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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19화 (319/963)

319화. 성화(聖火)를 밝히는 자 (1)

쉬이이익!

날카로운 검풍(劍風)이 허공을 갈랐다.

검풍은 날카로웠지만, 정작 그 일검을 날린 동작은 느리고 부드러웠다. 후(後)와 유(柔)의 검공, 후발선제(後發先制)와 사량발천근(四量發千斤)에 특화된 무당파의 무공이었다.

‘음.’

옥청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럴듯하게만 보일 뿐, 실전에서 써먹기는 힘들겠어.’

기(氣)를 읽는 사람의 눈에는 대단해 보일 법했지만, 정작 시전자인 옥청에게는 실망스러운 일검이었다.

만약 옥청이 멸사군에 들지 않고 여전히 산중 수련에 힘썼다면 그 역시 흡족해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실전을 알아 버린 옥청에게, 지금의 검격은 겉보기에만 그럴싸할 뿐 실용성은 없었다.

‘무당의 검은 속세의 검법과는 궤를 달리한다. 본산의 검은 철저히 도(道)를 깨닫기 위한 도구로서 발전했어. 검의(劍意)에 관해서야 중원 어떤 검법보다도 신묘하지만, 정작 실전에 써먹기가 힘들다.’

그것은 무당의 검법이 잘못되었단 뜻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깨달음의 문제다. 고급의 무공은 하나같이 그런 면이 있지만, 특히 무당의 무공은 깨달음과 마음가짐에 따라 검력(劍力)이 달라진다.

적당히 배웠다고 개나 소나 써먹을 수 있을 만한 무공이 아니다. 다만, 뛰어난 정종 무공답게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진입하면 그 깨달음으로 구현되는 힘이 실전을 압도한다.

무당파의 어른들, 장로급 이상의 고수들이 보여 주는 무공이 천하를 위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이미 무당 무공에 정통한지라, 따로 실전을 겪지 않아도 험난한 강호 활동에 별문제가 없었다.

‘나는 아니지.’

옥청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어쩌면 사부님께서도 내가 장로 사형들과 같은 길을 가기를 바라셨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 길을 걷지 않겠다.’

이제야 옥청은 알 수 있었다. 스승님, 무당파 최강의 고수 탁무자가 자신더러 무신(武神)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말한 이유를.

그것은 옥청의 심성과 골격이 무당 무공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멸사군에 들지 않고 그대로 수련을 이어 갔다면 옥청은 몇 년 내로 무당의 모든 무공을 실전에 구현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승의 염원과 옥청의 눈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나는 신선이 되고 싶지 않다. 이왕지사 세상에 태어났으니, 천하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걸 경험해 보고 싶어.’

몇 년간 수련이 제자리를 맴돌았던 데에는 그러한 욕망도 한몫했다.

스승의 기대, 사형제들의 토닥임, 사질들의 부러움, 옥청 자신의 바람 등 많은 요소가 그의 성취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야 살아 있음을 느낀다.’

멸사군에 들어가 악인들과 싸웠다.

말이 악인과의 쟁투지, 결국엔 피를 보는 일이다. 옥청은 아직도 피를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과 검을 마주했을 때는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하나를 깨달은 것만으로도 옥청의 무공은 날개를 단 듯 성장했다.

“후우.”

옥청이 입맛을 다셨다.

“하나 도문의 제자로서 항상 살검(殺劍)만을 떠올리다니, 이 또한 옳은 길은 아니지.”

근래 군병들과의 훈련이 끝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홀로 무당의 선검(仙劍)을 휘둘렀다. 무당의 제자로서, 마음이 혼탁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살검을 오래 쥐긴 한 모양이었다. 선검을 수련하면서도 어느새 실전검(實戰劍)의 묘리를 떠올리고 있는 걸 보면.

“반성해야지.”

그렇게 옥청이 납검하고 거처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응?’

옥청이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 날카롭고도 묵직한 기도를 지닌 검사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 사람은……?’

예전에 한 번 연호정이 멸사군의 연무장에 데려온 적이 있는 청년이었다.

이름은 강량. 많이 거칠지만 상당한 기도를 품고 있던 청년 고수였다.

잠시 후, 강량이 옥청의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강량의 인사에 옥청 역시 인사로 답했다.

“예. 한데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이곳까지……?”

“밤이 늦었지만, 도우(道友)께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제게요?”

강량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혹, 비검(比劍)이 가능하겠습니까?”

옥청의 눈이 커졌다.

“저와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어째서 저와……?”

연호정이 강량을 많이 아끼는 것을 안다. 사석에서는 형, 동생 하는 사이라고 들었다.

검에 성취가 없다면 연호정에게 부탁하면 될 것을, 왜 뜬금없이 자신을 찾아왔을까?

강량이 흐릿하게 웃었다.

“여러 사람과 검을 나눠 보고 싶습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옥청 역시 미소를 지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단단한 의지로 가득한 그의 두 눈은 그의 심혼(心魂)이 누구 못지않게 강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옥청이 포권을 취했다.

“서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차아앙!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뽑았다.

신중하게 강량을 바라보던 옥청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강 소협.”

“예?”

“뜬금없지만,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요새 군장님께서 많이 바쁘신지요? 근래 도통 얼굴을 비추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강량의 기도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면 옥청이라고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강량이 부족한 것이리라.

하지만 강량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함은 그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강량이 웃으며 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맹의 평화를 위해서 불철주야 애쓰고 계십니다.”

“맹의 평화를 위해서라…….”

“하면,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

“아! 죄송합니다. 시작하시지요.”

파아아악!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동시에 뛰어들었다.

* * *

기우희의 눈이 깊어졌다.

스르륵.

묵비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연 군장님은요?”

“따라붙었어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코자 제가 왔어요. 의원님은 제가 지켜 드릴 겁니다.”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든든하네요.”

묵비가 홍련궁을 내려놓고는 사방을 주시했다. 창 하나 빼고는 사방이 막힌 방이지만,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는 곳을 훑었다.

기우희는 그녀가 이렇게 날을 바짝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감각이라면 어떤 암살자라도 잡아낼 수 있음을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한데 묵 부장님.”

“네, 말씀하세요.”

대답을 하면서도 묵비는 눈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묵 부장님께서는 삼교(三敎)에 관해 잘 아시나요?”

“전혀요.”

“그렇군요.”

“왜 그러시나요?”

“아니에요. 그냥 의아해서요.”

“어떤 부분이요?”

“중원인이라면 삼교에 대해 모르는 게 정상이잖아요? 묵 부장님처럼요.”

“그렇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들과 접선한 극소수가 아니고서야 알 길이 없죠.”

“한데 연 군장님께서는 삼교에 대해 무척이나 잘 알고 계셔서요.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도 더 많이 아시는 것 같아요.”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양에 대해 잘 아는 건 같은 양이 아니라 늑대라는 말이 있지요.”

“사냥꾼이라서 잘 안다는 말인가요?”

“그냥 그렇다는 말이에요. 제아무리 사냥꾼이라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냥감에 대해 뭘 알 수 있겠어요?”

묵비는 연호정의 회귀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다. 믿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얘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 화자는 자신이 아니어야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우희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묵 부장님께선 연 군장님을 정말 깊게 신뢰하시는군요.”

“물론이죠.”

“사연이 있을까요?”

그 기나긴 사연을 어찌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묵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같이 다니면 재미있잖아요. 아마 이번에도 꽤 달콤살벌할 거예요.”

기우희의 미소가 조금은 씁쓸해졌다.

“그렇군요.”

“근데 가짜 정보로 어떤 걸 건네셨나요? 연 공자가 말 안 해 주더라고요.”

기우희가 눈을 크게 떴다.

“못 들으셨어요?”

“네.”

“어머…….”

“왜요? 뭔가 문제가 될 만한 정보인가요?”

“아, 아뇨. 문제가 될 만한 정보라고 하기에는…… 무, 물론 어떤 면에서는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요.”

묵비의 시선이 처음으로 기우희에게 향했다.

기우희가 말해도 되나 싶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름 아닌, 연 군장님에 대한 정보였어요.”

“……!!”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여기로군.’

연락책의 거처는 바로 무림맹 외성의 소강단(紹康團)이었다.

소강단은 외부에서 들여온 식자재를 관리하는 장소였다. 무림맹의 내외성 전부를 관장하는 식자재 창고이니만큼, 그 크기가 대단히 컸다.

‘대단한 후각일세그려.’

각종 식재료를 보관, 관리하는 곳이니만큼 건조된 식자재의 냄새가 꽤 강하다.

그런 곳에 거하면서 내성에서 풍기는 추종향을 맡는단다. 제아무리 훈련을 받았다지만 믿을 수 없는 후각이었다. 거리와 환경을 생각하면 개코보다도 뛰어난 셈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의심을 덜 받을 수 있지.’

만에 하나 기우희의 세작 행위가 발각되면, 그녀는 어떤 식으로 정보를 전달했는지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때 추종향을 사용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일단 소강단에선 의심의 눈을 거둘 것이다. 연락책으로서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일터라 할 수 있겠다.

스르륵.

연호정이 나무 위에 은신했다.

잠시 후.

푸드득.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연호정의 안광이 번뜩였다.

‘아니군.’

처음에는 전서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안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연호정의 눈이 포착한 새의 발목에는 아무것도 묶여 있지 않았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먼저 날린 것이군.’

과연 연호정의 판단은 옳았다.

반 시진 후, 연락책의 거처에서 또 한 마리의 새가 날아올랐다.

파라락!

날갯소리는 이전보다 작은데, 빠르기는 더 빨랐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저거다.’

파아악!

연호정이 단숨에 새의 뒤를 쫓았다.

새의 속도는 빨랐다. 작정하고 잡으려면 못 잡을 것도 없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외성을 빠져나가야 하는지라 혈익휘천이나 천종운행비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후우웅!

그럼에도 연호정의 신법은 빠르고 은밀했다.

연가신단을 형성하며 내력의 밀도가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상태였다. 손톱만큼의 내력으로 십 리를 단숨에 주파할 수 있는 것이다.

더하여 속도 역시 한층 빨라졌다. 새를 앞지를 순 없지만, 바짝 뒤쫓는 것 정도는 거뜬했다.

후웅.

흑의를 뒤집어쓴 연호정의 몸이 아무도 모르게 외성의 성벽을 넘어갔다.

엄청난 높이의 성벽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넘어간다. 몸놀림과 진기 운용이 신기(神技)에 달해 있었다.

파아악!

외성을 넘어간 이후 연호정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꽤 폭발적인 움직임이지만, 연가신단을 형성한 이후로 지구력 역시 대폭 늘었다.

탄력, 폭발력, 지구력 모든 것이 향상되었다. 연호정은 자신을 갖고 새를 뒤쫓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

비로소 새가 서서히 하강하는 게 보였다.

조금씩 하강하던 새가 마침내 모습을 감춘 곳은 민가에서 조금 떨어진 산골의 어느 모옥이었다.

연호정이 하얗게 웃었다.

후욱!

그의 신형이 단숨에 모옥 근처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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