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야수도(野獸道) (3)
“근래 자주 뵙는 것 같소이다.”
모용군의 말에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세간에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친구는 가까이 두되, 적은 더더욱 가까이 두어라.”
“허허.”
“가주께서 그 지대한 야심만 버리신다면, 어쩌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모용군이 헛웃음을 지었다.
“야심을 가진 것이 죄라도 된단 말이오?”
“야망이 죄는 아니지만, 그렇다면 그 야망을 무너트리려는 자들의 욕심도 이해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물론이외다. 전에 말씀드렸잖소? 이 사람은 그대들을 이해하오. 그저 그대들이 내 앞길을 막기에 쳐 내려 하는 것일 뿐, 개인적인 감정은 별로 없소이다.”
“별로라…… 아예 없진 않다는 것이로군요.”
“나도 사람이외다.”
제갈문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암요. 사람이니 욕심을 부리는 것이고, 사람이니 견제도 하는 것입니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해서, 오늘은 어인 일로 이 사람을 찾아오셨소이까?”
제갈문호가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엇이오?”
“근래 들어 호남 쪽이 상당히 시끌벅적하더군요.”
“으흠?”
모용군이 문서를 살폈다.
잠시 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귀주상회가 세력권을 넓히고 있다…… 그것도 꽤나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구려.”
“그렇습니다.”
“한데 이것을 어찌 나한테 보여 주는 것이오?”
“귀주상회에 관해서 조사를 좀 해 보았습니다.”
“그러셨소?”
“그랬더니, 귀주상회와 암암리에 거래 중인 문파들의 면면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본가 역시 귀주상회와 거래 중이외다.”
“예, 그러시더군요.”
“한데 그게 무슨 큰일이라도 되는 것이오? 무릇 능력이 되는 문파라면 상단과의 거래는 필수외다. 제갈세가 역시 그렇잖소?”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가주님께 부탁을 좀 드리려 합니다.”
“부탁?”
“예.”
“어떤 부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어지간해선 군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음을 알아주시길 바라오.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런 식으로 뒷조사를 한 것도 모자라 사람 면전에 대고 문서까지 들이미는 행위,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구려.”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귀주상회의 움직임이 워낙 급작스레 커져서 말입니다. 저희 측에서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겠소. 그래서, 부탁이 뭐요?”
“귀주상회에 줄을 좀 대 주십시오.”
모용군은 깜짝 놀랐다.
“귀주상회에 줄을 대 달라고?”
“그렇습니다.”
제갈문호는 무척이나 담담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살피던 모용군이 툭 던지듯 물었다.
“무림맹이요? 아니면 제갈세가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
“맹 차원에서 귀주상회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면 봉공회의를 열어 가주를 압박했겠지요. 굳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줄을 대 달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맞는 말이다.
‘무슨 수작이지.’
모용군은 제갈문호가 돈이나 권력 때문에 이런 부탁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없이 제갈문호를 응시하던 모용군이 일순 눈살을 찌푸렸다.
“정녕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른 척 잡아떼지 마시오. 제갈 군사가 귀주상회와 거래를 트기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든 본가의 거래 내역을 살펴보려 들 것이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곧장 공격에 들어가겠지.”
“귀주상회가 그리 신의 없는 집단이었습니까? 고객과의 거래는 극비에 부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작정하면 못 뚫을 것도 없겠지.”
“설령 가능하다 한들, 작정하기까지가 문제지요. 나아가 진심으로 귀주상회를 털어 버릴 생각이었다면, 가주께 줄을 대 달란 말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용군은 이미 제갈문호가 무엇을 노리고 이런 말을 하는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동귀어진을 목표로 하시겠다는 거 아니오?”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과연.’
권모술수라는 영역에서는 가히 성천십삼좌급의 능력을 발휘하는 모용군이었다. 자신의 노림수 중 하나를 단숨에 꿰뚫어 보는 능력, 심지어 가능성을 따지는 게 아니라 확신하고 있다.
극한까지 단련된 안목이었다. 이런 사람이 지극히 사사로운 야심에 불타 무림맹주직을 노리고 있다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적어도 그 정도 보험은 들어 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모용군이 냉소를 머금었다.
“말할 가치도 없군. 이만 나가 주시오.”
말없이 그를 보던 제갈문호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번 생각이나 해 보시지요. 꽤 과격한 술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주께 아주 해가 되는 제안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겠지. 내가 맹주직을 포기한다면야 이득이 되겠지.”
제갈문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아쉽습니다그려. 그대에게 의기(義氣)와 협심이 가득했다면, 우리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나가시오.”
“알겠습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십시오. 나는, 그리고 무림맹은 모용가주를 생각보다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요.”
“…….”
“상생(相生)과 화합은 기어이 절대 권력을 무너트리게 마련입니다. 이 사람은 가주께서 화합의 정치를 이해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제갈문호는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모용군이 검지로 탁자를 두들겼다.
“동귀어진이라…….”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느닷없이 찾아와 귀주상회에 줄을 대 달라? 만에 하나 제갈이 정녕 귀주상회와 거래를 트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본가를 공략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난 제갈에게 역공을 가하겠지. 그리고 그 사실이 맹에 알려지게 되면…….”
그래서 동귀어진이다.
두 가문이 서로를 견제하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게 무림맹에 알려지면, 두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제갈문호는 그렇게라도 자신을 막으려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용군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저 약삭빠른 인간이 내가 그걸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즉, 동귀어진 말고 따로 노리는 게 있다는 뜻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밖에 있는가.”
“예, 가주님.”
“화산 장문인께 기별을 넣게. 오찬이나 한 끼 하시자고.”
“알겠습니다.”
쿵.
주먹으로 탁자를 가볍게 내리친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뭘 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저쪽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겠지.”
* * *
당관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맹주 후보로 나서 주시라 말씀드렸습니다.”
“…….”
“안 되겠습니까?”
가만히 연호정을 노려보던 당관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이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꼭두각시라는 표현은 듣기 좋지 않군요. 그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강철의 방패가 되어 달라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은 좋군. 결국 네가 원하는 것은 나를 앞세워 모용군을 견제함과 동시에 그자의 눈을 잡아 두는 것 아니더냐?”
역시 육대세가의 가주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독하고 냉정하며, 와중에 자존심이 강하고, 때로는 다혈질적인 사람.
당관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성격이라 하여 당관의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 날카로운 안목은 어지간한 문파의 수장들을 한참이나 상회하고 있었다. 고집과 아집으로 점철된 사람일지언정, 능력만큼은 누구 못지않은 사람인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당관이 싸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묻고 싶구나. 설마하니, 네놈의 그 제안을 내가 받아들일 줄 알았더냐?”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수용하실 수도, 거절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요.”
“어째서지? 단순히 내가 모용군 그자와 갈등이 생겼다고 그런 생각을 한 게냐?”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타인과의 갈등 하나로 자존심 강한 당가의 수장이 이런 일에 선뜻 몸을 던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면?”
“다만, 무림이라는 정치판에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천의 권력자라면 수용할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보았습니다.”
당관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사천의 권력자라…… 묘한 표현이군.”
“가주님께서는 중간에서 주판을 굴리셨습니다.”
“…….”
“아닙니까? 제갈 측과 모용 측, 양쪽을 견주어 보며 어느 쪽과 함께해야 당가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않으셨습니까?”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잘도 아는군.”
“결국 가주님께서는 선택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렇게 되었지요.”
“그래서? 실패한 선택은 잊고, 너희와 손을 잡으라는 것이냐?”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아시잖습니까? 정치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한번 무대에서 내려온 자는 다시 정치판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주님께서도 사천으로 돌아가려 하셨던 것 아닙니까?”
“…….”
연호정이 양손을 벌렸다.
“두 번의 기회를 거머쥐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도 아니지요.”
“…….”
“저희와 함께 오르시지요. 무림맹이 세운 진짜 무대에 말입니다.”
“나더라 박쥐가 되어라?”
“박쥐보다 더 추하고, 더 더럽고, 더 지독한 사람이 되셔야지요.”
“뭐라?”
“저는 이미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 나이에 이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닐 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 당관이 연호정의 과거를 알았다면, 진정 크게 놀랐을 것이다.
연호정은 당관의 손에 죽었다.
정확히는 전생에 모용군의 명령을 받은 당관의 암기에 맞아 죽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람은 당관이었다.
말하자면 연호정에게 있어 당관은 철천지원수나 다를 바 없었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 해도, 연호정 입장에선 결코 없는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사건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연호정은 당관 앞에서 웃고 있었다. 나아가, 함께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이 변화, 이 인내가 얼마나 엄청난 심력을 요구하는 것인지 당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에 가주님께서 그러셨잖습니까. 독도 잘 쓰면 약이 되고, 약도 못 쓰면 독이 된다고.”
“…….”
“저희에게 약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적에게는 독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서역신녀와의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다?”
“기실, 그것도 가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굳이 저희를 거칠 필요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거래를 하자고 하신 것은, 함께하자는 뜻을 넌지시 비치신 것 아닙니까?”
물끄러미 연호정을 노려보던 당관이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
“도끼를 들고 오지 않았군.”
“예?”
“네놈이 항상 들고 다니는 그 징글징글한 도끼 말이다.”
“예. 연무장에 놓고 왔습니다.”
“그래?”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도끼가 없어서 졌다는 변명은 말도록.”
“……?”
“무(武)를 통해 네놈의 그릇을 보겠다. 따라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