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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06화 (306/963)

306화. 해답은 하나다 (6)

모용군의 거처에서 나온 연호정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강량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나야 안 괜찮을 게 있나.”

“무슨 대화를 그리 격정적으로 나누셨답니까? 고성에 뭐 찍는 소리에, 그야말로 난리던데요.”

“밖에서도 들리더냐?”

“살벌하게 잘 들렸습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별 얘기는 아니었다. 늙은 여우 화 좀 돋웠지.”

강량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형님은 진짜 강심장입니다. 그래도 상대는 무림맹 봉공인데, 잔뜩 열받게 해도 되는 겁니까?”

“지금의 모용군은 절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왜 그렇습니까?”

“지금 그 인간 눈에는 맹주좌(盟主座)밖에 보이지 않거든.”

연호정이 정도 이상으로 모용군을 자극한 것은 당연히 그의 반응을 보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보다 상식적이면서도 무덤덤했다. 연호정을 봐주는 게 아니라, 그만큼 자신의 인상을 가꾸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 튀는 행동을 하진 못할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나 맹의 봉공들이 보는 앞에서는.

‘이것도 참 못 할 짓이군.’

그간 모용군과 부딪칠 때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모용군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꼬리를 잡힐 만한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간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뭔가 일이 터졌다면 연호정이든 모용군이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움직였을 테니까.

즉, 지금 연호정은 허허벌판에서 모용군의 뺨을 치고 도망친 격이었다.

‘어지간히 열 받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어. 튀는 행동은 절대 못 할 거야.’

하지만.

‘묵룡부의 정보원을 잡았다는 얘기는 결코 허투루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뇌옥으로 보내는 순간 그 정보원을 죽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겠지.’

그럼에도 쉽게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성급하게 움직였다간 정보원에게 향했던 시선이 몽땅 모용군에게 돌아갈 테니까.

절대 연관 짓지 못한 사람을 시키든, 아니면 조심스레 접근하든 둘 중 하나의 행동을 취할 것이 명백하다.

‘만약.’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정보원이라고 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용군이 양천과 손을 잡은 것을 연호정은 확신했다.

하지만 물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이 모든 일이 연호정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흔들리지 말자. 사람의 행동에는 의도가 묻어 나오기 마련이야. 그 의도를 읽고, 논리적이지 않은 상황을 하나씩 제거하고 나면 종국에는 하나의 당연한 사실만이 남는다.’

그 당연한 사실이 바로 진실이며 답이다.

하나의 가정을 맹신하지는 않되, 지표가 될 정도의 믿음은 갖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일을 진행함에 있어 잡스러운 반응에 흔들리지 않는다.

‘어차피 기다리면 답은 나와.’

공공대사를 작업하려던 걸 일부러 알려 준 것은, 오히려 모용군이 조심스레 움직이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움직이면, 훗날 반드시 묵룡부 쪽에서 접근할 것이다. 그 순간만 읽어 낸다면 모용군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다.

‘이제 이 건은 군사님께 넘겨도 돼. 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연호정이 모용군의 거처를 돌아보았다.

‘모용군의 후원자,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같은 당파 소속일 것이다.’

둘 다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관이 후원자 중 하나를 서역신녀로 삼은 것과 비슷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어차피 자신을 도와줄 당원을 후원자로 등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세간의 눈치는 봐야 하니까.

‘모용군의 후원자 중 하나는 반드시 묵룡부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누구일지는 아직 모른다.

그렇다면, 일단은 모용군의 당파부터 흔들어야 한다.

연호정이 한참 생각을 이어 가던 때였다.

“형님.”

“엉?”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한데 말입니다. 전 왜 데려오셨습니까? 안에 들이지도 않으셨는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너 좀 써먹으려고. 모용군이 네 기(氣)를 읽어야 내 거짓말이 통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아, 그렇습니까.”

“왜? 시야를 넓히라면서 데리고 오더니, 소모품으로 쓰인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으냐?”

강량이 피식 웃었다.

“제가 무슨 물건입니까? 애도 아니고, 그런 걸로 기분 안 좋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면?”

“그냥 궁금해서 말입니다.”

“뭐가?”

“타인을 이용해서 정적을 제거하는 것, 말하자면 차도살인에 가까운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지? 쉽게 죽이지 못하는 괴물이라 좀 그렇지만.”

“그럴 거면 절 제대로 이용해 보시지 그러셨습니까?”

“엉?”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그답지 않게 퍽 순진해 보이는 그 모습에 강량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제대로 이용해 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어차피 저는 흑도 출신 검사 아닙니까?”

“그렇지?”

“제 기를 느끼게 할 생각이었다면, 모용가주 역시 제 출신을 알았다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어. 다 까발렸는데?”

“그럼 이 소문이 곧 수뇌부 전체에게 알려지겠군요.”

“수뇌부만이 아니라 외성까지 알려질 수도 있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실제로 아는지 모르는지를 떠나서, 귀철검문의 후계자라면 흑도 무림에 관해서 나름 정통했다고들 생각할 텐데.”

“그런데?”

“절 묵룡부에 간자로 보내겠다고 말하면 되잖습니까? 혹 무림맹의 인사와 손을 잡은 자가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명목으로요.”

“……!”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간자…….’

이런 방법은 생각도 못 했다.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 제가 미덥지 못하다는 거. 하긴, 제가 생각해도 간자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천성이 누굴 속이는 데에 능하지도 않고.”

“…….”

“하지만 중요한 건, 실제로 절 보내는 게 아니라 보내서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을 수뇌부들에게 인식시켜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겸사겸사 모용군의 움직임도 살피고요.”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냐?”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모용가주가 늙은 여우라면서요? 늙은 여우는 요물이라, 늑대 떼가 둘러싸고 있으면 굴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

“놈을 굴에서 나오게 하려면, 굴 안보다 밖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 줘야지요.”

“이 새끼 이거 천잰데?”

“헐.”

연호정이 감탄 어린 눈으로 강량을 바라보았다.

“너도 머리를 굴릴 줄 아는구나?”

“헤헤.”

“하지만 그건 안 돼.”

“……왜요?”

드디어 밥값은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다. 강량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 방법은 앞으로 썩힐 골머리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매혹적인 방법이다. 어쩌면, 현 상황에서 모용군을 떠보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일 수도 있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지만 네가 위험해.”

“예?”

“더 안전한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내 사람을 사지(死地)로 보낼 생각은 없다.”

강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형님. 형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 역시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거는 놈입니다.”

“안다. 알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어.”

“…….”

“물론 네 무공과 상황 판단 능력이 나에 못지않았다면 한번 고민이라도 해 봤겠지. 그래도 그 방법은 쓰지 않았겠지만.”

“왜 그렇습니까? 단순히 형님과 친분이 있어서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게 내가 세운 선(線)이라서 말이야.”

“선이요?”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강량은 연호정을 만난 이래, 그가 저토록 씁쓸해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네가 보았을 때, 그간 내가 벌인 정쟁이 정정당당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하느냐?”

“…….”

“그간 내가 한 짓은 상대를 속이고, 약점을 찌르고, 진실조차 거짓으로 보이게 만드는 협잡이 대부분이었다.”

“형님.”

“그런 짓을 자꾸만 거듭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내가 몇 층의 나락까지 떨어지게 될까.”

강량이 눈에 힘을 주었다.

“무림맹을 위해, 세상을 위해 정적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굳이 한계를 지을 필요는…….”

“그렇게 정적을 제거하고 나면? 깨끗해진 세상에서 진흙과 피를 잔뜩 묻힌 내 손을 씻는다고 퀴퀴한 냄새가 말끔히 사라진다더냐?”

“…….”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다면 내 사람이 피를 보지 않는 선에서 적을 제거하고 싶다. 방법이 쉽다고 내 사람까지 퍼다 써 가면서 적을 제거하게 되면, 훗날 나는 나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진짜 괴물이 되어 버릴 거야.”

“…….”

“어렵게 돌아온 집이거든. 소중한 내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연호정이 강량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어쨌든,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어 줄 생각까지 했다니 고맙다. 그 우의(友誼)는 감사히 받겠다.”

“형님.”

“훗날 일이 틀어진다 한들, 이 방법을 쓰지 않았다고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그게 내 선택이었으니까.”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복잡하잖습니까? 모용가주가 묵룡부와 손을 잡았으면, 설령 맹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무림맹 전체가 흔들릴 텐데요.”

연호정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웃기네. 야, 귀철검문의 작은 주인이 무림맹 걱정을 해 주는 거냐?”

“저 진지합니다.”

“알아, 인마. 하긴, 네 말대로다. 상황은 복잡한데 뭐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게 없지. 오히려 꼬이고 꼬여 버린 일이 조금이라도 풀리긴커녕 점점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기분이야.”

“그러니까요.”

“다만.”

연호정이 남쪽을 바라보았다. 기우희의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

“해답은 언제든 나오게 마련이야. 그 답이 여러 개가 되지 않도록, 오직 하나의 완전(完全)한 결과로 귀결되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더러운 협잡질은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이지.”

“…….”

“땔감은 대충 모아 뒀으니, 이제 불씨 하나 던져 보자. 혹시 알아? 그 불씨가 아궁이에 불을 때는 걸 넘어서 산불까지 일으킬지.”

* * *

“가주님.”

모용군이 눈을 떴다.

“다급히 봉공회의가 열렸습니다. 지금 당장 모든 봉공분들께서 참석하시라는 배첩이 도착했습니다.”

“…….”

“……가주님?”

“재미있군.”

“예?”

모용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묵룡부의 정보원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보원을 보낼 것이었다면 양천이 내게 먼저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사전에 입을 맞추지도 않고 정보원을 보내다니, 투왕이란 작자가 그런 악수를 던질 리가 없어.’

즉, 연호정의 말은 거짓일 확률이 높다.

한데도 봉공회의가 잡힌 걸 보니, 묵룡부의 정보원이라고 착각할 만한 사람을 보내긴 한 모양이었다.

‘아마 내가 모르는 제 놈의 적이겠지.’

문제는, 자신이 회의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느냐다.

‘강경하게 밀어붙어야겠군. 오히려 연호정, 그놈의 이름이 나올 수 있도록.’

저쪽에서 강하게 나왔다고, 이쪽에서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모용군이 봉공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사태는 그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제갈문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봉공분들이 다 모인 회의장이오. 무슨 일이기에 그리 언성을 높이시는 것이오?”

갑자기 회의장에 난입한 뇌옥장이 침을 삼켰다.

“죄, 죄수가 암살당했습니다!”

“뭐라?!”

봉공 모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암살자를 추적하기 위해 내성 부대원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추적 결과, 현재 암살자가 도주하는 방향은 남쪽으로 추정됩니다!”

모용군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호정이 자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당신은 절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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