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야수도(野獸道) (5)
“후우.”
당상아가 나직이 숨을 몰아쉬었다.
‘됐어.’
당문의 비기, 추뢰신법(追雷身法)은 엄청난 속도와 유연함을 얻을 수 있는 대신 내공과 체력의 소모가 심한 신법이었다.
말하자면, 여느 신법과는 달리 전투에 초점이 맞춰진 신법이라는 뜻이었다. 신법이란 곧 더 적은 내공으로 더 멀리, 더 빠르게 이동하는 수법이다. 추뢰신법은 보통의 신법과는 확실히 용도가 달랐다
‘일각을 넘겼어.’
추뢰신법에 대한 당상아의 깨달음은 이미 달인의 경지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추뢰신법을 잘 쓰지 못했던 것은, 유연하고 날카로운 그녀의 무공 특성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만한 무공을 익혔음에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었다.
‘흐음. 뭐, 자잘한 문제야 댁의 수준이 발전할수록 사라질 단점들이니 크게 중요한 건 아니야.’
‘그럼요? 제 가장 큰 단점이 뭐라고 생각하시죠?’
‘체력.’
처음 연호정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상아는 동의할 수 없었다.
독과 암기는 거리를 얼마나 잘 가늠하느냐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이다. 당연히 당문의 고수들은 신법에 많은 투자를 했으며, 그만큼 체력적으로 문제를 겪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야 당상아는 깨달았다. 연호정이 말하는 체력의 뜻을.
‘단순한 지구력을 뜻하는 게 아니야. 한순간에 터트릴 수 있는 폭발력, 호흡을 자유자재로 써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말했던 거야.’
밀도가 큰 힘을 구사할수록 호흡은 무서운 속도로 망가진다. 그리고 망가진 호흡은 그대로 체력에 악영향을 끼친다.
일정한 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폭발적인 출력으로 일격필살의 힘을 연달아서 터트리고도 호흡을 정상으로 돌리는 경지는 지옥 같은 훈련으로도 좀처럼 다다를 수 없다.
그간 당상아가 한 훈련이 바로 그런 체력 단련이었다.
무공 한정으로는 누구 못지않게 독한 당상아조차 하루에도 몇 번씩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강도 훈련.
놀랍게도 그러한 훈련이 쌓이고 또 쌓이자, 반 각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던 추뢰신법을 일각이 넘도록 구사해도 움직임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극단적인 체력 단련은 더 많은 호흡을 잡아먹는 법.
소모되는 호흡만큼이나 들어오는 호흡도 많다. 그러한 호흡의 출입이 반복될수록 근육이 붙잡고 있는 기의 밀도도 점차 높아졌다.
‘내공만 단련한다고 다가 아니야. 바로 이런 훈련 과정이 있어야 실전에 탄력이 생기는 거야.’
새삼 연호정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연호정은 탁월한 실전 능력의 소유자였다. 경험을 떠나, 그만한 실전 감각을 키우기 위해선 극한의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실행했을 것이다.
체력이 늘면 기의 밀도가 늘고, 기의 밀도가 늘면 내공 운용의 활용도도 늘어난다. 내공 운용의 활용도가 늘어나니 수법(手法)도 다양해지는 것이며, 수법이 다양해지니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다.
체력을 단련하는 것. 오늘 흘린 땀 한 방울이 실전에서 흘릴 피 한 바가지를 보존할 수 있다.
당상아는 그 이치를 뼈저리게 통감했다.
“대단하군.”
“아, 오셨어요.”
모용우가 감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체력이 엄청나게 늘었소. 그간 지독하게 단련했나 보군.”
당상아가 미소를 지었다.
“아직 멀었어요.”
“물론 그렇소.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껏 해 왔던 것처럼 꾸준히 하면, 실전에서의 사각(死角)이 많이 줄어들 것 같소.”
체력 단련의 목표를 단숨에 꿰뚫어 본다. 말하자면 모용우 역시 연호정처럼 체력 단련의 중요성을 진즉 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시.’
당상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
당대 당가 후기지수 중 정점이라 불리며, 당가 최강자인 암왕(暗王)에게 유일하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
어쩌면 그러한 사실이 알게 모르게 자만심을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당상아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깊게 반성했다.
“그 신법이 전에 말했던 추뢰신법이오?”
“맞아요.”
“번개를 쫓는다…… 과연 이름처럼 대단한 신법이오. 그 신법과 함께 독공을 구사한다면, 당하는 사람은 정말 아찔하겠소.”
당상아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독공과의 궁합도 괜찮지만, 추뢰신법과 진짜 궁합이 맞는 건 암기술이에요.”
“왜 그렇소? 제아무리 정교한 암기술이라도 그리 과격한 신법을 쓰다간 목표물을 맞히기 어려울 것 같소만.”
“그게 가능한 사람이 본가에 세 분 계시죠. 그리고 전 그분들의 무공이 얼마나 무서운지 직접 보았어요.”
“…….”
“그래서 추뢰신법이 암기술과 병행될 때 최대 효율을 낸다고 하는 거예요.”
모용우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 세 분은?”
“한 분은 조부님이세요.”
모용우가 나직이 침음을 흘렸다.
“암왕 어르신.”
“맞아요. 그리고 본가의 대장로님 역시 추뢰신법과 암기술을 접목시킬 수 있는 분이죠.”
“그렇다면 마지막 한 분은?”
“맞아요.”
당상아의 눈이 빛났다.
“당대 사천 무림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사람, 바로 저희 아버지예요.”
* * *
쩌저저저정! 퍼억!
몇 번이나 철봉을 두들기던 철편이 일순 기이하게 꿈틀거리더니 연호정의 어깨를 뜯어냈다.
천만다행으로 근육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살점이 뜯겨 나가는 감각은 무척이나 고약했다. 게다가 철편의 표면은 톱날처럼 거칠어 살갗을 찢기에 용이했다.
터어엉!
연호정의 신형이 하늘 높이 수직으로 치솟았다.
연가 비전의 천종운행비였다.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당관을 몰아쳤던 그답지 않게 고고하고 산뜻한 신법을 보여 준다.
파아아악!
전권에서 벗어난 연호정이 재차 철봉을 고쳐 쥐었을 때, 이미 당관의 신형은 연호정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더 빨라졌다.’
엄청난 신법이다.
주작공의 혈익휘천과는 궤를 달리한다. 혈익휘천은 그 자체로 공격이요, 최속의 전투 보법이다. 거기에서 유려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으며, 그저 최단 시간에 적을 죽이고자 하는 도살자의 광기만이 가득할 뿐이다.
당관의 신법은 달랐다.
그의 신법은 빠르면서도 변화무쌍했다. 마치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내리친 벼락처럼, 빠르면서도 제멋대로 방향을 전환하기 때문에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연호정이 극에 이른 실전 감각으로 허와 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당관의 신법은 무리(武理) 자체가 극한의 변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퍼퍼펑!
전력을 다해 삼첩장(三疊掌)을 내치는 당관.
현무기를 담은 철봉으로 연달아 치고 들어오는 삼 첩의 장력을 막았지만, 그 파괴력은 초전의 일격과 차원을 달리한다.
연호정이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스스로 원해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충격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에 가까웠다.
파아아아아앙!
당관이 무서운 속도로 연호정의 뒤를 쫓았다.
‘끝이군.’
자세가 무너진 건 물론 내공의 흐름도 다소 뒤틀렸다. 이번 일격으로 승부가 날 것이다. 당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퍼어어어엉!
당관의 눈이 커졌다.
철봉을 횡으로 누인 채 양발로 밀어 낸 연호정이 대각으로 날아가며 순식간에 내공을 다스렸다.
‘허!’
이 정도가 되니, 제아무리 연호정을 고깝게 보는 당관이라도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놈이 있나.’
당관이 철편을 휘둘렀다.
촤르르르르륵!
놀랍게도, 일 장 길이밖에 되지 않던 철편이 무려 오 장에 가까운 길이로 늘어나며 연호정의 몸을 휘감았다.
교룡쇄처럼 특별한 철로 만들어서가 아니었다. 작은 철편들을 잇는 투명한 선은 엄청난 장력과 탄력을 갖고 있어서, 당관의 내공력에 따라 길이를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주르르르륵!
연호정의 몸을 휘감은 철편이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현무공의 막강한 반탄력으로도 피부를 찢는 철편의 예리함을 막아 내긴 힘들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근육까지 손상을 입을 것이다.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시퍼런 빛을 뿜었다.
터어어엉! 퍼억!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그대로 묶어 땅으로 내던지려 했거늘, 어느새 날아온 철봉이 그의 손목을 후려쳐 철편을 놓치고 말았다.
‘허공섭물?!’
기가 막혔다.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법으로 회피하거나 공격을 막아 낸다.
설마하니 이 급박한 순간에 철봉을 이용해 철편을 놓게 만들 줄은 몰랐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전투 감각이었다.
파아아악! 콰앙!
천근추로 땅에 내려선 연호정이 재빨리 철편을 풀었다.
쿠웅!
거의 동시에 땅에 내려선 당관의 손에는 철봉이 들려 있었다.
“후욱.”
연호정이 호흡을 고르며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의 눈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놀라운 녀석이군.”
휘리리릭! 카앙!
철봉이 연호정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연호정 역시 철편을 돌돌 묶어 당관에게 던졌다. 당관이 철편을 향해 손을 뻗으니, 어느새 풀린 철편이 그의 소매 속으로 뱀처럼 빨려 들어갔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철편, 암기 아닙니까?”
당관의 눈이 커졌다.
“알고 있었느냐?”
“몇 방이나 할퀴었는데 당연히 알아야지요. 그 철편, 가주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수백 조각의 암기가 되어 적진을 휩쓸겠군요.”
그걸 꿰뚫어 봤단 말인가.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당관이 기세를 죽였다.
푸스스스.
불어오던 바람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뭐가 말이냐?”
“설마 그만하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저는 아직 가주님의 암기술도, 독공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만.”
당관이 차갑게 웃었다.
“네 부친의 얼굴을 봐서 참는 것이다. 본가의 비전 무공까지 쓰면, 넌 십중팔구 죽거나 폐인이 된다.”
와중에 무조건 죽을 거란 소리는 안 한다. 그만큼 연호정의 무공이 인상 깊었다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당가의 비전 무공을 봐 둘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당관은 내심 기가 막혔다.
“네놈, 그렇게 살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성치 못할 것이다.”
“어차피 제가 죽는다고 가주님께서 슬퍼하실 건 아니잖습니까?”
할 말 없게 만드는군.
“그래서, 어떠셨습니까?”
“뭐가 말이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제 그릇,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습니까?”
물끄러미 연호정을 주시하던 당관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네놈은 모용군과 비슷해.”
“기뻐해야 할지, 불쾌해해야 할지 모르겠는 평가로군요.”
“하지만 모용군과 다른 게 하나 있지.”
“그게 뭡니까?”
“적어도 칼을 뽑아야 할 때 주저함이 없다는 것.”
“음.”
“정치니 뭐니 하면서 잔머리 굴려 봤자,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다. 무림은 결국 힘이야. 그리고 그 힘을 써야 할 순간을 아는 자야말로 크게 될 수 있지.”
“…….”
“까마득한 역사를 지닌 대자연에서도 무수히 많은 가치가 변질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절대 변치 않는 하나의 원칙이 있으니, 그게 바로 약육강식이다.”
당관이 몸을 돌렸다.
“머리는 적당히 굴려라. 나름대로 쓸 만한 송곳니를 달고 태어난 놈이 혓바닥만 굴려 대면, 타고난 송곳니라도 무뎌지게 마련이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서역신녀와의 자리, 잡아 두겠습니다.”
“흥.”
당관이 이 층 창가로 뛰어오르며 말했다.
“정리는 다 해 놓고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