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92화 (292/963)

292화. 야수도(野獸道) (2)

“아버지.”

마당에 쌓인 눈을 쓸던 연위가 허리를 폈다.

“잘 잤느냐?”

“예.”

연위가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단정한 옷차림의 둘째 아들이 보였다.

연위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무림맹의 일이 바빠서 그간 가문에 들러 보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가주가 가주로서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 모든 일을 둘째와 집안사람들이 대신 맡아 주었다. 물론 간간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가문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최종 결정권자 없이 가문을 이끌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많이 성장했구나.”

오랜만에 다시 보는 연지평은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져 있었다.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긴 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선명해졌고, 잘 빠진 턱선과 반듯한 이마가 놀랍도록 어른스러워 보였다.

팔다리도 길쭉길쭉한 것이 검법을 연성하기에 이상적인 체형으로 발달했으며, 옷에 가려진 근육 역시 잘 연마되어 강한 탄력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키도 눈에 띄게 자랐다.

자신이나 첫째보다는 조금 모자라지만, 가문을 나섰을 때와 비교하면 족히 반 자가 넘게 자랐다. 이 정도면 어딜 가도 잘 컸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검극사기와 철검대연이 벌써 완숙의 경지에 올랐구나. 그 연배에 그만한 숙련도, 유례가 없는 성취다.”

연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았다.”

“……감사합니다.”

연지평의 얼굴에 작은 놀라움이 일었다.

‘부드러워지셨다.’

연지평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엄격하고 냉정한 분이었다. 속정이 무척이나 깊으셨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분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은?

“몸은 괜찮으냐?”

“예? 아, 예! 실제로 다친 곳은 별로 없어서요.”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고수에게 있어 기(氣)란 범부가 인식하는 기와 전혀 다르다. 강한 의념으로 기를 조종해 신체 발달을 꾀하기 때문에, 마음에 큰 타격을 받으면 내공을 연성하지 못한 범부보다도 육신의 타격이 클 수 있다.”

“예에.”

“심신(心身)을 강건히 하거라. 비록 네가 원한 실전은 아니었겠지만, 결국 무림이란 그러한 곳이지. 굳이 무림만이 아니라, 세상이란 게 그러하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법이야.”

“실감했습니다.”

연위가 연지평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참으로 잘 이겨 냈다. 정녕 다 컸구나.”

연지평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웃는 얼굴로 어른이라 인정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에, 말 못 할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듯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 잘 떨쳐 냈으면 되었다. 마당을 마저 쓸고 나서 조식이나 같이하자.”

“예? 아! 제, 제가 할게요.”

“되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녀석이 무슨 청소냐. 옆에서 기다리거라.”

말릴 새도 없었다. 연위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에 쌓인 눈을 쓸었다.

삭! 삭!

한 번 쓸 때마다 가득 쌓인 눈이 파도가 치는 것처럼 담벼락 밖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연지평은, 아버지가 마당 청소를 한두 번 해 보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가문에서의 아버지는 언제나 업무에 바쁘셨고, 잘 시간까지 쪼개서 수련에 몰두하시는 분이었다. 집무실 청소는 당신께서 하셨지만, 막상 마당 청소를 하시는 모습을 보니 엄청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아버지는 눈을 쓸고, 아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성이길 한참.

“저…….”

“음?”

연지평이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께서도 성취가 있으셨던 거지요?”

연위의 안광이 형형해졌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알아보겠느냐?”

“예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기도가 훨씬 더 정돈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기(氣)가 잘 갈무리되었다는 느낌이랄까요.”

연위는 내심 아들의 안목에 깜짝 놀랐다.

제아무리 연지평이 성장했다 한들, 그것은 그 연배에 비해 뛰어난 성취일 뿐 자신이나 큰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데 그 엄청난 격차를 뛰어넘어 고수의 발전을 감각적으로 잡아채는 것은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산의 초입에 막 들어선 자의 눈에 팔부 능선에 오른 자가 보이겠는가?

아들은 그걸 본 것이다. 오히려 지금 연위의 경지면, 하수가 볼 때는 무공이 약해진 게 아닌가 착각해야 정상이었다.

“대단한 감각이구나.”

“예? 아, 아닙니다.”

“다만, 너의 그 부분은 고쳐야겠다.”

“……예?”

연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직 네 재능의 실체를 모른다. 스스로 무엇을 갖고 있고, 무엇이 가능한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것은 노력 이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장점을 키울지, 단점을 지울지도 판단할 수 있는 법이다.”

파아악!

마지막 비질로 눈을 완전히 걷어 낸 연위가 빗자루를 한쪽 벽에 세워 두었다.

“마침 잘되었다. 지금 네 실력을 보아하니 마침 과도기에 들어선 것 같구나. 맹에 있으면서 너 자신의 한계를 깨 보도록 하자.”

연지평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아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비로서 당연한 것이다.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예.”

“맹의 식당 밥이 제법 괜찮은 편이다. 가서 먹도록 하자.”

“예!”

서둘러 연위의 곁으로 다가온 연지평이 일순 주춤했다.

“그런데 아버지, 형님은……?”

“네 형 말이냐?”

연위가 피식 웃었다.

“새벽 나절부터 발바닥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고 있지. 비아와 함께 말이다.”

* * *

“수고들 했어. 아침 훈련은 이걸로 끝이다.”

연호정의 기운찬 외침에 멸사군 전원이 자리에 쓰러져 앓는 소리를 냈다.

“헉헉.”

“뒈지겠네, 진짜.”

“관절이 쑤신다, 관절이.”

“저 양반 저거, 간만에 몸뚱이 박살 났다면서 체력이 뭐 이리 좋대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군병 모두의 호흡도 빠르게 안정적으로 변했다.

하루하루 발전하는 것은 연호정과 묵비만이 아니었다. 멸사군 전원이 매시간을 치열하게 연마하고 있었다.

각자 재능과 노력의 차이가 있으니 발전 속도도 제각각이지만, 적어도 그들 중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체력 훈련도 따라올 수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묵비를 보았다.

“좀 괜찮아?”

묵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정도야 문제없죠.”

“좋아.”

“왜요? 훈련 더 하게요?”

“아니? 네가 시키라고.”

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그냥, 이런저런 일 때문에.”

“또 음흉하게 넘겨 버리네.”

“어허, 상관한테 말버릇이 너무 고약한 거 아니냐?”

“됐네요. 갈 거면 어서 가세요, 상관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심장은 어때? 잘 관리하고 있지?”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 서역신녀의 능력이 보통이 아닌가 봐요. 사실, 신경 쓰지 않고 있을 때는 전혀 몰랐거든요.”

“괜히 신의(神醫) 소리를 듣는 게 아니지. 중원의 의원들 모두가 합심해서 묻어 버리려는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어.”

“호오.”

“왜?”

묵비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를 받아들일 생각인가 보죠?”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야. 무림맹이지.”

“하지만 연 공자의 마음도 중요하죠. 연 공자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아버님과 군사님도 생각을 달리하실 텐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확실히 연호정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천하제일을 논하는 후기지수란 명성보다, 무림맹의 숨은 실세로서의 영향력이 열 배는 더 클 것이다.

연호정이 손을 흔들었다.

“볼일 다 보면 다시 올게. 그동안 애들 좀 봐줘.”

“알았어요.”

그렇게 연무장을 떠난 연호정의 곁으로, 어느새 제갈아연이 따라붙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제법 초췌해 보였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눈곱 꼈다.”

“……아이, 썅.”

제갈아연이 서둘러 눈곱을 떼어 냈다.

“야! 오랜만에 보는데 첫마디가 눈곱이라니!”

“낀 걸 꼈다고 하지, 그럼 작은 눈깔 두 개가 더 성장 중이라고 할까.”

“여전하네, 이놈 새끼.”

“피곤하면 더 자라.”

“안 피곤해!”

실제로 눈곱을 떼고 목을 몇 번 휘휘 저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묶어 버리니, 확실히 피곤한 기색이라곤 없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기한 기술이었다.

“잘 다녀왔어?”

“그렇지.”

“이번에 아주 제대로 당했다며?”

“다 들었냐?”

“후개한테 뽀로로 달려가서 마구 괴롭혔지. 나중에는 지쳤는지 알아서 살살 불던데?”

하긴 제갈문호 성격에 딸이라도 공무에 관한 사항을 알려 줄 리가 없었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화포까지 동원되었다며?”

“거기까지 들었으면 정말 다 아는 셈이로군.”

“화포는 군부의 결전 병기 중 하나야. 어지간한 인맥으로도 감히 건드려 볼 엄두를 내기 힘들어.”

“알아.”

“대체 의신회라는 조직, 관부의 어디까지 파고들어 있는 거지? 만일 맹 측에서 황궁에 이 문제를 제기하면 군부 전체가 뒤집힐 거야. 말하자면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화포를 내주었다는 뜻인데, 이 정도면 의신회는…….”

“아주 못된 놈들이지.”

“……그게 끝이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어차피 무림맹에서도 신중하게 움직일 테니, 당장 관부를 뒤집어 놓기도 힘들 거야.”

제갈아연의 어깨를 두들긴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가만히 연호정의 뒷모습을 보던 그녀가 소리쳤다.

“시간 되면 이따 저녁이나 먹어!”

“알았다! 지평이도 왔으니까 다 같이 먹자.”

“억?! 뭐야? 평이가 왔어?”

“그건 못 들었나 보지?”

“못 들었어! 언제 왔어? 많이 컸나, 지평이는?”

“엄청 컸더라. 여하간 이따 봐!”

“어어.”

그렇게 연호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제갈아연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호오, 이 녀석 얼마나 컸는지 궁금한걸? 내 동생 놈은 싸가지가 더 없어졌는데, 지평이는 그러지 않겠지?”

연호정이 아침도 거르고 찾아간 곳은, 놀랍게도 당가의 거처였다.

“흥미롭군.”

당관의 목소리는 여전히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 나를 찾아올 줄이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뭐가 말입니까?”

“네놈의 무례함이 도를 넘어섰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인제 와서 예의 차려 봤자 내가 널 달리 볼 거란 생각은 말라.”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면 뭐냐? 내게 바라는 거라도 있는 거냐?”

“물론입니다. 바라는 것도 없는데 이런 칙칙한 곳까지 찾아오겠습니까?”

뭉클뭉클.

당관의 몸에서 살벌한 기파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연위와의 관계, 그리고 딸과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그 역시 예전보다는 한결 차분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도 연호정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말이지 이 망할 놈의 싸가지는 대하면 대할수록 눈앞이 다 아찔해질 정도였다. 딸내미가 이런 놈과 친분이 있다니, 요새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내 기분을 망칠 작정이었다면, 완전히 성공했다.”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가라.”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아버지께 듣기는 했지만, 확실히 당관이 달라졌다는 걸 인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얘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역신녀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하셨다고요?”

“……한데?”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당관이 차갑게 웃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게 세상 이치 아닙니까?”

“확실해서 마음에 드는군. 그런 면은 네 부친보다 낫구나.”

“거래, 하시겠습니까?”

“무엇을 요구하는지부터 들어 보고 난 연후에 결정하겠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거렸다.

“무림맹주 선거에 후보로 나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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