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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98화 (298/963)

298화. 종(鐘)이 없는 싸움 (2)

겨울은 유독 해가 빨리 지는 법이었다.

저 멀리 서쪽으로 해가 넘어갈 무렵, 묵비가 씩씩거리며 파군각으로 들어섰다.

“이 양반 어디 있어? 오늘 아주 끝장을 봐야…… 어?”

잔뜩 성이 나 있던 묵비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평아.”

“엇? 누님 오셨어요?”

연지평이 반갑게 묵비를 맞았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안 되어 묵비와 제대로 된 대면을 하지 못한 그였다. 함께 전투를 치렀지만, 경황이 없어서 푸근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일어났어? 몸은 어때?”

연지평이 무안한 듯 얼굴을 붉혔다.

“괜찮습니다. 부끄럽네요. 오랫동안 누워 있을 일도 아니었는데.”

“무슨 소리야? 너한테는 첫 실전이었잖아. 그 정도 충격은 당연해.”

묵비가 손을 들어 머리 위에서 까딱거렸다.

“그나저나 그때도 그랬지만, 정말 엄청 컸구나?”

“그렇게 많이 컸나요……?”

“당연하지. 이제는 나보다 크잖아?”

비록 연위나 연호정보다는 작았지만, 묵비를 넘어설 정도로는 자란 연지평이었다. 묵비 역시 여인치고 큰 키임을 생각하면, 그의 성장은 눈이 부신 것이었다.

묵비가 어울리지 않게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키도 크고 잘생겼는데 능력까지 출중하네. 강호의 여협들 방심 좀 흔들겠어.”

팔꿈치로 연지평을 툭툭 치는데, 그 모습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연지평이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여협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아직 그런 걸 생각할 때도 아니고…….”

“그런 거라니? 어떤 거?”

“누, 누님!”

“깔깔깔.”

묵비는 모처럼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자신의 장난이 통하는 최초의 사람을 만나서 기뻤는지도 몰랐다.

연지평이 헛기침을 했다.

“누님도 많이 변하셨군요.”

“나?”

“예. 전보다 많이 밝아지신 것 같아요.”

“그런가? 하긴 별의별 일이 다 있었으니까. 말수 적은 활잡이로 살기에는 너무 삭막하기도 했고.”

연지평이 보기에, 묵비의 변화는 비단 성격만이 아니었다.

‘굉장하시구나!’

묵비에게서는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여유가 물씬 느껴졌다.

그 여유는 바로 강자의 위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상황, 어떤 전투를 치르더라도 절대 당황하지 않을 고수의 분위기가 흘렀다.

세상 물정 모르던 누님이 강호의 세파를 이겨 내고 이렇게나 변화했다. 연지평은 그 역시 큰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연지평의 미소가 깊어졌다.

‘어느새 누님도 형님과 닮아 가시는구나.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묵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그 의미심장한 미소는?”

“예? 아, 아닙니다.”

“뭐냐니까? 설마 오랜만에 만난 누님한테 뭐 숨기는 거라도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연지평이 순박한 얼굴로 말했다.

“언제쯤 형님과 백년해로하실까 기대돼서요.”

묵비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단순히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연지평은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아닌가 싶어 당황했다.

“호, 혹시 제가 뭔가 말실수라도……?”

“이 인간!”

“……예?”

“그러고 보니 이 인간 어디 있어! 너, 연 공자 어디에 있는 줄 알아? 숙소로 왔을 텐데?”

연지평이 얼떨떨한 얼굴로 이 층을 가리켰다.

“생각하실 게 있다고 거처로 들어가셨는데…….”

“때려죽일!”

묵비가 뒤도 안 돌아보고 건물로 들어갔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문을 여는데 화포 터지는 굉음이 울렸다.

연지평은 당황했다.

‘형님이 뭔가 실수라도 하신 걸까?’

누님의 기세를 보아하니, 이거 가만히 있다가는 뭔가 사달이라도 날 것 같았다. 연지평은 서둘러 묵비의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이 층에 오른 묵비가 단숨에 연호정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쾅!

“이 망할 인간이 피곤해 죽겠구만 애들 훈련 맡겨 놓고 여기서 농땡이를……!!”

순간 묵비가 입을 다물었다.

연지평이 당황해서 묵비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누, 누님. 진정하세요. 일단 형님께 자초지종을…….”

“쉿.”

“에?”

그제야 연지평도 연호정의 모습을 보았다.

우웅. 우우웅.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연호정의 몸에선 은은한 녹색의 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

연지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연호정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선명한 녹색 진기는 그 쾌청한 빛과는 반대로 무시무시한 막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독특한 것은 진기(眞氣)의 흐름이었다.

‘안으로 수렴한다?!’

통상 체외로 진기가 방출될 정도의 공력 운용은 민감한 고수들에겐 즉각 포착될 정도로 격렬한 기파를 자아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의 연호정은 달랐다. 연지평은 직접 눈으로 보고 난 이후에야 형의 운공이 격렬했음을 인지했다. 마당에 있을 때는 형이 운공조식에 들어갔는지조차 몰랐다.

뿜어낸 외기(外氣)가 곧장 체내로 수렴하여 공력의 밀도를 상승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무공을 연성하시기에?’

그때, 묵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작했네.”

“예?”

어지간해선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을 걸 알았다. 묵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전에 말했거든. 도약의 시기가 곧 올 거라고. 다만 언제 시작해야 할지를 재 보고 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던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대신공.”

“……!”

“대성한 벽라진결을 고정해 두고, 연가의 오대신공 중 하나를 연성하고 있는 거야.”

순간 연지평의 눈이 흔들렸다.

‘한없이 강하기만 한 진녹색 진기라면……?’

녹음(綠陰)의 향기가 느껴지는 진기. 햇살도 뚫지 못하는 거대한 숲속에, 스러지지 않은 전설의 신수(神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드러나지 않는 흉포함이 거기에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평화롭고 안정적이지만, 그 숲에는 하늘조차 찢어발기는 신화의 존재가 웅크리고 있었다.

‘용포신공!’

연지평의 입이 벌어졌다.

‘벽라진결 직후에 용포신공을 익히신다고?’

연가의 오대신공은 하나같이 안정적인 정공(正功)이다.

하지만 각자의 특성이 뚜렷하기로도 유명하다. 그중 벽라진결은 가장 개성이 없는 축에 속하지만, 그만큼 심신을 안정적이고 조화롭게 만들기에 전반적인 기량 상승에 적격이었다.

용포신공은 그런 벽라진결과 완전히 대척점에 선 무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공이지만, 벽라진결처럼 호심호기(護心護氣)가 아닌 출력 상승과 발경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구사하는 무공의 전반적인 위력 자체를 끌어올리는 호승심 넘치는 무공인 것이다. 연가의 무공 중 가장 파괴적이고 막강하며, 출력 상승으로 인한 내공 소모 역시 증가시키기에 장기전(長期戰)보다는 단기전(短期戰)에 적합하다.

‘형님이 벽라진결을 연성한 이유는 명백해. 형님의 성정과 술(術), 기(技)를 보완하기에 좋기 때문이야.’

연호정의 무공은 어떠한 형용도 필요 없이, 단 두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빠르고 강하다.

연호정은 빨랐고, 동시에 강했다. 그의 몸놀림과 초식은 벼락과도 같았고, 구사하는 무공의 위력은 쏟아지는 산사태와도 같았다.

그 말인즉, 자칫 손속이 과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완벽하게 연성한 무공도 필요 이상의 피를 보게 되면 주인의 심신을 망칠 수 도 있다.

그런 면에서 벽라진결을 선택한 연호정의 혜안은 탁월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의 경지에 오르며, 단 한 번도 심마(心魔)에 휘둘리지 않았다.

연지평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부분이었다.

‘지금 용포신공을 익히셔도 되는 것입니까.’

연지평은 형님의 무공을 떠올렸다.

기우희를 노리는 암살자들을 장작 패듯 쪼개 버리는 단호한 손속.

폭발적인 위력과는 달리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냉정한 안목으로 상황을 주도한 전신(戰神)의 무공을.

그리도 호쾌하고 혈기 넘치는 무공을 구사하면서도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강호의 중견 고수들조차 보여 주기 힘든 절제력이었다.

그런 형님이, 만에 하나 용포신공을 익히며 냉정함을 잃는다면?

‘…….’

연지평은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기우(杞憂)다. 형님은 나 따위가 가늠할 수 없는 천재야. 익힐 때가 되었으니 익히신 것이다.’

형을 믿는다. 형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운명을 믿는다.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은 혈육이라면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에 가까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우우.

깊게 내쉬는 숨결에 녹색 연기가 섞여 나왔다.

마치 독공(毒功)의 독기를 연상케 하는 색이었다. 하지만 그 숨결에 묻어 나오는 진기에는 비가 온 뒤에 더 짙어진 숲의 냄새가 가득했다.

지이이이이잉.

기이한 소리였다.

연호정의 몸 어딘가에서 마치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연가 무공에 나름대로 정통한 연지평도 연호정의 체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지금 이곳에 연위가 있었다면.

연가 무공에 정통한 것을 넘어, 연성치 아니한 무공조차 구결을 읊는 것만으로도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것만큼 손쉽게 구사할 수 있는 벽산의 검종(劍宗)이 존재했다면.

그랬다면, 연호정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연호정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지나 볼을 타고 흘렀다.

‘됐다!’

드디어 성공이었다.

‘이게 바로 오대신공 합일(合一)의 시작이라는 연가신단(燕家神丹)이구나.’

연가신단. 응축된 공력으로 밀도를 높여 만든 진기(眞氣)의 구체를 말함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실을 수백, 수천 겹 두르고 둘러 만든 진기의 총화였다. 말하자면, 영물의 내단(內丹)과도 같은 기체를 형성해 낸 것이다.

연가신단은 곧, 연가의 오대신공을 모두 깨우친 자가 재조립하여 만들어 낸 연가 최고의 비기(秘技)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근원이다.

위치는 인체의 중심, 중단전이다. 감정을 조절하고 오장육부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중단에 연가신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연호정의 성정이 격렬하다는 것을 뜻한다.

‘신단이 자리하는 위치는 연성하는 사람마다 달라. 누군가에게는 하단전이 될 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상단전이 될 수도 있어.’

과거, 흑암제 시절에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때는 홍천기를 연성하고 있었으니, 구결만 아는 정도로는 연가신단의 무한함을 알 수가 없었다. 신단 자체가 복수(複數)의 신공을 익혀야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게 낫다.’

아버지께서도 연가신단의 존재를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신공을 연성하지 않으신 것은, 아버지껜 아버지 나름의 무도(武道)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연호정 역시 흑암제 시절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벽라진결로 끝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의 내게는 무도를 향한 진지한 궁구(窮究)보다 현실적인 힘 그 자체가 필요해.’

그렇다 해도 연가신단까지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그가 의도한 것은 벽라진결이 자리한 곳에 용포신공을 채우려는 것이었기에 내단 형성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신무(四神武)!’

사신무의 사방신기(四方神氣)가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면 내단을 형성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가신단이 중단에 자리한 여러 이유 중 하나일 터였다.

사신기가 바로 인체의 장기를 통제하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흐읍!”

크게 숨을 들이쉰 연호정이 번쩍 눈을 떴다.

우우우웅.

맑고 깊은 눈빛 속에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맥동하는 막강한 힘이 느껴졌다.

벽라진결을 대신할 새로운 힘, 용포신공의 힘이었다.

“……됐다.”

갑자기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연호정이 피로에 찌든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너희는 기별도 없이 왜 들어…… 어어?”

풀썩!

연호정이 그대로 침상에 쓰러졌다.

놀란 두 사람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왔다.

“연 공자!”

“형님!”

그때, 연호정이 작게 코를 골았다. 극심한 피로에 강제로 잠이 든 것이다.

묵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이거 일부러 연기하는 거 아니야?”

그녀는 연호정이 너무나도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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