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반전 (6)
쾅!
묵직한 대검이 땅을 찍고 나서야 강량의 수련은 끝이 났다.
“헉헉.”
혼신의 힘을 다한 수련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강량의 표정은 어두웠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왜? 마음에 안 드나?”
“예? 아, 아닙니다.”
“뭐가 문제인데? 내가 봤을 때는 잘한 것 같다만.”
강량이 검을 뽑아 검집에 넣었다.
“딱히 문제라고 생각한 건 없습니다. 그저…… 제 자신에게 좀 실망해서요.”
“실망? 어떤 부분에서?”
강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무공이 금방금방 늘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극한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노력만으로 극한에 이를 수 있다면 천하에 고수 아닌 사람이 없겠지요.”
“맞는 말이야.”
“다만,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군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장단점을 아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아는 사람은 동일 노력 대비 발전도 빠른 법이지.”
“예. 하지만 제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예?”
“나라고 어디로 발을 디뎌야 할지를 매 순간 알았을 것 같나? 내 감히 장담하건대, 천하의 어떤 천재라도 그럴 순 없어.”
“…….”
“그럴 때는 어떤 방법을 쓰느냐? 그 또한 사람마다 다르지.”
강량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하면 그런 순간에, 형님은 어찌하셨습니까?”
“나?”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글쎄다.”
강량의 질문은 무공에 한정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들은 연호정은 무공을 넘어, 그간 자신이 걸어온 삶을 떠올렸다.
‘참으로 막막했지.’
경험을 쌓고 강함을 획득했다. 지옥보다도 더 지옥 같은 아수라장을 뚫고 정점에 오른 그의 눈에는 많은 것들이 쉬워 보였지만, 그만큼 상실한 것도 많았다.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렸는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어떤 신념을 갖고 나아갔는가.’
가장 막막했던 순간은 역시나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한 직후라고 할 수 있겠다.
천운(天運)이 닿아 스승님을 만날 수 있었고, 덕분에 한 사람의 무림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만약 그분과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연호정 역시 흔하디흔한 무림인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다만, 스승은 그의 시야를 열어 주었을 뿐 어느 길이 옳은 길인가를 말해 주진 않았다. 세상에는 이런 길도, 저런 방법도 많았다. 그것을 선택하는 일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그때, 연호정은 배울 수 있었다.
선택에 따른 책임은 오로지 스스로 질 수 있다는 걸. 누군가가 정해 준 길을 가게 되면, 정작 결과에 따라 책임도 선택하게 된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되면, 훗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 때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어진다는 걸.
언제나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라는 걸. 그런 면에서 삶이란 고독할 수 있다는 걸.
그렇기 때문에 고독에 익숙해져야 하며,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순간순간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걷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지. 더 막막한 것은, 잠깐은 쉴 수도 있고 오히려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리한다고 빛이 보이진 않는다는 거야.”
“…….”
“네게는 조언을 해 주는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사라진 지금, 네게 남은 것은 두 주먹과 검 한 자루뿐이야.”
“……그렇지요.”
다시 눈을 뜬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차근차근 가자. 내가 아버지께 네 수련을 중단해 달라고 말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단 한 번이라도 너 스스로 발전해 봐야 해.”
“…….”
“그나마 네게는 흑도제일검문의 무공이 함께하고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다만, 나는 네가 나와 함께 다니며 시야를 넓혔으면 싶다.”
“시야.”
“그렇다. 이유인즉, 무공이란 단지 몸을 힘들게 한다고 발전하는 편협한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야.”
연호정이 강량의 어깨를 두들겼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네게 말씀하셨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흉검을 휘두른다 하여 무공이 늘진 않는다고. 그것은 쉬라는 말이 아니다. 시야를 달리하라는 말이야.”
“그, 그렇군요.”
“오늘도 고생했다. 씻고 처소에 들어라. 마음이 적적하면 혼자 술이라도 한잔해. 고독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 그 정도 청승을 떨어 주는 맛도 있어야지.”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 스스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어떨 때 보면, 정말 형님과의 나이 차가 수십 년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냐?”
“예. 가끔은 정말 부러워요. 형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합니다.”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어른스러움을 동경하는 것 역시 젊음의 특권이지. 하지만 그 연배에 누릴 수 있는 것 또한 적지 않아. 누군가를 동경하기 이전에, 네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부터 파악하도록.”
“거봐요. 이런 부분이 어른스럽다는 겁니다.”
“이놈아. 벌써 축시(丑時)가 넘었다. 들어가서 쉬어라.”
강량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연습을 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강량이 거처로 돌아갔다.
연호정은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밝았다. 별빛도 많았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오히려 지금은 감상에 젖은 머리를 시원하게 식혀 주고 있었다.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탄식을 토해 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충분히 높게 올라왔음에도 어둠의 장막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법이지.”
연호정의 머릿속에 여러 단어가 떠올랐다.
선거, 삼교, 대비, 조정, 발전, 축출, 화합…….
참으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강량보다 더 막막한 것은 연호정일지도 몰랐다.
‘두 번, 세 번을 산다고 해서 삶이 쉬워지는 건 아니지. 오히려 보이는 게 많아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게 인생인지라.’
우웅.
그때, 연호정의 신단기(神丹氣)가 미세한 기척 하나를 잡아챘다.
은밀하게 다가오는 기척은 아니었다. 다만 그 기척의 주인이, 무공을 워낙 잘 연마한 터라 기운이 알아서 수렴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형님.’
잠시 후, 모용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처에 있지 않은 듯하여 근처를 서성였는데, 이곳에서 미세한 검기가 솟구치더군. 강 검사의 기운이었어. 혹 자네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싶어 와 봤거늘, 어느새 강 검사는 사라지고 자네만 남았군.”
“이 늦은 새벽에 또 어인 일로 찾아오셨나?”
모용우는 가만히 연호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르다.’
맑은 달빛을 받은 연호정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초탈해 보였다.
그 표정, 그 눈빛을 보자 오히려 복잡했던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다. 정체 모를 분노와 씁쓸함마저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모용우가 허리춤에서 호리병 하나를 빼 들었다.
“잔은 없네만, 달빛을 벗 삼아 한 모금씩 하겠는가?”
“풍류를 아는구만. 그래, 오랜만에 우리 형님이 주는 술 한잔 받아 보자고.”
“잔 없다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야, 이 딱딱한 양반아.”
“하하하.”
모용우의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청량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술을 나눠 마셨다.
술병을 반쯤 비웠을까?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
“섭섭하구만. 우형이 현제를 찾아오는데 꼭 별일이 있어야만 하는가?”
“참으로 좋은 말이다만, 그 눈가에 깃든 답답함부터 지우고 말하지?”
“하하, 그게 보이던가?”
“그러게나 말이야. 그래서 걱정이지. 너무 알기 쉽거든.”
웃으며 연호정을 보던 모용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형님께서 묵룡부와 손을 잡은 게 사실이었네.”
달빛이 주는 마력 덕분일까? 아니면 연호정의 낮고 여유로운 목소리 덕분일까?
모용우는 생각보다 훨씬 차분하게 모용군에 관한 얘기를 풀어낼 수 있었다.
“모용연화?”
“그렇다네.”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모용우의 얘기를 들으며, 그는 단박에 지난 사정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살 수 있었군.”
“음? 무슨 말씀이신가?”
“모용군 말이야. 내 예상대로라면 그 양반, 양천한테 죽거나 탈탈 털려야 정상이었거든. 하지만 그 양반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지.”
“……그랬지.”
“모용군은 이리 말했겠지. 무림맹주가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맹주가 되면 많은 도움을 주겠다.”
“물론 그랬겠지.”
“거래는 현금으로 하는 거지 어음으로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그건 양천도 알아. 하지만 양천은 그 거래에 응했다. 모용군이 주는 어음을, 양천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받아 줬겠어?”
모용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화를 인질로 보냈다는 뜻인가?”
“혹은 인질 겸 조력자겠지. 나아가, 교각 역할을 담당하게 했을 수도 있고.”
“…….”
“그러지 않고서야 양천이 모용군을 그리 쉽게 놔줄 이유가 없잖아.”
모용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후우.”
나직이 한숨을 쉰 모용우가 술 한 모금으로 답답함을 잠재웠다.
“그래, 형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혈육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모용군을 꽤나 냉정하게 볼 줄 아는데?”
“그래서 문제일세. 오늘 내가 형님께 드린 말씀은, 이성이 아닌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네.”
모용우가 고소를 지었다.
“자네와 함께하며 본가를 바로잡고 백도 무림의 평화에 이바지하겠다고 했는데, 이 정도에 흔들리는 걸 보면 나도 큰 그릇은 못 되는가 보이.”
“그게 정상이야.”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말했지? 형님은 정상의 길을 걸어. 비정상이 통용되는 세계는 내가 꽉 잡을 테니까.”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비정상의 세계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네만, 그런 수라도(修羅道)를 현제에게 떠맡기고 나 몰라라 하라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일세.”
“몰라선 안 되지.”
“무슨 말인가?”
연호정이 모용우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알아줘야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들어 주고, 품어 줘야지.”
“…….”
“그게 수장의 덕목이야. 정확히는, 백도 수장의 덕목이겠지만.”
“현제.”
“알아.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이 무척 심란하겠구만. 하지만 예상은 했잖아? 털어 버리기 힘들면, 그냥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아.”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모용우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형이랍시고 도움 하나 못 주는 얼간이로군.”
“능력이 없는 건 죄가 아니야. 중요한 건 나아가려는 의지를 갖고 있느냐, 못난 스스로를 바꾸려고 얼마나 노력할 수 있느냐겠지.”
“하하하.”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형님 얘기를 듣자 하니 이제 좀 쉬워지겠군.”
“음?”
“모용군 말이야. 모용연화를 털어 보면 이 싸움이 제법 쉽게 흘러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러지 말게.”
“엉?”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고 했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모용군은…….”
“그래, 형님은 악인일세. 하지만 자네에게는 형님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지 않나?”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모용우가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비정상의 세계를 꽉 잡겠다…… 그래, 자네가 그리하겠다는데 내 어찌 막겠는가? 하지만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적어도 정상의 세계는 내가 잡아 줘야지.”
“…….”
그대로 병을 비운 모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웃으며 연호정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현제를 보러 오길 잘했어. 별거 아닌 대화였지만, 깨달은 바가 컸네.”
“뭘 하려는 거야?”
“힘들고 벅찰 때가 오면 도움을 청하겠네. 하지만 그 전까지는, 현제도 현제가 해야 할 일을 하시게.”
“형님.”
“이보게, 현제.”
“…….”
“잊지 말게. 내 여전히 그리될 생각은 없지만, 자네가 본 나는 무림맹주로서 나쁘지 않은 그릇이었을 걸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차고 넘치지.”
“정녕 그렇다면, 적어도 자네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줘야지.”
모용우가 몸을 돌렸다.
“쉬게나. 근래 한번 찾아옴세.”
다음 날.
‘웅장하구나.’
무림맹으로 들어온 모용연화의 얼굴에 격동이 어렸다.
‘이곳이 무림맹……!’
비로소 완성된 무림맹은 묵룡부를 압도하는 크기와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한눈에도 그 격차를 깨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모용연화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제대로 하자. 내가 제대로 해야 모두가 산다. 긴장은 하되 굳지는 말고, 여유는 갖되 방심하진 말자.’
그렇게 그녀가 수행원과 함께 내성 앞에 도달할 때였다.
“오랜만이구나.”
깜짝 놀란 모용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뚝뚝한 표정의 모용우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모용연화의 눈에 불이 붙었다.
“……모용우.”
모용우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수양이 덜 되었구나, 조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