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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13화 (313/963)

313화. 수레바퀴가 굴러가다 (1)

“자, 이것을 받으시오.”

제갈문호가 건네준 문서와 명패를 받은 기우희의 눈이 깊어졌다.

“이것은……?”

“건물과 현판, 중원 북부에서 나는 약재들 대부분이 구비되어 있소이다. 각 분야에 정통한 의생들의 수는 총 이백오십으로, 기반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오.”

“…….”

“무림맹 산하 의방의 명칭은 의선각(醫仙閣). 신녀께서는 앞으로 의선각주로 불리실 게요.”

기우희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저를 어여삐 봐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나, 제게는 이 많은 의생을 다스릴 수 있을 정도의 경륜이 모자란 것이 사실입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신녀의 경륜에 의문을 표하지 않소.”

“군사님.”

“칼질이 멋들어진다 한들 적과 맞서 싸우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고, 성현의 말씀을 익혔다 한들 삶에 녹여 내지 못하면 그 또한 무용지물이외다.”

“…….”

“신녀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오. 그리고 그 뛰어난 의술이 널리 알려진 것은, 신녀께서 오랜 세월 환자들을 돌본 덕분이외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신녀께서는 의생들의 좌장이 되실 역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굉장한 칭찬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우희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보던 제갈문호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녀께서 그리 주저하는 까닭은 성품이 순후하기 때문이오? 아니면 진실로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다 생각하기 때문이오?”

“저는…….”

“그도 아니면.”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광신삼교, 그중 신화교의 사람이었던 과거 때문이오?”

순간 기우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연 군장의 말이 맞았군.”

“……알고 계셨군요.”

“물론이오. 나는 무림맹의 군사외다. 어느 정도의 인사권도 가진 만큼, 인선에 있어 그 사람의 자세한 신상 내력을 파악해 두는 것은 기본이오. 연 군장 역시 그것을 알고 있소. 게다가 잠영일호라는 이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면, 오히려 연 군장이 위험할 뻔했소이다.”

떨리는 눈으로 제갈문호를 보던 기우희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상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을 의선각주로 세우겠단다. 당장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확실히.’

보통 사람이라면 잔뜩 겁에 질려 덜덜 떨기 바빴을 것이다.

한데도 기우희는 빠르게 마음을 다스렸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게 아니라, 상대가 자신을 해칠 마음이 없다는 걸 꿰뚫어 봤기 때문이었다.

‘천성이 선하고 순박하다. 하지만 정신이 유약하지는 않아. 지혜롭기도 하고.’

제갈문호는 연호정에게 기우희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물론 본인이 아니고서야 그간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듣는 것만으로도, 기우희가 지독스럽게 고뇌 가득한 삶을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우희가 물었다.

“그런데도 저를 의선각의 각주로 세우시려는 건가요?”

“그렇소.”

“…….”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오. 신녀의 실력과는 별개로, 난 아직 그대라는 사람을 믿지 않소. 그럼에도 그대를 의선각주로 밀어붙이는 것은, 그만큼 연 군장을 신뢰하기 때문이외다.”

벽산호장 연호정.

기우희는 생각했다. 참으로 무서우면서도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연호정의 나이는 자신보다도 어렸다. 그 어린 나이에 무림맹 최고 실권자 중 하나인 군사에게 이 정도 신뢰를 받는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비록 조직의 생리에 정통하진 못했지만, 신화교의 조직 체계를 어느 정도 접한 그녀는 나이 어린 후기지수에게 이 정도 신뢰를 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단순히 능력이 뛰어나서만은 아니겠지.’

능력은 기본이고, 사람에게 신뢰를 줄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 신뢰를 쌓기란, 인간 본연의 매력과 연배를 뛰어넘는 우애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리라.

“또한, 그대가 높은 자리에 앉아야 우리 쪽에서도 감시하기가 한결 수월하지 않겠소?”

“……그렇군요.”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아직 그대를 믿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무상으로 의술을 베푼 그대의 마음만은 진심이라 믿소. 그대가 진정 신화교와 절연하고 중원을 위해 한 몸 불사른다면, 언제고 나의 이 의심도 봄날의 햇살 아래 눈처럼 녹아 없어질지도 모르겠소.”

기우희가 쓰게 웃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요.”

“음?”

“같은 소속의 협객이라도 마지막까지 의심하는 것. 그것이 천하 모든 군사의 기본 소양 아닐까요.”

제갈문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한 방 먹었소이다.”

기우희가 결심 어린 목소리로 한마디를 뱉었다.

“제 과거를 아신다니,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오.”

“저는 중원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런 죄 없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움직이려 노력할 것입니다.”

“음.”

“신화교가 도리를 벗어나면 신화교를 적대할 것이고, 무림맹이 도리를 벗어나면 의선각주의 직책을 벗고 천하로 나가 무림맹을 성토할 것입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하오. 아니, 반드시 그래 주길 바라오. 그것이 바로 우리 백도 무림의 제일 가치, 의(義)와 협(俠)이기 때문이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선각은 닷새 뒤에 정식으로 개문하오. 그때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제갈문호는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기우희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풀려 가는구나.”

아직 찬바람이 매서웠다. 하지만 하늘은 맑고 고왔다.

기우희가 눈을 감았다.

차갑고도 맑은 바람에, 잠깐이지만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상쾌해졌다.

* * *

모용연화는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녀 역시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모용우가 아버지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그것은 분명 진심일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안목을 믿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악연을 잊고, 다시 새로운 관계를 쌓아 가야 함이 마땅했다.

모용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렇구나.”

“조금 전의 반응은 잊어버리세요. 아버지와 함께하신다는 말씀 들었어요. 그렇다면 저 역시 과거의 일은 잊어야겠지요.”

모용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어쩐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더더욱 불길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것 참 재미있는 말이구나. 용서를 해도 내가 하고, 잊어도 내가 잊어야 할 터인데.”

모용연화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눈빛은 다소 싸늘해졌지만.

“글쎄요. 지금 와서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져 보는 것은 우스운 일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함께 나아갈 동지가 되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어요.”

기가 차는 말이었다. 애초에 정상적인 숙질지간은 아니라지만, 확실히 그녀의 말투는 지나치게 딱딱한 감이 있었다.

물론 모용연화 딴에는 상당히 인내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직 아버지도 뵙지 못했는데, 굳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로구나. 대의를 위해 과거의 사소한 갈등 따위는 잊는 것이 좋겠지.”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하면 어디 공적인 대화를 시작해 볼까.”

모용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숙부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먼저 아버지부터 뵈어야겠어요.”

“형님을 뵙기 전에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먼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용우의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갔다.

“가벼운 검열이라고 생각하거라.”

모용연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검열이라고요?”

“물론이다.”

“……이건 좀 재미있네요. 제가 왜 숙부님께 검열을 받아야 하죠?”

“마땅히 그래야지. 형님의 최측근으로서, 네가 정녕 문제가 되지 않을 사람인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모용연화의 눈이 점점 가늘게 좁혀졌다.

“제가 숙부님께서 형님이라 부르는 분의 딸이라는 걸 잊으신 모양이지요?”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치기 어린 모습은 그쯤 보여 주거라. 증명할 수 없는 이유로 고집을 부리는 것, 아주 보기가 안 좋아.”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모용연화는 불쾌감을 떠나, 모용우의 그와 같은 발언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모용우는 이런 발언을 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싸늘하던 모용연화의 얼굴에 뚜렷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많이 망가지셨네요. 혈육이란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 설마하니 제가 아버지를 배신하기라도 할 것 같나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숙부님이 사는 세상에서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형님께서 사시는 세상도 그러하지. 형님은 가주가 되기 위해 형제지간을 파탄 냈어.”

“……!!”

모용연화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지금 그 말, 진심인가요?”

“진심이고 아니고를 떠나 사실이다. 그리고 본가는 그런 식으로 발전한 가문이라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지.”

“……숙부님의 그 발언, 아버지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궁금하군요.”

모용우가 흐릿하게 웃었다.

“당돌하다고 생각하시겠지.”

“고작 그뿐일까요?”

“그게 궁금하면 직접 일러바쳐 보도록 해라. 물론,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내성의 문을 넘을 수 없겠지만.”

모용연화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이쯤 하시죠.”

“아니, 지금부터 시작이다.”

“제가 어디서 오는 건지, 무슨 이유로 오는 건지 전부 들으셨을 텐데요?”

“혈육 운운하며 의심하지 말라 조잘거렸던 조금 전의 발언과 다른 게 무엇이지?”

“……!”

“걱정하지 말거라. 네 스스로 떳떳하다면, 지금이 이 대화는 모두 없는 것이 될 테니까.”

이제 모용연화의 눈빛은 완연한 분노로 이글거렸다.

“하면, 이 조카를 어떤 식으로 검열하시겠어요?”

“이렇게.”

푹!

모용연화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털썩!

그녀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목 아래에서부터 고관절까지, 순식간에 감각이 사라졌다. 극도로 섬세한 마혈로 딱 그 부위만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그간 모용연화 역시 나름의 성취가 있었지만, 모용우의 성장세는 그녀를 한참이나 초월해 있었다.

어느새 모용연화의 후방에 선 모용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후우우우웅.

“흐음.”

모용우가 금세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신상 확인은 완료되었다. 예전에 느꼈던 그 진기 그대로군.”

“……!”

“다만, 데리고 와서는 안 될 사람을 데리고 왔구나.”

“뭐, 뭐라고?!”

모용우가 수행원을 바라보았다.

수행원이 움찔했다. 모용우의 엄청난 움직임을 본 그 역시 깜짝 놀랐던 것이다.

수행원을 보던 모용우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자네는 내성으로 들어올 수 없네. 이만 돌아가게.”

“예, 예?!”

“돌아가라 하였네.”

수행원은 저도 모르게 모용연화를 바라보았다.

모용연화는 화가 나서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마혈을 풀고……!”

“시커먼 용(墨龍)이야 그럴 수 있다. 상황은 알아도 체감하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넌 그래선 안 되었어.”

“……?!”

“곧 다가올 선거로 맹의 분위기가 잔뜩 경직되어 있다. 이런 자를 들여보냈다간 일이 커질 수 있어. 네가 생각이 있었다면, 사전에 네 선에서 끊었어야 했다.”

“당장 이것부터 풀지 못해!”

모용우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넘겼다.

그가 수행원을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그쪽’에서 오신 분 같은데.”

“…….”

“내게 그 기세를 들킬 정도면 실력이야 안 봐도 뻔하군. 돌아가시게.”

수행원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 없소.”

“그래?”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군.”

퍼어어억!

모용연화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어느새 수행원이 혀를 빼물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린 것이다.

모용우가 손을 털었다.

“검열은 끝났다. 이자는 내가 처리할 테니, 이만 형님께 가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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