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야수도(野獸道) (4)
휘이이잉!
차가운 겨울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흔들었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희 파군각보다 훨씬 넓군요. 연무장으로 쓰기에 제격입니다.”
당관은 대답 없이 발끝으로 땅을 두들겼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청소가 잘 되어 있습니다. 흔적을 보아하니 내가고수가 쓴 것 같은데, 가주님께서 직접 청소하신 겁니까?”
당관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알 것 없다.”
신기한 일이다.
연호정이 보는 당관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격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잡일을 할 만한 성격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 넓은 지역을 직접 청소한 것 같았다. 그것이 새삼 놀라웠다.
‘심경의 변화가 크긴 큰 모양이야.’
그간 당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다만 아버지께, 확실히 사람이 달라졌다고만 들었을 뿐.
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아버지께 들은 것 이상이었다. 당관은 분명 예전과 달라졌다.
“한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武)를 통해 그릇을 확인한다……. 가주님 같은 초절정고수와의 비무라면 저 역시 만사를 제쳐 놓을 일이지만, 굳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죽을까 봐 겁이라도 나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연호정의 목소리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저는 그리 쉽게 죽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 죽이는 게 제 무공이라서요.”
“오만하군.”
“그저 제 무공의 특성을 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당관이 이내 건물 이 층 창가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우우웅.
보이지 않는 내공이 장중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과연.’
굉장한 무형지기(無形至氣)다.
연가의 대공자이자 천하제일 후기지수 벽산호장이 아닌, 흑제성주 흑암제의 눈으로 봐도 깜짝 놀랄 만한 내공력이었다.
‘허공섭물의 경지만큼은 거의 극치에 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군.’
내공의 질과 양을 떠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구결 자체가 대단했다. 저 정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재능 외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 단련과 열정이 필요한 법이다.
‘그때도 그랬지.’
흑암제로서 백도 무림맹과 손을 잡고 삼교와 전쟁을 벌일 적.
그때 당관이 보여 주던 내공력은 이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 섬세했다.
하지만 이 흐름을 만들어 내는 틀, 무형지기를 끌어내는 구결의 탄탄함만큼은 지금이나 그때나 별 차이가 없었다. 즉, 당관은 이미 성천십삼좌급에 올라설 준비를 착착 진행 중이라는 뜻이었다.
휘리리릭! 타악!
당관이 길쭉한 물건 하나를 잡아챘다.
연호정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철봉이군요.”
“받아라.”
휘익!
당관이 던진 칠 척 길이의 쇠봉을 받아 든 연호정이 봉의 중간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뜻밖에도 무게 중심이 아주 잘 잡힌 철봉이었다. 무게도 상당한 걸 보니, 강철을 통으로 써서 만든 철봉 같았다.
“그만한 대부(大斧)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기 위해선 각종 창봉술에 능해야겠지.”
“물론 그렇습니다.”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걸 써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물건이 왜 가주님 거처에 있는 겁니까?”
“알 바 아니다.”
당관이 턱을 치켜들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자세. 자신의 무공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자세였다.
“준비는 되었느냐?”
붕! 부웅! 부웅!
봉대 중간을 잡고 몇 차례 허공을 격해 본 연호정이 철봉을 견봉에 걸쳤다.
“되었습니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악!
당관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언제, 어떤 순간이라도 적습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 연호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연호정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공이라?!’
당관의 자존심이라면 적어도 삼 초는 받아 주고 시작할 줄 알았다. 실력의 문제를 떠나, 그에게는 그만한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느닷없이 선공이라니? 전혀 당관답지 않은 짓이었다.
후우욱!
접근 속도도 빨랐지만, 내치는 장력(掌力)의 속도 역시 수준급이었다.
연호정의 두 눈이 새파란 광채를 뿜어냈다.
터어어엉!
당관의 눈에서도 이채가 번뜩였다.
‘반탄력?’
삽시간에 무거운 기파를 발산하더니, 일직선으로 뚫고 들어간 회풍장을 그대로 튕겨 내 버렸다.
제아무리 가벼이 내친 일수라도 천하의 당가주가 구사하는 장법이었다. 이리 가볍게 쳐 낼 만한 일격이 아니었다.
‘재미있군.’
당관의 몸이 순간 흐릿해졌다.
파바바박!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빠르다.’
빨랐다. 그것도 엄청나게 빨랐다.
과거로 회귀한 후 무수히 많은 고수를 보았지만, 이 정도로 빠른 몸놀림을 보여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양천은 예외겠지만, 그는 회귀 이후 자신의 무공을 제대로 보여 준 적이 없었다.
‘후방 좌상단.’
연호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곳을 향해 철봉을 찔러 넣었다.
쩌어어엉!
맑으면서도 묵직한 쇳소리가 연무장 전체를 휘감았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봉첨에서부터 전달되는 힘의 여파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동시에 연호정의 안광이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뒤바뀌었다.
화르르륵!
곧장 치고 들어가 목줄을 움켜쥐려던 당관은 느닷없이 돌변한 연호정의 기세에 눈을 치떴다.
파바바바박!
조금 전 연호정이 당관의 엄청난 신법 조예에 놀랐다면, 이번에는 당관이 연호정의 보법 속도에 놀랐다.
‘빠르다?’
좌우를 무서운 속도로 찍어 가며 철봉을 휘두르는데, 그 속도가 자신에 비해도 큰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이 기파.
화아아아악!
뜨거운 화기와 함께 전달되는 화려한 살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이요, 절초였다.
실제 공격이 들어오기도 전에 맞설 용기를 꺾어 버리는 압도적인 기세의 무공이었다.
당관의 두 손이 어지럽게 휘둘러졌다.
쩌저저저저정! 화아아악!
철봉의 위력은 바위도 깨부술 만큼 막강했다. 그만한 위력의 공격이 무려 십이 연타로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당관은 그 모든 공격을 양 손바닥으로 하나하나 쳐 냈다.
휘이이이이잉! 퍼퍼펑!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압축되다가 무형의 충격파를 터트렸다.
번쩍!
몇 번의 부딪침으로 거리를 벌린 연호정이 일순 빛살 같은 속도로 접근해 왔다.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접근을 해? 장병기를 들고?’
어느새 봉첨이 자신의 목젖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양손으로 봉대를 쥐고 찔러 오는 일격은 단순하면서도 빠르고, 효율적이면서도 살기가 넘쳤다.
당관의 양손이 뱀처럼 철봉을 휘감았다.
콰앙!
휘감은 양손에서 무지막지한 발경이 터졌다. 그 묵직한 방어에, 연호정은 순간적으로 철봉을 놓칠 뻔했다.
‘아니, 놓는다.’
파라라라락!
철봉을 쳐 내며 후속 공격에 들어가려던 당관은 순간 연호정이 철봉을 놓아 버리자 깜짝 놀랐다.
그대로 제자리에서 빠르게 회전한 연호정이 철봉 끝을 발로 후려 찼다.
쩡!
초근거리에서 날아든 반격이었다. 두 자도 안 되는 거리에서 쏘아진 철봉에는 무시 못 할 내력까지 실려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 천재적인 실전 감각이다.
이번 일격은 당관이라도 막을 수가 없었다. 위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박자를 뭉개 예측 못 할 순간을 노린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당관이 철판교의 수법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퍼어어어억!
화살처럼 날아간 철봉이 당관의 앞섶을 훑고 지나가 땅에 꽂혔다.
당관의 눈이 형형해졌다.
‘힘이 아닌 기교와 실전 능력으로 상대하겠다, 이건가.’
감탄이 절로 나오는 대응이었다.
제아무리 연호정이 강하다 한들 아직 육대세가의 가주급은 아니다. 힘과 내력으로 부딪치면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다.
즉, 연호정은 승부가 시작되자마자 당관을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할지를 완벽하게 설계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난놈은 난놈이군.’
타아아앙!
상체를 뒤로 눕힌 당관이 엄청난 탄력을 이용, 전방으로 쏘아졌다.
철판교에 이은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수법이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런 식으로 대응하려 했던 것처럼, 이어지는 동작과 힘의 흐름이 부드러우면서도 즉각적이었다.
연호정과 당관이 맨손 육장으로 맞붙었다.
퍼퍼퍼퍼퍼펑!
두 사람의 권법과 장법이 초고속으로 부딪쳤다.
화르르르륵!
시뻘건 화기를 두른 채 휘둘러지는 연호정의 손에선 무서운 살기와 화려한 살초들이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퍼어어엉! 투투퉁!
반면 섬뜩한 기파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대응하는 당관의 손에선 음험한 살기와 독특한 살초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특성이 전혀 다른 무공끼리의 격돌이었다. 절대적인 위력을 지닌 일격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차 하는 순간 목숨이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무자비한 백타전(白打戰)이었다.
‘확실히.’
연호정의 폭발적인 권박을 상대하면서, 당관은 생각했다.
‘무공만 보면 딱히 머리를 쓰는 부류 같진 않은데’
연호정의 주먹을 막고 튕겨 내는 양팔은 진즉부터 저릿저릿했다. 연호정의 내공과 발경이 자신의 방어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위력적이라는 뜻이었다.
어디 안 뚫리나 보자, 마치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공격 하나하나가 박자를 무시하고 예측 못 한 각도에서 날아왔으며, 미리 대비할라치면 그때는 정직한 일격으로 또 한 번의 틈을 노렸다.
허(虛) 속에 실(實)이 있고, 실(實) 속에 허(虛)가 있다. 당관조차 암기로 단련된 안법(眼法)이 없었다면 최소한 세 번은 공격을 허용했을 정도로 변칙적인 공격술이었다.
물론 당관은 당가가 자랑하는 독도, 암기도 꺼내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충분히 봤다고 해도 되겠군.’
당관이 서서히 물러나며 연호정의 공격을 흘리려던 때였다.
쿠우웅!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콰르르릉!
불꽃처럼 타오르던 기파가 이내 엄청나게 무겁고 단단한 태산처럼 변했다.
‘……?!’
그 변화의 순간은 찰나와도 같았다. 이토록 상반된 기질로의 변환을 눈 깜빡할 새에 해내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놈.’
당관은 미증유의 일격이 다가오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설마하니, 지금까지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건가?’
화아아아아악!
연호정의 몸 전체를 휘감은 백색의 돌풍이 대기를 찢어 내는 소리가 마치 성난 야수의 포효와도 같았다.
콰아앙!
전진 일 보.
홍염육살공으로 심박수를 한계까지 올린 후 근육을 극에 이르도록 팽창시킨 연호정의 폭발적인 일격.
백호공의 호왕구벽세, 호포살(虎咆殺)이 그대로 당관의 상체를 휩쓸었다.
퍼어어어엉!
허공에 붕 뜬 당관의 몸이 삼 장 거리를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치이이이익!
당관의 양팔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호포살의 엄청난 발경을 무마시키기 위해 본신의 독공(毒功)마저 개방한 것이다.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난 일격!’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면 이번 일격에 정신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무서운 공격이었다.
“후우.”
연호정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선 곳 우측 땅에는 철봉이 사선으로 박혀 있었다.
그가 철봉을 잡아 뽑았다.
파삭!
땅이 쪼개지며 굵직한 철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우웅! 부우우웅!
철봉 중간을 잡고 몇 번 휘두른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이잉!
연호정의 두 눈에서 매서운 투기가 일렁거렸다.
치이이이익!
당관의 양팔에서 치솟던 연기가 서서히 녹색으로 물들어 갔다.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건만, 아직 남은 게 있단 말이지?”
“성격이 유연하질 못해서, 하던 게 중간에 끊기면 잠자리가 뒤숭숭합니다.”
당관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무(武)를 통해 그릇을 증명하라 하셨잖습니까? 뭘 어떻게 보실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끝까진 가 봐야 뭐라도 건지실 것 아닙니까?”
당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촤르르르르륵!
어느새 그의 소매 안에서 튀어나온 철편(鐵鞭)이 독사처럼 꿈틀거렸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네놈의 그 싸가지 없는 성격 말이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