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반전 (3)
“눈이 그쳐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연지평은 나란히 걷고 있던 묵비의 보행을 바라보았다.
연지평의 키는 이미 묵비를 넘어섰다. 그런데 지금은 묵비가 연지평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게 아니었다.
“누님은 정말 엄청나십니다.”
“응? 뭐가?”
“자연스럽게 답설무흔(踏雪無痕)을 펼치시다니요? 저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 경지예요.”
그렇다.
간밤의 폭설로 대별산 전체가 눈밭이 되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목은 무인들이 어느 정도 치워 두었지만, 무림맹 자체가 너무 넓어서 아직 삼 할도 채 치우지 못했다.
연지평은 그러한 눈길을 푹푹 밟으며 나아가는 길이었고, 묵비는 쌓인 눈 위로 자연스럽게 걸어 나가고 있었다.
발이 눈밭에 빠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법이었다.
묵비가 입맛을 다셨다.
“신법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다만, 요새 신법만 발전하는 것 같아서 좀 고민이야.”
“하나의 무공이라도 그 정도로 발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요.”
연지평이 혀를 내둘렀다.
경공술이 극한의 경지에 오르면 수면을 달리고(水上飛), 눈 위를 흔적 없이 걸어가며(踏雪無痕), 풀잎을 밟고 나아갈 수도 있다고(草上飛) 하였다.
그 극한의 경지를 넘어서, 경공의 경지가 신(神)의 경지에 이르면 허공답보(虛空踏步)까지도 가능하다고 했다.
단순히 허공에 충격파를 터트려 순간의 비행이나 활공이 가능한 허공답보가 아닌, 말 그대로 육지에 발을 딛지 않고 쏘아지는 진정한 허공답보. 그것을 다른 말로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이라고도 한다.
연지평이 보기에, 묵비는 십 년 내로 진정한 허공답보를 구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신법 한정으로는 천하제일 소리를 들어도 부족함이 없는 경지였다.
‘무의식적으로 답설무흔을 펼칠 정도이니.’
지금의 연지평으로서는 극한의 집중과 혼신의 내공을 쏟아부어도 답설무흔을 제대로 운용하는 게 불가능했다. 묵비의 신법 경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준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예전에 보니까 형님의 신법도 대단한 경지더라고요.”
묵비가 피식 웃었다.
“연 공자야 여러 방면에 두루 능통하니까.”
“그래도 신법만큼은 누님에 비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승부에 들어가면 내가 질걸?”
“예?”
“개활지에서 싸우면 내 승률이 꽤 올라가겠지만, 숲에서 싸우거나 시가전(市街戰)을 벌인다면 거의 무조건 내가 질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형님의 경지가 드높긴 합니다만.”
“전투에 임했을 때, 연 공자가 보여 주는 응변의 기지는 가히 천하제일을 논할 만해. 주변 상황이 복잡할수록, 장애물이 많을수록 연 공자에게 유리해져.”
“그, 그렇습니까?”
“워낙 변칙적인 수법에 능하니까. 아마 난전(亂戰)에서의 전투술만 따지자면,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을 논해도 부족함이 없을걸?”
연호정을 향한 세간의 평가는 이상할 정도로 낮은 감이 있었다.
물론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릴 정도이니 그 자체로 낮다고 보긴 힘들지만, 지닌 능력에 비해 저평가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연호정의 거친 성격이 유독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의 무공 수준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묵비일 것이다.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형님은 정말 놀라운 무인이 되었군요.”
물끄러미 연지평의 얼굴을 살피던 묵비는 내심 고소를 지었다.
‘정말 이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제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가 자신보다 우월하면 질투가 나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놀랍게도, 연지평의 얼굴에선 그런 기색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꾸민 표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연호정의 뛰어남에 기뻐하고 있었다.
“분하지는 않니?”
“예? 뭐가요?”
“아무리 형이라지만 너무 뛰어난 것 아닌가, 쫓아가지도 못할 정도로 멀리 가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진 않아?”
연지평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동생이 형보다 뛰어난 것보다는 형이 동생보다 뛰어난 게 보기 좋잖아요? 저는 형님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천하제일의 강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호오.”
“물론 저 역시 그런 형님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 동생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지만요.”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 만족하는 거야?”
“만족하는데요?”
“…….”
“그렇다고 형님 눈치 보면서 성장에 제한을 둘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형님에 대한 모욕이거든요. 뭐, 있는 힘껏 달려도 형님의 발치에나 이를 수 있을까 싶지만요.”
몇 년 전, 두 사람은 연호정의 사과로 지난날의 서운함을 해소했다.
연호정이 변화한 순간이었으며, 나아가 연지평의 발전에 탄력이 붙은 시점이기도 했다. 비록 깊은 우애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졌지만, 그때의 우애를 연지평은 지금까지 안고 있었다.
나아가 아버지와 형님이 무림맹에 들어가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연지평 입장에서는 그런 아버지와 형님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피땀을 흘리며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는 거겠지.’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도 그렇고 연 공자도 그렇고, 지평의 발전을 순수하게 축하해 줬어. 지평에겐 그 칭찬이 지난 삼 년간의 고난에 대한 최고의 보상이겠지.’
여러모로 참 대단한 가족이다. 어떤 의미로는 이상적이라 할 수 있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다만 묵비는 이 연씨 집안의 끈끈한 애정이 좋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앞으로도 평생 이 애정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속도를 올려 볼까요? 이러다가 음식 다 식겠어요.”
“그러자.”
두 사람이 새벽 일찍 식당으로 간 것은 맛난 음식을 싸 오기 위함이었다. 연호정의 운공이 워낙 길어졌기에 허기가 질까 싶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땅을 박찼다.
파악!
연지평이 땅을 박차자 엄청난 양의 눈발이 흩날렸다.
반면 묵비가 박찬 땅에는 지극히 미세한 흔적만 남았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경공술은 그렇게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어?’
묵비의 눈이 형형해졌다.
‘충격파?’
강렬한 충격파는 아니었다. 다만 낮고 둔탁한 진동이 은은하게 공기를 뒤흔드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연지평 역시 심상치 않은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누님?”
“아까 전부터 그랬어.”
묵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세하게 전달되는 이 기(氣)…… 분명 아버님의 진기인데.”
“예. 그리고 형님의 기도요.”
“어? 그래?”
“예?”
묵비는 연호정의 기를 읽지 못했다. 하지만 연지평은 연호정의 기를 느꼈다.
기감의 민감도가 대단히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실력의 차이가 있으니 전체적인 흐름을 읽는 것에선 묵비보다 아래지만, 섬세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묵비보다도 위였다.
“일단 갈까요?”
“좋아.”
파아아악!
두 사람이 속도를 올렸다.
반 각이 지나, 두 사람의 눈에 파군각의 대문이 보였다.
우우우우웅!
파군각에 가까워질수록 전달되는 진동이 더더욱 낮아지고 거세졌다.
잠시 후.
퍼어어어어엉!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대문 안쪽, 담벼락 너머에서 눈이 폭발하는 게 보였다. 벽 쪽에 쌓아 둔 눈이 충격파로 인해 터져 나간 것이다.
‘비무?!’
순간 묵비는 심상치 않은 투기(鬪氣)를 읽었다.
그녀가 대뜸 연지평의 옷깃을 잡았다.
퍼엉!
연지평을 든 묵비가 엄청난 탄력으로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파군각 건물 중 하나의 지붕 위로 내려섰다.
그 놀라운 신법 경지에 새삼 감탄하던 연지평은, 문득 아래쪽에서 소용돌이치는 경력 여파에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연지평이 가장 믿고 따르는 두 사람이 무지막지한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쉬이이이익! 쉬익! 쉬이익!
연위의 장검이 무참하게 허공을 갈랐다.
삭! 사사사삭! 사사삭!
공기와 함께 연호정이 방출하는 외기까지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평소 연위답지 않은 격렬한 참격(斬擊)의 연속이었다. 어찌나 예리한 연환격을 몰아치는지, 거기에 극성에 이른 검극사기를 담으면 삼층 건각이라도 쪼개 버릴 수 있을 듯했다.
파바바박!
그런 연위의 검을 피하는 연호정의 보법은 절묘함 그 자체였다.
맞받아치지 않고 한 치 차이로 피해 낸다.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는다. 근접전을 노리는 듯, 조금만 실수해도 사지가 날아갈 수 있는 살벌한 전장으로 계속 파고드는 것이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우우우우우웅!
공기가 무섭게 떨려 왔다.
마치 병에 걸린 야수가 낮게 울음을 토해 내는 듯했다. 연호정이 휘두르는 손도끼에서부터 발생하는 기이한 음파였다.
쩌어어어엉!
처음으로 충돌음이 들렸다.
검과 도끼가 부딪쳐서 나는 충돌음이 아니었다. 진동 가득한 연호정의 참격과 과격하기 그지없는 연위의 참격이 만들어 내는 진기가 부딪치며 토해 내는 소리였다.
스르륵.
두 사람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충격파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비슷하다?!’
백중세의 힘이었다.
내공력이나 깨달음의 차이를 떠나, 연호정의 힘 자체가 연위에게 밀리질 않는다. 그간 연위가 쌓아 온 정통의 내공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파아아악!
연호정이 재차 돌진했다.
투우웅!
연위 역시 연호정을 향해 공격적으로 돌진했다.
제아무리 실전 같은 비무를 해도, 연위는 언제나 연호정의 공격을 받아 내거나 피하면서 승부를 주도했다. 아들을 봐주는 게 아니라, 그러한 과정이 연위가 구사하는 무공의 특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난폭하기까지 한 보법과 검법을 제어 없이 휘두르는데, 오히려 연호정의 흉포함을 압도하기까지 했다.
쩌저저저저저정!
병장기끼리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무지막지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호정이 주춤거렸다. 힘에서 밀리지 않는다 한들 상대는 연위였다. 아무리 거친 검격을 구사해도, 그 안에는 평생을 연마하고 체득한 신묘한 검의(劍意)가 함께했다.
작정하고 몰아친다면 연호정 이상의 공격력을 구사할 수 있다. 그것이 연위, 중도(中道)의 극치를 이뤄 만무(萬武)에 통달한 검종(劍宗)의 무공이었다.
연호정의 손도끼가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졌다.
쩌저저정! 쾅! 콰앙!
이제는 폭음도 터져 나온다. 비로소 두 사람의 병장기가 부딪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치의 검격, 반 치의 도끼질로도 목숨이 날아가는 살벌한 근접전이었다.
쩌정! 퍼어어어엉!
연호정이 십여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연위의 반룡장에 반격을 당한 것이다.
즉각 접근해 참격을 날리려던 연위는 문득 느껴지는 미세한 기파(氣波)에 재빨리 몸을 틀었다.
콰앙!
묵비의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간 손도끼가 담벼락에 박혔다. 만일 연위가 그 기파를 제때 읽지 못했다면 도끼가 상반신을 꿰뚫어 버렸을 것이다.
연지평이 입을 떡 벌렸다. 묵비 역시 침을 삼켰다.
연위와 연호정의 살기 넘치는 비무. 부자지간의 승부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흉악한 일전에 두 사람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후우. 후우.”
연호정의 호흡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흡.”
연위가 짧게 숨을 들이켜며 검을 중단으로 올렸다.
“거기서 비검(飛劍)이라. 과연 너답다.”
“역시 아버지답습니다. 그걸 읽고 피하시다니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짧게 미소를 지었다.
붉게 타오르는 눈빛. 부전자전이라, 두 사람의 살기 넘치는 눈빛은 너무나도 똑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