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수레바퀴가 굴러가다 (2)
“흐음.”
차를 마시며 수십 장의 문서를 확인하던 모용군이 입을 연 것은 무려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역시 잘 흘러가고 있구먼. 다만 이번 선거를 생각하면 이제 제동을 걸어야 할지, 계속 진행해도 될지가 고민인데.”
모용군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모용우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무려 반 시진 동안이나 그리 서 있었음에도, 모용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무엇이 말입니까?”
“이 문서에 적힌 사항 말이다.”
“저는 아직 그 문서들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모릅니다.”
모용군이 혀를 찼다.
“그럴 것이다. 내가 네게 보여 준 적이 없으니. 이 문서들은 모두 연화가 가져온 것, 즉 묵룡부에서 보내온 것이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녀석이, 연화와 함께 온 수행원을 쫓아 버린 것이냐?
모용군의 흔치 않은 질책이었다.
기실, 상대가 다른 이였다면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 대상이 모용우이기에, 나름의 생각이 있을까 싶어 바로 혼을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치솟는 화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반 시진 동안 모용우를 세워 놓고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여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그쪽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그쪽 사람을 네 마음대로 쫓아 버렸어.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말이다.”
“그랬습니다.”
“이유가 있더냐?”
“설마하니, 제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겠습니까?”
모용군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화가 난 걸 떠나서, 천성이 착하고 순한 이 동생의 돌발 행동은 그에게도 놀라움이요, 의아함이었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게냐? 내,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꾸나.”
“위험하니까요.”
“위험하다니?”
모용우가 모용군을 직시했다.
순간 모용군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가 저런 눈을 할 줄도 알았던가.’
모용우의 눈빛은 지극히 차가웠다. 동시에 정체 모를 분노를 담고 있었는데, 그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형님.”
“말해 보거라.”
“형님께서 스스로를 되돌아보셨다고 말씀하신 게 하루 전입니다. 하여 지금에야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
“상황을 제대로 보십시오.”
예상치 못한 일격에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상황을 제대로 보라?”
“그렇습니다.”
“설명하거라.”
“연 군장이 이미 형님께서 묵룡부와 손을 잡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쪽 인물을 맹으로 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물론 위험한 일임을 안다. 하나, 내 그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면 네가 이 형을 지나치게 허술하게 본 것이다.”
“그래도 틀렸습니다.”
“왜냐?”
“만에 하나, 연화가 내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곳에 있었던 인물이 제가 아니라 연 군장이었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순간 모용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 그 녀석의 동선과 위치는 대강 알아 두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들어오라 한 것이다.”
“제갈 군사는 어떻습니까? 연가주는요? 당가주는 또 어쩔 것이며, 그 외에 무수히 많은 사람의 눈은 또 어쩔 것입니까?”
“…….”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보여 주는 대범함은 회심의 한 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범함에 익숙해져 사소한 것을 등한시하다간, 결정적인 순간에 진창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모용군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한 모든 대응책을 준비해 두었다. 다시 말한다. 나는 ‘모든’ 대응책을 준비했다. 그런 것도 없이 묵룡의 사람을 들일 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니니라.”
“그 또한 문제입니다. 대체 왜 무리한 일을 감행하시는 겁니까?”
“……!”
“대비가 필요할 만한 상황 자체를 만들지 마십시오. 때를 기다려야 할 순간에는 철저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한 번씩 자초하는 위험으로, 적군은 날카로운 비수를 한 자루씩 모아 두고 있습니다.”
모용군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모용우가 말을 이었다.
“묵룡과 손을 잡았다? 하면 묵룡와 동등한 관계로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
“어차피 묵룡은 이쪽 상황을 정보로만 접할 뿐 체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래를 주도하는 것은 철저하게 형님이 되어야 합니다. 굳이 저쪽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론입니다. 거래 관계에서 한쪽의 힘이 도를 넘어서면, 거래가 아니라 강탈이 됩니다. 그러나 적당한 선에서의 주도는 최대 이득과 최소 손해를 동시에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모용우가 눈에 힘을 주었다.
“제가 지금껏 형님의 일에 제대로 나서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주십시오. 형님은 제가 나설 필요도 없이 모든 일을 최선의 방향으로 처리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네 눈에는 그리 보였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허!”
모용군이 탄식을 토해 냈다.
기가 찼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용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콱콱 박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다.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지.”
“또한 연화를 계속 끌고 가실 거라면, 연화의 교육부터 다시 하셔야 할 것입니다.”
무서운 발언이었다.
평범한 집안을 생각하면, 이건 선을 넘었다고 봐도 무방할 발언이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보기에, 연화가 많이 부족하더냐?”
“좋은 철도 제대로 가공하지 않으면 몽둥이밖에 못 됩니다. 연화가 그렇습니다. 연화는 좋은 재능을 타고났지만, 경험과 인내가 부족하여 그 재능의 절반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으음.”
“적아를 통틀어, 형님 주변에는 대단한 인재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형님 눈에도 연화의 실수들이 마뜩잖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연화만 한 재목을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버리기는 아깝다?”
“그렇습니다. 버리기 아까운 재능이지요.”
한술 더 뜨는 모용군의 말을 모용우는 냉큼 받았다.
“끌고 갈 생각이시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모용군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끌고 갈 생각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모용우의 눈빛 역시 모용군의 그것과 비슷해졌다.
“제대로 써먹고 내치십시오.”
“……허허.”
모용군이 혀를 내둘렀다.
“내 오늘 너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는구나.”
모용우를 향했던 화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그는 모용우의 독한 말에 깜짝 놀랐다.
‘진심인가?’
혹시나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건 분명 진심이었다.
애초에 진심도 아닌 말을 입에 담을 동생이 아니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허어, 천성이 선하다 한들 그 혈관에 녹아든 피는 분명 모용의 역사이니.’
결정적인 순간에 증명하는 모용씨의 냉혹함.
그 냉혹함은 동생에게도 이어졌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모용군은 진한 안도감과 더불어 깊은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모용군은 짐짓 냉정하게 말했다.
“제아무리 이유가 분명했다 한들,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묵룡의 사람을 내친 것은 너의 실수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 실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구나. 형제지간을 떠나, 가주와 가문의 소속원으로서 벌을 내려야 마땅할 듯싶다.”
모용우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법이 바로 서야 가내가 평안한 법입니다. 전시(戰時)가 아닌 이상, 형평에 예외를 두지 마십시오.”
이건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발언이었다.
모용군은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했다.
“네가 정녕 오늘 나를 놀라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다만, 형님께서도 잊지 마십시오.”
모용우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 거센 안광에 모용군조차도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께서는 최고가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형님께서 비상하시는 순간, 저는 본가를 뿌리부터 뜯어고칠 것입니다.”
“…….”
“아직 시간은 많습니다. 급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지요.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저라는 인재가 알아서 굴러와 꽃피워진 우애인 만큼, 저 역시 목적을 잊은 형님께 이전과 같은 우애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
“거처로 가서 자숙하겠습니다. 형벌의 수위가 확정되면 말씀해 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모용우가 방문으로 향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모용군이 툭 던지듯 말했다.
“너를 향한 이 우형의 우애가, 단순한 사적 애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뒤를 돌아본 모용우가 쓰게 웃었다.
“형님께선 나이 삼십 먹고 내린 이 막내의 선택이, 단순한 혈육지정 때문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
“쉬십시오.”
쿵.
모용우가 방을 나갔다.
물끄러미 닫힌 문을 보던 모용군이 쓴웃음을 터트렸다.
“마냥 어린 줄로만 알았던 녀석이, 어느새 송곳니를 이리 날카롭게 세워 두고 있었던가.”
놀라웠다. 감탄스럽기도 했다.
한편으론 안쓰러웠고, 동시에 반가웠다.
‘우의 눈에는 아무런 서운함이 없었다. 묵룡에 관한 건, 그리고 연화에 관한 건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었어. 말 그대로 나의 실수와 오판에 실망한 것이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모용군이 일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정말이지 바보 같은 삶을 살지 않았던가! 곁에 있는 칼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거늘 남의 명검을 탐하고 있었으니, 내 눈도 옹이구멍이 아니었는가 말이야.”
스스로에 대한 강한 실망이 들었다.
동시에, 너무나도 기쁘고 뿌듯했다.
모용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모용우가 탕마군의 거처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야. 이제야 내 너를 사심 없이 믿을 수 있을 것 같구나.”
꽉 껴서 불편하던 옷이 이제야 딱 맞게 된 기분이었다.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가주님.”
“연화는 어디에 있느냐?”
“거처에 있습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를 불러라. 내 오늘 그 녀석을 따끔하게 혼내 줘야겠다.”
모용연화는 모용우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릇을 재단할 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던 딸년의 안목을 제대로 키워야 할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시작할 테니,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길도 머지않았을 것이다.
* * *
“이것 참.”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내 거처가 이리 헤퍼졌을꼬.”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건물이 헤퍼질 수 있겠습니까. 헤퍼졌다면 아마 가주님의 마음이 헤퍼지신 것이겠지요.”
“네놈의 그 세 치 혀는 여전하구나.”
“이 독한 혀와 주먹 덕분에 가주님의 위상이 올라갈 수도 있잖습니까?”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미움을 사다 보니, 이제 면역이 생겨서 말입니다.”
“시끄럽다. 찾아온 이유나 말해라.”
“어? 차 한 잔 안 내주십니까?”
“네 애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품격으로 차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해라.”
“하하,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와 같이 가실 곳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요.”
“어딜 말이냐?”
“공공대사님의 거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