 실전에서 써먹기 힘든 명진(名陣)이다. 자유자재로 펼치려면 오 년 이상의 훈련이 필요해. 제아무리 쉽게 풀어 가르쳤다지만, 벌써 진주(陣主) 없이도 알아서 움직인단 말이냐?”
제갈아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명가에서 배운 이들이라 그런지 이해도가 좋더군요. 게다가 한 몸처럼 싸우는 데에 능해서, 체득 시간만 보면 본가의 무학자(武學者)들보다 몇 배는 빨라요.”
“허어!”
“게다가 온전한 진법이 아닌 일부잖아요. 어차피 제대로 익히려면 너무 오래 걸리고, 본가 비전이라 그럴 수도 없고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네가 그리 말할 정도니, 나중에 시연할 때 이 애비도 꼭 불러 다오. 한번 보고 싶구나.”
“좋지요.”
자신에 찬 딸의 미소를 보니, 제갈문호 역시 크게 기대가 됐다. 이런 부분에서 딸이 얼마나 완벽주의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녀가 오랜만에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길 한참.
“군사님.”
제갈아연은 깜짝 놀랐다.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제갈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들어오시게.”
문이 열리고 연호정이 들어왔다.
제갈아연이 눈을 끔뻑거렸다.
“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연호정은 한 번 웃어 주고는 제갈문호에게 말했다.
“다 찾아냈습니다.”
제갈문호가 눈을 빛냈다.
“신화 하나던가?”
“그렇습니다.”
“몇 군데던가?”
“총 네 군데입니다.”
“많기도 하군.”
“그만큼 놈들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들키진 않았겠지?”
“돌아오는 길에 역순으로 세 번씩 확인했습니다. 눈치 못 채더군요.”
“과연 대단하네.”
제갈문호가 책상 위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 연호정에게 건넸다.
“내 나름대로 추려 본 사람들일세. 사안이 사안인지라, 별수 없이 본가 사람들이 대다수일세.”
“능력만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연호정은 문서를 훑어보았고, 제갈문호는 손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중간에서 제갈아연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대화래요?”
“음?”
명단을 훑던 연호정이 제갈문호를 보며 말했다.
“군사님. 사람 하나가 빠졌습니다만.”
“누구 말인가?”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가리켰다.
“얘요.”
제갈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상황이냐니깐?”
제갈문호가 입맛을 다셨다.
“아연이야 어차피 자네 수하 아닌가? 알아서 잘 굴릴 테니 굳이 명단에 넣지 않았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허험, 너무 심하게 굴리진 말아 주게.”
“죽기야 하겠습니까. 능력이 출중한데요.”
제갈아연은 기어이 발성을 터트렸다.
“무슨 얘기냐니까!!”
“너, 나랑 같이 감시탑 좀 세워야겠다.”
“……잉? 감시탑? 무슨 감시탑? 근데 감시탑을 내가 왜?”
“시끄러워, 인마.”
연호정이 제갈아연의 뒷덜미 부근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너무 황당한 짓거리에 제갈아연은 눈만 끔뻑거렸다. 허공에 뜬 두 발이 묘하게 애처로워 보였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제갈문호가 헛기침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항상 조심하시게.”
제갈아연이 버럭 소리쳤다.
“뭐 하는 짓거리야,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