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반전 (5)
“후우.”
가볍게 내쉬는 숨에 답답한 열기가 섞여 나왔다.
내공으로 애써 주기(酒氣)를 뽑아내지 않았다. 거기에 독하다는 화주를 댓 병이나 마셨으니 취하지 않을 리 없었다.
적어도 평소 주량을 생각하면, 이미 취해서 곯아떨어져야 정상이었으리라.
“애매한 양이군.”
모용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눈보라가 그리 거세게 몰아쳤더랬다. 한데 오늘 밤은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았다. 달빛은 물론 무수히 많은 별빛이 제각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모용군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날씨가 좋군. 이제 슬슬 겨울도 물러가려는가.”
아마 어제의 폭설이 마지막 폭설일 것이다. 산속이라 당분간 추위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전만큼 눈이 올 일은 없을 것이다.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오면 그렇게나 기분이 좋았거늘.”
모용군의 미소가 점점 씁쓸해졌다.
“미래를 향한 기대감에 절어 있을 때와 나 자신이 현실 속에 푹 파묻혀 있을 때가 이렇게나 다를 줄이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니, 가내의 정쟁에서 혈육을 제거하며 가주위에 오른 그는 진작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예상치 못한 것은 연호정이란 존재였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지.’
연호정은 일대 난적이다. 나이, 세력, 경험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였다.
모용군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연호정이야말로 일생일대의 숙적임을. 훗날 연호정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 가는 정적이 나올 리는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연호정만이 아니었다.
‘연위를 비롯한 봉공 대부분이 비범하지.’
연호정과 워낙 치열하게 싸우면서 간과했던 것들.
바로 같은 위치, 같은 봉공직을 얻은 거인들의 역량이었다.
그중에는 중립을 선언하며 나서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대놓고 욕심을 드러낸 자들도 있었으며, 저 연위와 제갈문호처럼 평화와 안정에 집중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당관을 들 수가 있는데, 모용군은 당관이 자신을 배신하기 전까지는 죽을 때까지 그를 다룰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오만이었지.’
당관은 애초에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믿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호시탐탐 등을 돌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연호정의 설득은 그 기회를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해 준 신호탄이었을 뿐, 언제든 갈라설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보고 끝까지 다룰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니, 참으로 오만하지 않았나.
‘내가 이리도 시야가 좁은 사람이었던가.’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양천과 거래를 끝내고 무림맹으로 복귀한 이후.
그는 맹주 선거를 위해 무리하게 공공대사를 축출하려 하였다.
정확히는 축출이 아니라 명성에 흠집을 내려는 암계였지만, 결국 그로 인해 맹주 선거에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으니 축출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계책은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실패해 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군.’
그때도, 그리고 이번에 연호정과의 대담에서도.
그는 또 한 번 실패를 맛봐야 했다.
정쟁에서 밀린 적은 있어도, 스스로가 이렇게나 무력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차라리 능력이 없었다면 억울하지나 않았을 것이다. 모용군은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것을 누구보다 냉정한 시선으로 직시하고 있다 자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왜 자꾸 못난 모습을 보였을까? 왜 꼭 저질러 놓고 나서야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까?
적어도 작년까지의 나는 이러지 않았는데.
‘…….’
모용군이 눈을 떴다.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보는 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칙칙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명가를 치워 버렸다. 남궁과 함께 육대세가의 수좌를 다투게 되었어. 무림맹으로 들어와 나만의 당파를 만들었다. 이후 양천과도 손을 잡았지.’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꽤 많은 실패를 맛보았으나, 아득바득 기어 올라와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취한 것이다. 꿈으로만 생각했던 자리에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서다 보니,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한 것이야.’
모용군은 문득 연호정을 떠올렸다.
그는 연호정만큼 잘난 놈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자신이나 연호정이나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한데 연호정은 자신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실패도 하고 뒤통수를 맞기도 했지만, 언제나 끈기 있게 그다음을 노렸다.
인내심의 차이일까? 아니면 젊음의 차이일까?
그도 아니면 진정, 자신과 연호정 사이에 그만한 격차가 있다는 뜻일까?
“내가 못난 것이지.”
모용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꿈꿔 왔던 미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다니. 천하의 모용군도 다 됐군.”
반면 연호정은 정상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 치열한 정쟁도 녀석에게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할 뿐이었다. 연호정이 바라는 꿈,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무림 제일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연호정은 자신처럼 인내할 필요가 없다. 그 차이가 녀석과의 격차를 만들어 낸 것이다.
씁쓸한 기분에 한숨을 토해 내던 모용군은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또 실수할 뻔했군.”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연호정, 그놈을 쓰러트리는 게 내 목표가 아니잖은가? 설령 그놈이 나보다 잘났다 한들, 나는 내 목표만 이루면 그만일 뿐이거늘 어찌 자꾸 놈을 신경 쓰는가.”
신경 써야 마땅했다. 꿈으로 향하는 길의 가장 큰 장애물인데, 당연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신경을 쓰는 것과 그를 의식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모용군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그래, 이제야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구나.”
지금 이 자리에 온 것? 자신의 당파를 만든 것? 양천과 손을 잡은 것?
그렇다. 그러한 과정 끝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무림맹 십이봉공 중 하나이자 차기 무림맹주를 노리는 모용군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야가 편협해지고 마음이 급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싸움에 너무 익숙해진 게야. 이 난장판에서 이기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 아니거늘 천하제일의 권좌가 아니라 그 권좌 밑, 썩어 빠진 연못에서 홀로 살아남으려 했으니.”
모용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이래서야 나 역시 권력을 좇다 패망해 버린 무수히 많은 소인배와 다를 바가 없잖은가.”
언젠가 당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다르다고. 권력을 좇다가 권력이라는 마물에 집어 삼켜진 바보들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죽는 그 순간까지 권력을 말 잘 듣는 개처럼 부릴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 역시 권력이 주는 마력에 홀려 코앞만 보고 있었다.
“달라져야지.”
다시 채운 잔을 바로 비우며, 모용군이 중얼거렸다.
“권력을 다스려야지, 권력에 홀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지.”
모용군이 빈 잔을 한옆으로 밀어 두었다.
“그렇지 않느냐?”
드르륵.
문이 열리고 모용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이다.”
“늦은 밤이라 주무실까 싶어 조심스레 왔습니다만, 인기척이 느껴지더군요.”
“허허, 아직 자정도 되지 않았거늘 하루를 마무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과음하셨습니다.”
“이럴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긴, 내가 봐도 많이 마시긴 했군.”
치이익!
모용군의 몸에서 강렬한 주향이 피어올랐다. 뇌정공의 진기로 주기를 일시에 날려 버린 것이다.
모용군이 몰라보게 맑아진 눈으로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그래, 자정은 아니다만 늦은 시각이기는 하구나. 이 야밤에 어인 일로 예까지 왔느냐?”
동생을 보는 맑고 깊은 눈빛.
가만히 형을 마주 보던 모용우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허허,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 한잔하겠느냐?”
“그럼 한잔 받겠습니다.”
“어이쿠! 얼마나 심각한 얘기를 들고 왔기에 평소와 이리도 다른 것이냐? 벌써부터 겁이 나는구나.”
모용군이 모용우의 잔을 채워 주었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모용우가 눈을 빛냈다.
“형님.”
“그래.”
“…….”
“말하기 어려운 내용인 모양이다. 괜찮다, 어떤 얘기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니라. 기탄없이 말해 보거라.”
물끄러미 형의 얼굴을 살피던 모용우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다소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
“이번 맹주 선거 말입니다. 혹, 포기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건방진 말은 아니지만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이기는 했다.
모용군이 눈빛이 돌변했다.
“어찌 그러는 것이냐?”
“저도…….”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모용우가 고개를 숙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말을 예전부터 하고는 싶었다. 다만 그가 아는 모용군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통하지 않을 말이라는 것 역시 알았기에 오히려 높이 날아오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속내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련의 사태를 보며, 모용우 역시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 망가지셨습니다.’
모용우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것은 연호정과 손을 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모용군은 충분히 큰 잘못을 저질렀고, 결정적인 순간 자신이 나서서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결심도 했다.
하지만 근래의 모용군은 예전과 달랐다.
혈육의 정 때문일까? 모용우는 차라리 모용군이 여기서 물러나기를 바랐다. 조용히 물러나서, 모용세가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모용군에게 그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임을 아는데도 그랬으면 싶었다. 어차피 모용가의 가주직에서도 내려오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이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용군의 마지막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비참하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마음만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답답하구나.’
어쩌면 모용군을 향한 이런 발언 자체가 연호정에게 부담을 주는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말을 오늘에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그러지 않으실 걸 아는데도, 기어이 이 말을 하는구나.’
모용우가 고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그저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동생의…….”
“아니다.”
“……예?”
“너의 걱정은 결코 쓸데없지 않다. 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형님?”
뜻밖에도 모용군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마침 술을 마시며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깨달았지. 그런 날에 동생이 찾아와 형을 걱정해 주기까지 하니, 씁쓸함과는 별개로 마음이 포근해지는구나.”
“…….”
“역시 믿을 것은 혈육뿐인가 보다.”
모용우는 눈을 감았다.
믿을 것은 혈육뿐이라는 모용군의 말이 가슴을 푹푹 찔러 댔다.
“그래서 말이다.”
“……?”
“내 혈육을 하나 더 불러야겠다.”
“……예?”
모용군의 눈빛이 또 한 번 돌변했다.
순간 모용우는 가슴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눈빛이 바뀐 모용군의 표정은, 마치 도(道)를 깨달은 악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직 네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양천과 손을 잡았으며, 그곳으로 연화를 보냈다.”
“……!!”
“그리고 연화가, 곧 무림맹으로 올 것이다.”
“혀, 형님!!”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하는 살벌한 미소였다.
“네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맹주 자리야 언제 얻으면 어떠하냐. 결국 언제고 내 손에 떨어지면 그뿐인 것을. 아니 그러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