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종(鐘)이 없는 싸움 (4)
연호정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날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억? 아버지?”
“일어났느냐?”
연위가 웃으며 차를 마셨다.
“아까 네 상태를 보았다. 지금쯤 일어날 거라 생각했지.”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자정이 막 넘었다.”
“그렇군요.”
연위가 기특하단 얼굴로 말했다.
“축하한다. 네가 드디어 신단(神丹)을 손에 넣었구나.”
연가신단.
그것은 연가 무공의 정점으로 향하는 길이자, 연가의 최종 비전을 익히기 위한 시작이었다.
연가 역사상 신단을 형성한 선조는 셋을 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선조들의 능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신단을 형성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되, 역대 가주 중 연가신단을 넘볼 만한 깨달음을 얻은 자는 은근히 많았다.
즉 신단을 형성하고 비전으로 향하느냐, 아니면 자신이 익힌 무공을 극대화하여 새로운 창조의 길로 접어드냐는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연위는 후자를 택했고, 연호정은 전자를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위가 놀란 것은, 연가신단을 형성하는 것 자체가 연가 신공에 대한 지극한 깨달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신단은 곧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다만, 일반 단전과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려면 당분간 애 좀 먹을 것이다.”
“예, 그럴 것 같았습니다.”
연호정은 두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확실히.’
진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내공을 익힌 무림인은 단전을 단련한다. 그중에는 하단전만 단련하는 무인도 있고, 상중하 세 개의 단전을 모두 단련하는 무인도 있다.
그리고 세 단전을 단련하면서도 주로 단련하는 단전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연호정이 바로 그러했다. 그의 상단전은 흑암제의 깨달음으로 활짝 피어 있었으며, 덕분에 작은 힘으로도 몇 수 위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 순간적인 파훼술과 안목을 지닐 수 있었다.
사신무, 사방신기는 중단전을 기반으로 하여 몸을 보호했으며, 벽라진결로 하단전을 탄탄히 하여 지닌바 모든 무공을 안정적으로 구현해 냈다.
이제는 달랐다.
벽라진기와 용포진기가 들어찬 연가신단은 사신기와 함께 중단전을 철옹성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 기운이 어찌나 단단한지, 명치께에 뭔가 걸린 듯 답답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반면 하단전은 벽라진기로 다듬어 둔 그 상태 그대로 비어 있었다.
하단전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연가신단에서 오대신공의 진기를 끌어와 무공의 성향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변화의 폭이 자유자재다. 그만큼 복잡하여 다루는 데에 애는 먹겠지만, 완벽하게 체화한다면 순간적인 공력 운용으로 전반적인 무공의 특성을 바꿀 수도 있다.
사신무가 뛰어난 무기라면, 연가신단은 그 무기의 특성을 찰나지간에 변화시킬 수 있는 진기의 대장간인 셈이었다.
‘역시.’
연호정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어렸다.
‘내 예상이 맞았어.’
앞으로 오대신공의 나머지 신공도 모두 섭렵하면 연가신단 역시 완전해질 것이다.
그리되면 속도, 힘, 지구력, 파괴력, 안정화 등 모든 부분이 극에 이른 비전을 운용할 수 있다. 홍천기를 연성치 아니하고 벽라진결로 밭을 닦은 것이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된 것이다.
연위가 연호정의 어깨를 두들겼다.
“축하한다. 그 나이에 신단을 형성하다니, 본가 역사에 없었던 일이다.”
연위는 마치 연호정의 과거를 듣지 못한 것처럼 그를 대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연위는 큰아들의 현재를 보려고 했다. 과거에 그만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지금의 성취를 폄하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연호정 역시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
“감사합니다.”
“추위가 매섭구나. 반면 눈은 그쳤다. 달빛도 고우니, 마음 같아선 애비와의 비무로 신단의 기를 체화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만, 너와 상담할 일이 있어 비무는 뒤로 미룰까 한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연위는 오늘 벌어졌던 일을 전부 알려 주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러셨군요. 아버지께는 따로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되었다. 늦게 알든 빨리 알든, 결국 알았으면 된 것이지.”
“해서 서역신녀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연위가 입맛을 다셨다.
“내일 아침까지 답을 준다고 하더구나.”
“호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역신녀가 신화교의 첩자인 걸 떠나, 그녀의 성품 자체는 무척 곱고 여린 편이었다.
나름의 강단은 있지만, 그 강단도 육대세가의 가주 앞에서는 별무소용인 법이다. 특히나 당관의 위압감은 같은 수준의 고수도 긴장케 할 만큼 대단했다. 서역신녀 정도의 정신력으로는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가주가 그걸 보고만 있었습니까?”
“그렇다.”
“……엥?”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당가주 그 사람,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물론 그 특유의 자존심과 위압적인 면은 그대로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는 않더구나.”
예전에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진 않았지.
당관의 위압적인 면모는 대외 활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무수히 많은 가면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그는 날카로운 기도와 무서운 오만함으로 불가능한 일을 성공리에 달성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즉, 당관 역시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다. 다만 여우인 주제에 독사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지.
“그리고 네게 이 말을 전해 달라 하더구나.”
“말씀하십시오.”
연위는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전언(傳言)이라지만, 그 대상이 아들이었다. 이 말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전하기가 좀 민망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차라리 꾸밈없이 직접적인 말을 듣는 게 낫습니다.”
“그럼 전하마.”
“예.”
“불은 이쪽에서 알아서 지를 테니, 수습을 하든 더 크게 키워 보든 능력껏 알아서 하라고 하더구나.”
“오호.”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말도 없이 서역신녀에게 갔다는 걸 들었을 때 예상하긴 했습니다만, 역시나 가만히 앉아만 있을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누군가에게 휘둘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너의 제안을 받아들여 후보로 나선 것만 해도 그이에게는 큰 양보였을 것이다.”
정확히는 양보가 아니라 거래였다.
다만, 당관은 굳이 자신과 거래하지 않아도 서역신녀와 담판을 지을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면, 아버지 말씀대로 양보는 양보였다.
‘그 양보 역시, 무림맹에서 활동해도 되는지를 확인하려는 마지막 승부수였겠지만.’
세상이 그렇다. 대의(大義) 이전에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당관도 인물은 인물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면, 제가 서역신녀에게 가 보겠습니다.”
연위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 야밤에 말이냐?”
“물론이지요. 내일 아침에 그녀가 후원자로 나서지 않겠다고 하면 어찌합니까?”
“야심한 시각이다. 차라리 새벽 일찍 찾아가는 것이 어떠하냐?”
“아닙니다. 지금이 낫습니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벌레 먹은 짐승을 들여놨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주접 떨면 안 되지요. 회초리 좀 들어야겠습니다.”
* * *
스르륵.
기우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영일호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녀가 등을 돌렸다.
그림자 진 구석에, 어느새 복면을 쓴 흑의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된 거죠?”
“무엇이 말씀입니까?”
“당신의 은신술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여긴 무림맹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잠영일호의 은신술은 중원 무림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암살자들에 필적한다.
게다가 무림맹은 일개 연맹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했다. 가히 소국(小國)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 외성은 큼직한 마을 몇 개를 두른 너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림맹에 거주하는 이들 전부가 고수는 아니니, 성벽만 넘을 수 있으면 침투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성은 달랐다.
내성은 무림맹 전력의 칠 할 이상이 집중된 영역이었다.
숫자가 아니라 무인들의 수준이 그렇다. 당장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초고수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바로 내성이었다.
보보(步步)마다 고수가 아닌 자들이 없거늘, 잠영일호는 그런 위험한 곳에 침투한 것이다.
잠영일호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 한 번을 제외하고,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당분간은 다시 뵙기 힘들 것입니다.”
그가 품에서 작은 목곽을 꺼내 들었다.
“받으십시오.”
“……이게 뭐죠?”
“무림맹 외성 의방과 마구간, 철방 등에 본교의 사람들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
“목곽 안에 든 것은 특수한 훈련을 받은 자만 맡을 수 있는 무색무취의 향(香)입니다. 사십오 일에 한 번씩, 무림맹의 정보 중 주요한 사항들만 적어서 외성 세작들에게 전달하시면 됩니다.”
“…….”
“전달 시, 거처에 그 향을 발라 두시면 됩니다. 훈련받은 세작들의 후각은 오십 리 밖에서도 그 향을 맡을 수 있습니다. 반나절 안에 찾아올 터이니, 세작에게 정보를 전하시면 됩니다.”
기우희가 침을 삼켰다.
“이걸…… 저더러 하라고요?”
“상부의 명령입니다.”
“…….”
“성녀님의 성향에 맞지 않는 일이지요. 그러니, 어서 본교로 돌아오십시오.”
“…….”
“성녀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본교로 돌아오실 수 있습니다. 귀교만 하면, 성녀님께서는 만인을 눈 아래로 두는 권력을 손에 쥐실 수 있습니다.”
“……잠영일호.”
“당분간 다시 뵙기 힘들 터이니, 이참에 한 번 더 무례를 저지르겠습니다.”
기우희가 한숨을 쉬었다.
잠영일호가 말을 이었다.
“성녀님의 출신을 두고 말이 많은 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구설에 불과합니다. 교주님께서 성녀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를 아신다면, 그들의 눈이 무섭다고 하실 일이…….”
“잠영일호.”
“……예, 성녀님.”
“미안하지만, 이제야 난 선택을 내렸어요.”
잠영일호의 눈이 흔들렸다.
“성녀님!”
기우희의 눈이 슬픔으로 젖었다.
“당신이었죠?”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머니를 죽인 사람, 당신이죠?”
“……!!”
“저를 향한 당신의 안타까움은 진짜였어요. 하지만 말해 보세요. 당신이 내 마음을 돌리려는 이유가 그리도 순수한가요? 예전에 앉았던 권좌에 다시 오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절 설득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요?”
“서, 성녀님!”
“그간 당신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건, 당신과 싸워 봤자 내게 아무런 이득도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슬픔에 젖었던 기우희의 눈동자가 점점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저 역시 선택을 내렸거든요.”
“…….”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제 나름대로 싸워 보려고요.”
잠영일호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님.”
“…….”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
그때였다.
‘……!!’
잠영일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풀썩.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순간 힘이 빠진 몸은 손가락 하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러지? 독에 당하기라도 한 걸까?
그때였다.
“하긴, 그랬었지.”
잠영일호는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우리 싸움이 다 그렇지. 땡 하고 종소리 울려야 시작하는 싸움이 아니었어. 준비고 나발이고, 먼저 선수 치는 쪽이 이득 보는 건 뒷골목 왈패들의 다툼하고 다를 게 없으니 말이야.”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엄청난 살의가 들끓고 있었다.
훅.
시커먼 그림자가 잠영일호의 시야를 가렸다.
치리링. 치리리링.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무시무시한 공포를 자아냈다.
그림자, 연호정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종 울리고 오지 그랬나. 이건 뭐 부나방도 아니고, 너무 용감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