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01화 (301/963)

301화. 해답은 하나다 (1)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화르르륵.

연호정의 기도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기우희는 볼 수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타오르는 무시무시한 화염을.

저 멀리 신비의 대지, 사방천지가 투명한 얼음으로 가득하다는 북해(北海)의 날씨처럼 차가우면서도, 그 안에는 세상을 불태울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악신(惡神).’

악이다. 예전 연호정을 봤을 때 느꼈던 그 파멸의 영력(靈力)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해.’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악기(惡氣). 기실 그것은 기우희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영안(靈眼)에 잡힌 것일 뿐, 실제로 악의 기운이니 뭐니 할 건 아니었다.

다만 기우희는 알 수 있었다. 무인이 아니라 의원으로서 연호정의 기(氣)를 느꼈다.

‘무공에 성취가 있었구나!’

그때, 연호정의 입이 열렸다.

“신기하군.”

“네, 네?!”

잠영일호를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얼굴에 진한 흥분이 어렸다.

“나는 신화교의 사람은 본 적이 있지만, 고수는 본 적이 없어. 그럼에도 난 너의 내공 기질에서 특유의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연호정이 기우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기우희는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연호정의 눈빛은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서웠다.

“그 이질감은 사음교 놈들의 이질감과 지극히 닮아 있었다. 그래서 네가 삼교 소속이란 걸 유추할 수 있었던 거야. 한데…….”

연호정이 다시 잠영일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놈은 좀 다르군.”

움찔! 움찔!

잠영일호의 몸이 연신 들썩거렸다. 아혈에 마혈까지 짚였는데도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연호정 정도의 고수가 짚는 점혈은 내공이나 힘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무리하게 혈을 풀려 들었다간, 혈도가 찢어져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그런데도 저항하고 있다. 중원의 무맥(武脈)을 이은 내가고수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호정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분명 삼교 측의 무공을 익히고는 있다만…… 주(主)는 중원의 무공이로군. 정확히는, 중원의 암살공(暗殺功)을 기반으로 한 것 같은데.”

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내공의 연원까지 파악해 내는 능력.

흑도대종사쯤 되면 상식을 넘어서는 무공들을 접해 보게 된다. 그중에는 기가 찰 정도로 막 나가는 무공이 있는가 하면, 상리를 벗어났음에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무공도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특이성이 있다 한들, 수천 종의 무공을 보고 느끼다 보면 그 부류를 나눌 수가 있다.

기파가 사나워도 진기가 맑고 정순하면 정공(正功)으로 분류한다. 연호정이 익힌 연가의 신공은 물론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무공들이 그러했다.

기파가 잠잠해도 진기가 극단적이고 균형이 무너졌으면 사공(邪功)으로 분류한다. 예전 탕마멸사의 합군과 전투를 치렀던 회랑단의 단주, 파사륵의 무공이 그러했다.

그 정공과 사공의 중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현 무림 대다수의 내공심법이었다. 적당히 안정적이고, 정석대로 익히면 기가 정순해지며, 장단점은 확실하되 극단적이진 않은 무공들이었다.

연호정의 스승이 그에게 알려 주었던 홍천기(洪天氣)가 역시 정사지간(正邪之間)의 내공이었다. 깨달음으론 정공에, 극단적인 위력으론 사공에 뒤지지만 축기가 빠르다. 그것 외엔 딱히 장점이랄 게 없지만, 대신 이렇다 할 단점도 없다. 균형적인 면에서 완성도가 대단한 무공이었다.

그렇다면 잠영일호가 익힌 무공은 무엇인가?

바로 암살공의 살법(殺法)이다.

그것도 새외의 독특한 살법이 아닌, 중원 무림 특유의 극도로 은밀한 살법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연호정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놈이 익힌 무공은 중원의 살법이란 걸.

그것도 극상승의 살법이었다. 중원에는 무수히 많은 살법이 있지만, 이놈이 익힌 것처럼 은밀하고 고약한 살법은 손에 꼽힌다.

그리고 연호정은, 이놈이 익힌 살법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음화홍류(陰火紅類)도 익히고 있지만, 주력은 음한백류(陰寒白類)로군. 그래서 이렇게나 은밀할 수 있는 것이야.”

순간 잠영일호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음화, 그리고 음한.

“내가 아는 음신(陰神)은 다른 사람인데, 제자쯤 되는 건가?”

음신.

양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음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조차도 얼굴을 본 사람이 다섯도 채 되지 않는다는 신비의 살수.

애초에 음신이라는 살수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심지어 정보력으로는 제일이라는 개방조차도 음신의 존재는 모른다.

그러나 연호정은 본 적이 있었다. 음신이라는 존재를.

천하제일살수. 음화와 음한의 양대 절기를 극성으로 연마하여,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목표물의 목숨을 빼앗는 사신(死神)의 존재를 본 적이 있었다.

연호정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어인 인연인가. 내 다시 돌아온 이후, 저 서초패왕이 서거한 곳에서 음신의 공부를 이은 삼류 무사 하나를 본 적이 있었지. 그놈은 음화의 삼 할도 채 깨우치지 못하고 입마(入魔)에 든 머저리였거늘, 네놈은 좀 다르군.”

후기지수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연지평과 함께 안휘로 진입했을 무렵.

안휘성 화현의 초성루에서 음화홍류를 익히다 만 광인(狂人) 하나를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적이 있었다. 이름이 아마도 마방이었던가?

그곳은 제갈 남매와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그때 그 사건을 중심으로, 여러 인연이 시작되었더랬다.

“기우희.”

“네, 네?!”

“이놈, 신화교에서 나고 자란 놈이 아니지?”

기우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건…… 저도 몰라요.”

잠영일호의 두 눈에 충격이 어렸다.

‘이럴 수가?!’

자신의 마혈과 아혈을 짚은 이 청년은 지난번 성녀님을 호위했던 그 고수가 분명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던가?

한데 그 고수와 성녀님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게다가 신화교라니?!

‘이, 이놈! 본교에 대해 알고 있는가!’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성녀!’

설마 그녀가 배신을 한 것인가? 정말 그런 것인가?

그때,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하긴, 신화교에서 나고 자랐든 그놈들에게 포섭을 당했든, 이제 와선 아무런 의미도 없지.”

푹!

“끄으으윽!”

잠영일호의 입에서 살 떨리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혈은 풀렸지만, 마혈은 더 강하게 짚였다. 이번에는 마혈을 통해 침투한 공력이 전신을 휘저은 것도 모자라 기해(氣海)까지 봉쇄하고 있었다.

기해의 봉쇄, 단전의 무력화다. 아예 내공 운용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절대 풀리지 않는 수갑을 채워 버린 격이었다.

“궁금했었다.”

연호정의 눈에서 기광이 뿜어졌다.

“무림맹 내성까지 침투할 정도면, 실제 실력을 떠나 은신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군. 그렇다면 우리가 기우희를 호위하러 갔을 적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지켜봤어야 정상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에서 날파리를 본 기억은 없어서 말이야.”

기실, 그것은 연호정이기에 가능했다.

그는 한눈에 기우희가 삼교의 끄나풀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처음엔 분명 의심이었지만 거의 확신하고 움직였다.

그것을 깨달은 직후, 그녀 주변에 호위는 없는지, 혹은 암살자는 없는지, 조력자는 없는지 매 순간 기감을 열어 확인했다.

잠영일호의 은신술이 완벽하다? 천만에.

대단한 수준이지만, 결코 완벽하진 않다. 그의 살법이 완벽했다면 연호정이 이렇게 기습을 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즉, 잠영일호는 기우희가 의신회에서 보낸 암살자들에게 쫓길 때 옆에 있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역시.”

연호정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우리를 믿은 것도 아니고, 붙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야. 상부의 명령으로 호위를 맡지 못한 게 분명한데, 그 상부는 대체 왜 성녀라는 사람을 사지에 던져두었을까?”

혈통 문제가 복잡하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리고 신화교의 많은 사람이 기우희를 경멸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기우희는 교주의 딸이다. 아무리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더라도, 교주의 허가가 없는 한 귀한 핏줄을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즉, 기우희가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있던 걸 이 호위 놈이 돕지 못한 것은 상부의 압력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또 이렇게, 정보를 탈취하라고 상부의 명을 받아 왔군.’

감이 왔다.

과거 사음교의 난으로 중원 무림이 초토화되었을 때, 신화교와 광혈교는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음교로도 충분해서? 그럴 리가.

사음교만으로도 피해가 엄청났지만, 아무리 그럴 만한 자신이 있더라도 나머지 두 집단도 투입되었어야만 했다.

전쟁의 미학은 압도적인 힘으로, 가장 빠른 시간에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 그 말인즉, 신화나 광혈 역시 사음과 함께 중원 무림을 휩쓸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투입하지 않은 게 아니야. 못한 것이다.’

교내에 사정이 있었을까?

‘천만에. 그 정도 준비도 없이 전쟁에 나설 만큼 만만한 놈들이었다면 그리 고전했을 리가 없지.’

즉, 신화와 광혈은 사음을 돕지 않은 게 아니라 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위잉. 위이잉.

연호정의 두뇌가 무섭게 회전했다.

증폭되는 사고력. 과거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대조하며, 적들의 위치와 사상까지 꿰뚫는다.

“……관부.”

연호정의 눈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황궁, 관부 쪽을 맡고 있었던 건가.”

“……!!”

그가 기우희를 바라보았다.

“너, 신화교가 어떤 식으로 중원을 공략하려는지 알고 있나?”

“네?!”

따로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기우희의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모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기우희를 맹으로 데려오면서, 그녀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적어도 연호정이 보기에, 기우희는 누군가를 속일 만한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잠영일호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날이로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도 모자라, 너 하나의 존재만으로 여러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어.”

치이이이익.

잠영일호의 몸에서 새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음한백류의 음한지기였다. 단전을 무력화시켰는데도 공력을 뿜어낸다. 어떤 원리로 그런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다.

연호정의 손이 움직였다.

퍼어억!

“컥!”

한 움큼 피를 토한 잠영일호가 결국 정신을 잃었다. 단전까지 박살을 내 놨으니, 더는 공력 운용도 불가능할 것이다.

연호정의 살벌한 한 수를 본 기우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봐, 기우희 의원.”

“……?!”

연호정이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기우희는 장담할 수 있었다. 지금껏 그녀가 본 어떤 표정과 기세보다도 무서운 얼굴이 여기에 있다고.

아버지, 신화교주가 뿜는 살기보다도 사악한 눈빛.

“당가주의 후원자 자격을 거부했다고?”

“……!”

“맹으로 들어왔으면, 의술 말고도 따로 밥값을 해야지. 네년이 뭐라고 그걸 거부하나? 응?”

기우희의 손이 덜덜 떨렸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가 그녀의 이성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었다.

“후원자로 나서. 알겠나?”

“네, 네!”

“지금 당장 나랑 같이 군사부로 가자고. 이중 첩자라는 뭣 같은 짓거리 말고, 무림맹의 새로운 날개로서 제대로 날아 봐야지. 아니 그런가?”

연호정이 하얗게 웃었다.

“훨훨 날아. 멋들어지게 날아서, 스스로는 사냥꾼이라 착각하는 내 먹잇감들을 하나씩 조달해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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