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야수도(野獸道) (6)
거처로 돌아온 연호정을 맞아 준 것은 바로 연지평이었다.
“형님.”
“어? 일어났냐?”
“예.”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놈, 그러니까 평소에 잠을 잘 자 두라니까. 밤에 잠 안 자고 뒹굴거리니까 아직 나보다 키가 작지.”
연지평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첫 추격전과 실전에서 오는 피로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연호정이었다.
그래서 이 말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연지평이 고개를 저었다.
“형님께서는 여전히 철골이시네요.”
“철골은 무슨.”
“그나저나…….”
연지평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상처들은?”
의방에 들러 붕대까지 싹 감아 놓은 후였다. 하지만 철편의 날이 너무 울퉁불퉁해서, 지혈했음에도 간간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연호정이 손을 저었다.
“화끈하게 비무 한판 하고 왔다. 신경 쓰지 마라.”
확실히 내상이 심하거나 체력을 크게 소진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연지평의 얼굴에 안심이 깃들었다.
“형님은 여전히 거친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홀로 칼만 휘둘러 얻은 무공이 어디 진짜 무공이라 할 것이며,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고 어찌 세상에 통달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은 부딪침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야. 과격하게든, 부드럽게든.”
맞는 말이었다. 특히나 연지평은 연호정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생각지도 못한 데에서 첫 생사결을 벌였다. 그리고 연지평은, 그간 자신이 갈고 닦은 무공을 절반도 채 보여 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경험이 뒷받침되지 못한 공부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 형의 저 가치관은 분명 배울 만한 점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연호정이 연지평의 어깨를 매만졌다.
“이렇게 차분하게 보니, 그놈 참 많이도 컸다.”
“그런가요?”
“그래. 이제 어엿한 사내가 다 되었어.”
육체가 성장한 만큼 성격 역시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훨씬 더 차분해졌고, 나아가 말수도 적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연지평의 성격이 어두워져서가 아니었다.
가문의 일을 직접 처리하면서 배운 신중함.
어떤 의미로는 생사가 오가는 칼싸움보다도 어려운 싸움을 해 온 그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성격적인 부분에서 더욱 큰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형님도 대단하세요.”
“내가 뭘?”
“벽산호장의 명성이 천하 각지로 뻗어 나가고 있잖아요. 형님이 무종지벽을 돌파하고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그는 이미 흑도의 정점에 올라 본 남자다. 나아가, 드넓은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강자로 악명을 떨쳤던 희대의 고수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천하제일 후기지수니 뭐니 하는 명성에 별 감흥이 없었다. 태산의 정상에 올라 봤던 자에게 야트막한 야산은, 그저 그런 언덕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그 스스로는 체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연호정의 이름은 중원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심지어 호신쌍위로 엮인 모용우보다도 더 높은 명성을 구가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용우는 어느 순간 툭 튀어나온 천재지만, 연호정은 수년 전부터 명가를 상대해 오며 자신의 존재감을 만천하에 알린 열혈의 승부사였다.
게다가 모용우보다 나이도 어렸으며, 정통검법의 명가라는 연가 출신임에도 사람 키보다도 큰 도끼를 주병기로 쓰는 특이한 고수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튀어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갈문호가 예측했듯, 연호정의 이름값은 이미 대문파 장문인급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 정도로 들뜰 이유가 뭐냐? 천하제일인이면 몰라도 말이야.”
“그런가요?”
“세상에 강자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내가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 불리고 있긴 하다만, 그건 말 그대로 후기지수급에서 노니까 그런 거지. 작정하고 찾으면 이 무림에서 나보다 강한 자가 수백 명은 더 튀어나올 거다.”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잖아요.”
“대단하긴 개뿔. 멀어도 한참 멀었어. 게다가, 천하제일인이라도 합공당하면 죽어. 개인이 뛰어나 봤자 집단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지.”
물론 성천십삼좌급이 되면 얘기가 다르다.
하지만 그 역시 영역의 차이일 뿐,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성천십삼좌에 오른 고수 하나가, 같은 성천의 고수 셋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결국 외부의 평가는 나 자신의 눈을 흐리는 장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뻐해 줬다니 고맙다만, 앞으로는 그런 데에 신경 쓰지 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었다. 연지평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명심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뭐. 아닌 말로, 무림인한테 명성 빼면 뭐가 남겠냐.”
“그, 그런가요?”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를 뿐이야.”
이런 걸 보면 형님도 마냥 극단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주관은 확실하지만, 타인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형이기에, 연지평은 연호정을 좋아했다. 저 반듯한 주관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밥은 먹었냐?”
“예. 아버지랑 아침을 먹었습니다.”
연호정의 표정이 대번에 음흉해졌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겠구만?”
연지평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조금…… 그런 면도 있긴 했어요.”
“껄껄껄.”
“그래도 놀랐어요. 무슨 일을 겪으신 건지 몰라도, 아버지께서 무척 부드러워지셨더라고요.”
“부드러워지셨다…… 맞는 말이야.”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변하신 게 아니야. 원래 그런 분이셨던 거다. 다만 가문의 이름값이 무거워, 그걸 티 내지 않으셨을 뿐이지.”
“그렇군요.”
“어찌 되었건, 맹에 있을 때만이라도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알겠습니다, 형님.”
“그래.”
연호정이 연지평의 등을 토닥였다.
“정신없을 텐데 푹 쉬고 있어라. 심심하면 맹이나 한번 둘러보든가.”
“형님은요?”
“나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이따 보자고.”
“예? 아, 예.”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연호정의 뒷모습을 보는 연지평의 눈에 은근한 섭섭함이 깃들었다.
형제간의 만남이라, 이 정도 대화면 충분히 회포를 풀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지평은 더 많은 얘기를, 더 많은 대화를 주고받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형은 형이었다. 언제나 바빴고, 그만큼 열정적이었다. 자기 사람을 잘 챙기면서도 무언가 집중할 게 생기면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쩝, 저녁에 술이나 한잔 사 달라고 해 볼까. 나도 이제 잘 마실 수 있는데.”
거처로 들어온 연호정은 곧장 침상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었다.
가부좌를 틀었다고 운공에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 자세가 무언가를 생각하기에 좋은 자세라 취한 것일 뿐이었다.
‘확실히, 이제는 한계야.’
그는 당관과의 비무를 떠올렸다.
물론 당관처럼, 연호정 역시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사생결단을 낼 각오로 싸운 건 아니었다.
주작기 특유의 살기가 묻어 나왔을 뿐, 진심으로 당관을 죽일 작정이었다면 못 해도 그의 사지 하나는 날려 버렸을 것이다.
물론 자신 역시 그 자리에서 골로 갔거나, 온몸이 걸레짝이 되었겠지만.
‘서로 전력을 다한 승부는 아니었지만, 서로의 한계를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승부이긴 했지.’
연호정은 당관의 움직임을 통해 그의 실력을 거의 다 읽어 낼 수 있었다.
‘아버지에 필적한다. 아니, 아버지보다 반 수 아래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오히려 아버지가 당할 확률이 높아.’
그것은 누구의 무공이 더 강하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개인의 심성과 무공의 상성 차이였다.
‘나 역시, 진짜 생사결로 진입했다면 패했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자신의 실력이 아버지보다 낮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물론 독과 암기에 대응하는 능력만큼은 오히려 아버지를 앞설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기다려도 괜찮아. 지금처럼 꾸준히 연마하면, 수년 내로 이 경지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겠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황룡(黃龍)을 깨우지 못한 상황에서, 현재 그의 사신무는 거의 극한까지 갈고 닦였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신기(四神氣) 전체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더 깊어질 여지는 아직 남아 있었으나, 더 이상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할 만한 여지는 없었다.
사신무에서는 그러했다.
‘그렇다면…….’
슬슬, 때가 되었다.
‘오대신공을 건드려 봐야겠어.’
벽라진결은 사신무를 지탱하기에 매우 적합한 무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호정의 성격과도 맞았다. 벽라진결은 오대신공 중 가장 안정적인 무공이라, 과격하기 이를 데 없는 연호정의 무공을 보조하며 상생(相生)의 효과를 이뤄 냈다.
‘벽라진결은 대성한 상황. 그리고 상생의 도(道) 역시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뤘어.’
진기도, 신체도, 마음도 기(氣)로서 균형을 찾았다.
이제는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상생의 신공이 아니라, 그만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신공으로 갈아탈 때가 되었다.
“……역시 용포신공(龍抱神功)으로 가는 게 옳겠지.”
용포신공.
줄여서 용포기(龍抱氣)라 불리는 이 무공은 연가의 오대신공 중 하나로서, 발경(發勁)의 파괴력을 극한까지 살리는 데에 능한 신공이었다.
말하자면 연가의 신공 중 가장 파괴적이다. 그만큼 내공 소모도 심하고, 자칫 진기에 휩쓸리면 성격 역시 거칠고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연가의 가풍이 유독 엄격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오대신공 각자의 성격이 원체 뚜렷한지라, 심성이 올곧아야 무공 본연의 위력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무공은 뒤를 생각하지 않는 일격필살이다. 기세로 적을 제압하고, 강력한 파괴력으로 적을 분쇄하는 데에 능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근본을 벽라진결이 아닌 용포진기로 바꾼다면?’
파괴력의 극대화다.
사신무만의 위력이 강해지는 게 아니라, 연호정이 구사하는 발경과 힘의 밀도 자체가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그래, 변화의 때가 왔어.’
가혹한 한 해가 될 것이다.
그 한 해를 이겨 내기 위해, 정체되어 있던 그 자신의 무공 역시 크게 발전시켜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이번 해에, 적어도 무림맹 내부의 갈등은 대부분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놈들과 싸울 수 있을 테니.’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맑으면서도 짙은 푸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벽라진기였다. 십 성을 이룬 벽라진기는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안온하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르다.
연호정이 입을 달싹였다.
잠시 후.
푸스스스스스.
푸른빛으로 번져 나오던 벽라진기가 점차 그 색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녹음(綠陰)이 우거진 숲을 연상케 하는 기운이 조금씩 조금씩 채워 갔다.
두웅! 두웅!
심장 박동이 점차 거세졌다.
마침내 용포진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