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15화 (315/963)

315화. 수레바퀴가 굴러가다 (3)

“어떠하냐?”

“아주 좋습니다.”

“허허, 마음에 들었다니 되었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공공대사의 앞에는 덩치가 큰 삼십 대 중반의 승려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공공대사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일나한(一羅漢)직을 스스로 걷어차고 면벽에 든 지 오 년.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했구나. 차기 나한당주(羅漢堂主)로서 부족함이 없다.”

승려, 범오(梵悟)가 고개를 저었다.

“나한당주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한결같이 무용을 겨룰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공공대사가 혀를 찼다.

“불도(佛道)는 문무(文武)를 가리지 않는 법이라, 그간의 수련으로 네 마음에 깃든 호승심이 잠잠해질까 싶었거늘, 어째 면벽에 들기 전보다 더 심해진 듯하다.”

“하하.”

범오가 미소를 지었다.

“불도에 몸을 던졌으니, 언젠가 저의 이 호승심도 부처님의 자비 아래 온건해질 날이 오겠지요.”

“쯧, 당치도 않은 소리. 불도에 기대기 전에 그 뻘건 마음부터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지요. 자각하고는 있습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사형의 맥(脈)을 이었으니, 너의 그 거친 성정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다만 다툼은 언제나 화(禍)를 부르는 법. 어련히 알아서 할 테지만, 언제나 고개를 낮추고 고통받는 중생들의 삶을 먼저 보려 애써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소림은 무림의 태양으로 명성을 날린 후, 무수히 많은 분쟁에 몸을 던졌다.

그것은 소림사가 속세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분쟁 대부분이 악을 징치하기 위함이었으며, 그래서 소림의 이름이 천년을 이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시련의 세월은 소림에도 큰 변화를 낳았다.

소림이 세상에 발을 걸친 이상, 속세의 분란을 해결할 만한 무(武)가 필수적이다. 부처의 가르침 운운하며 외적의 침공과 악의 교화를 포기하면, 더 많은 중생이 고통을 받게 될 테니까.

소림 무공의 상징, 나한당(羅漢堂)이 탄생한 이유였다. 그리고 나한당주란 곧 소림의 무(武)를 대변하는 무승이었다.

물론 실제 무공이 나한당주보다도 강한 무승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나한당주란 직책이 대단한 것은, 바로 소림의 의지를 대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범오는 무재(武才)를 타고나 동문은 물론 사형들의 경지마저 아득히 추월하였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소림의 무공은 단순한 재능을 넘어, 불도(佛道)에 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범오는 단순한 무골(武骨)이 아니었다. 뛰어난 오성과 불법에 관한 깊은 이해로 소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 차기 방장이 될 인재로 내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내려 주지 않는 법.

범오는 소림 무공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지만, 승부욕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 불같은 호승심은 나이가 들어도 줄지를 않아, 결국 차기 방장 이전에 나한당부터 맡겨 보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오 년의 면벽을 끝내고 나온 지금.

범오는 나한당주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력을 쌓았으나, 아직도 그 불같은 호승심을 버리지 못했다.

“호승심이라는 것이 다스린다고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겠지. 네 무재야 말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만, 세상에는 너에 필적하는, 혹은 그 이상을 넘보는 재능도 많다.”

범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까?”

공공대사는 그 웃음만 보고도 범오가 자신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공공대사가 혀를 찼다.

“호승심이야 무공을 익혔다면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마음. 그러나 오만은 다른 법이지. 어쩌면 네 오 년간의 면벽이 성공이 아니라 실패였는지도 모르겠구나.”

범오의 표정이 돌변했다.

불도는 이해해도 불심은 옅다며 언제나 타박하던 방장 사숙이지만, 이런 식의 꾸지람은 들은 적이 없었다.

범오가 고개를 숙였다.

“사질이 불민하였습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적어도 솔직함만큼은 누구 못지않은 범오였다. 공공대사는 범오의 사죄에서 진심을 읽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승심을 잠재워 줄 상대는 천지에 많도다. 그러나 오만을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 유념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방장 사숙.”

“오냐.”

그렇게 두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길 한참.

“호오.”

범오의 눈빛도 변했다.

“이 기운은……?”

공공대사가 입맛을 다셨다.

“거리낄 것 없이 기파를 발산하는구나. 내 그 사람의 성정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참으로 거침이 없다.”

“누구입니까?”

“느껴지지 않느냐? 이 순도 깊은 날카로움 속에 깃든 숨 막히는 독기(毒氣)가?”

“하면……?!”

“그래. 사천당가의 주인께서 내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공공대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것 참 묘한 조합이로고. 당가의 수장과 멸사의 수장이 함께라니?”

“예?”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안 본 새에 무공이 또 성장한 모양이야. 참으로 대단하다. 연가주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겠어.”

“연가주라 하심은?”

“강동제일가, 벽산연가의 가주 판관대협을 말함이다. 그이의 큰아들이 당가주와 함께 오고 있다.”

범오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당가주 홀로 오는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심지어 당가주보다 먼저 오고 있구나.”

범오는 충격을 받았다.

제아무리 당관의 기도가 강렬하다지만, 그보다 앞선 다른 이의 기도를 읽지 못한 것이 충격이었다.

‘연가주의 큰아들?’

하물며 방장 사숙의 말씀을 들어 보니,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듯싶었다. 연가주의 나이가 오십이 되지 않았으니, 큰아들이라고 해 봤자 많아야 서른 언저리일 것이다.

‘한데 어찌?!’

소림의 무공은 절대적이다. 당대 성천십삼좌 중 검선(劍仙)과 더불어 가장 천하제일에 가깝다는 권신(拳神) 무허대사의 사문이 바로 소림이었다.

비록 태사백인 무허대사는 물론 사숙인 공공대사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하는 무공이지만, 그래도 소림의 정통 무공을 익혀 나름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데도 몰랐다. 기도가 전혀 읽히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잠시 후.

“방장 대사님. 당가의 가주님과 멸사군장이 뵙기를 청합니다. 어찌할까요?”

“안으로 모시게.”

“알겠습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당관과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공대사가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허허, 어서들 오시오.”

당관이 짧게 포권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왔소.”

천하의 당관이라도 공공대사 앞에선 나름의 격식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소림이라서가 아니었다. 비록 이런저런 일로 부딪쳤지만, 공공대사는 ‘진짜’였다. 맹 내 여러 인사 중 당관이 제대로 존중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연호정 역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대사님.”

“오랜만에 보는구먼, 연 군장.”

“그렇군요.”

공공대사의 얼굴에 진심 어린 감탄이 묻어 나왔다.

“대체 자네는 사람을 얼마나 놀라게 할 셈인가?”

“예?”

“예전 탕마멸사의 합군 출정 전에 손속을 나누어 봤더랬지. 그때 자네가 보여 주었던 무공 역시 지극히 뛰어난 것이었네. 한데 지금 보니, 그때보다 훨씬 더 발전했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닐세. 반년이나 됨 직한 시간에 그리 발전했다면, 정녕 자네의 재능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로고.”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작은 깨달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도움도 컸지요.”

“허허, 내가 아는 자네는 천성이 강하고 거침이 없다네. 한데도 자만하지 않는구먼. 만족을 모르는 그 성정만큼이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자세. 천하 모든 무림인의 귀감일세.”

공공대사는 필요 이상으로 연호정을 치켜세워 주었다. 바로 옆에 있는 범오가 듣고 깨닫는 바가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괜히 말이 많았소이다. 일단 앉으시오.”

“알겠소.”

당관과 연호정이 공공대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방으로 들어왔음에도 두 사람은 범오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상당한 강자라는 건 알았지만, 계속 신경을 쓸 만큼 비범한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범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두 사람의 기도를 읽고 충격을 받은 그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이 두 사람이 진정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가사 자락에 가려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공공대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어쩐 일로 두 분께서 이 땡중의 거처에 기별 도 없이 찾아오셨소이까?”

당관이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이 당돌한 놈이 나더러 대사의 거처에 함께 가자고 하더이다.”

“허어?”

“이유를 물었더니 도착해서 알려 준다고 했소. 나도 이놈이 왜 대사를 찾아왔는지 잘 모르겠소.”

공공대사가 연호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 군장?”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대사님.”

“말씀하시게.”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그러시게.”

“올해 치러지는 맹주 선거, 불참하실 겁니까?”

당관은 물론 범오도 깜짝 놀랐다.

공공대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민감한 주제를 꺼내는구먼. 과연 자네답다고 해야 할까.”

“예고도 없이 실례되는 말을 여쭈어 송구할 뿐입니다.”

“허허허.”

공공대사가 수염을 쓸었다. 금강석(金剛石)과 같은 평정심의 소유자라는 그였지만, 연호정의 질문은 함부로 답하기 힘들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대답에 앞서, 나 역시 하나 묻겠네.”

“예.”

“선거 후보로 나선 봉공이 셋이라는 걸 들어서 알고 있네. 물론 군사는 그 후보들의 신상 명세를 말해 주진 않았네만.”

“공정한 일 처리로군요.”

“하지만 예측은 가능하네. 마지막 한 명은 긴가민가하네만.”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공공대사가 당관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당가주의 뒤를 봐주는 것인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후원자는 아닙니다만, 어쩌다 보니 저 또한 시류에 편승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당관이 선거의 후보로 나선다는 것. 그리고 당관의 후원자는 아니지만, 연호정이 후원자나 다름없이 움직이리라는 것.

공공대사가 눈을 감았다.

“그렇구먼. 연가주께서 당가주의 후원자가 되셨구먼.”

“대사님의 혜안은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허허, 혜안은 무슨.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누구라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

“저 또한 대사님의 말씀을 듣고 알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그분이 대사님은 아니시로군요.”

“허허허.”

정말이지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 아닌가.

공공대사는 시종일관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래, 연가주께서 당가주를 후원한다는 사실은 알았네. 기실, 그거야 선거 시작의 종이 울리면 다들 알게 될 테니, 미리 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요.”

“해서, 자네는 내가 선거에 참여하는지 그 여부를 묻고자 함인가?”

“그렇습니다.”

“그럴 생각은 없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한데 그것은 어찌 물으시는가?”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당가주님을 부맹주(副盟主)로 세우는 데에 도움 좀 받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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