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90화 (290/963)

290화. 준비 완료 (4)

한 달 뒤.

“후우.”

가볍게 내쉬는 한숨에 진한 입김이 섞여 나왔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군.”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해라…… 별 감흥 따위 느끼지 못했거늘, 확실히 해가 지나니 날이 더 추워진 기분이군.”

초절정고수, 전신의 기가 융통무애하여 진즉에 한서불침의 경지에 들었지만, 한편으론 내공의 질과 양이 높을수록 감각이 예민해진다.

기실, 감각만 보면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추위에 별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당관은 느꼈다. 괜스레 더 추워진 것 같다고.

어쩌면 그것은, 날씨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 때문일 수도 있었다.

‘마음이라.’

한 송이, 한 송이 눈이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당관이 피식 웃었다.

“시답잖군.”

참으로 재미있다. 천하의 사천당가의 주인이 이런 같잖은 감성에 젖을 줄은 뉘라서 생각이나 해 봤겠는가.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생각해 봐야겠군.’

당가로 돌아가면, 언제든 모용군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그게 무서워서 돌아가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용군의 잔머리가 보통이 아닌 것을 알기에, 괜히 신경 쓰여서 돌아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았다.

‘무림맹에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입맹도 했고, 봉공직도 얻었고, 중간에 망가지긴 했지만 나름대로 존재감도 비춰 줬으니, 이만하면 충분한 성과를 얻은 셈이지.’

애초에 거기까지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무림맹이고 자시고, 결국 당가는 사천의 주인이었다. 중원의 다른 지역 사정 따위야 알 바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무림맹으로 온 것은, 그 나름대로 변화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이야.’

당관이 어깨를 털었다.

쌓인 눈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며 당관의 눈빛 역시 본래의 독하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것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사천의 제왕이다. 천하 그 누구도 본가가 주는 공포와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어. 즉, 본가는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세력이야. 그거면 충분해.’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누가 맹주가 되는지 구경이라도 하고 싶긴 하다만.’

후우우.

뱉어 낸 숨결에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훅 하고 녹았다.

“슬슬 짐이나 싸 봐야겠군.”

당관이 뒷짐을 지고 등을 돌렸다.

그때였다.

‘…….’

당관의 걸음이 멈추었다.

당가주 특유의 독하고 냉정한 눈빛이 번뜩이던 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박. 사박.

쌓인 눈을 밟으며 걸어오는 하나의 인기척이 있었다.

무척이나 가볍고 경쾌한 발소리였다. 그러면서도 차분함이 돋보이는 걸 보니, 발소리를 낸 사람의 성품 역시 쉬이 흔들리지 않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슥.

그렇게 걸어오던 사람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삭. 삭. 삭.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어찌나 무거웠는지, 눈송이들이 땅에 쌓이는 소리가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가시려고요?”

당관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반응을 상대가 알아차렸다는 것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못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실 것 같네요.”

차분하고도 차분한 목소리였다.

당관이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제 딸이 있었다. 암천의 신녀라 불리며 당가제일의 후기지수로 명성을 휘날렸던 희대의 천재가.

당관은 말없이 당상아를 바라보았다.

당상아가 재차 말을 이었다.

“수행원도 없이 홀로 떠나시면 심심하지 않으시겠어요?”

“나는 당가의 가주다.”

“알아요.”

“…….”

“가시려거든, 날이 좀 풀린 뒤에 출발하시지 그러세요? 사방이 눈이라 여행길이 제법 고단하실 텐데.”

당관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 뻔했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라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며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가만히 당관을 바라보던 당상아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이 제법 춥네요.”

“…….”

“술은 다 드셨을 것 같고, 찻잎 남은 건 있나요?”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담담하기 이를 데 없던 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음을 눈치챈 그였다.

그 앞에서, 자식 앞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좋은 찻잎이 있지.”

당상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한잔 마실 수 있을까요?”

“…….”

침묵하던 당관이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차를 탈 줄 모른다. 마시고 싶으면 네가 타 오거라.”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당관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두 잔.”

* * *

모용군이 반색하며 일어났다.

“왔느냐.”

“예, 형님.”

모용우의 안색은 다소 창백했다. 여러모로 많이 피폐해진 몰골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열흘 전, 입맹했을 당시와 비교하면 확실히 많이 나아진 듯했다. 하긴, 그때는 기우희를 제외한 모두가 극한까지 지친 상황이었다.

“치료는 더 안 받아도 되겠느냐?”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모용군이 모용우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밥은 먹고 오는 길이냐?”

“예, 형님. 의방에서 주는 영양식으로 몸을 보했습니다.”

“잘했다. 제아무리 무공의 고수라도 결국 사람이야. 다쳤을 때는 의원 말을 듣는 것이 제일이지.”

잠시 후, 모용군이 차를 내왔다.

“한잔 마셔 보거라. 지친 심신을 편안하게 달래 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마셔 보니, 확실히 차에 정성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찻잎, 같은 순서로 우려도 맛과 향이 다른 것은 다 정성의 유무 때문이리라.

모용군이 한숨을 쉬었다.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설마하니 네가 이렇게까지 고생할 줄은 몰랐다. 연호정 그놈도 있고 해서 마음 놓고 보냈더니만, 별 잡스러운 놈들까지 죄다 끼어들 줄이야.”

모용군의 눈에서 솔직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는 모용우를 비롯한 일행을 습격한 자들을 누가 사주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벌레 같은 놈들이.’

모용군은 다짐했다. 의신회의 뿌리를 뽑아 무림맹의 위엄을 만천하에 보여 줄 것이라고. 또한, 모용세가의 핏줄을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알려 줄 것이라고.

“내, 안 그래도 하남의 의원들을 족쳐…….”

“형님.”

“음?”

모용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들에 관해서는, 이제 되었습니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되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감히 무림맹에서 파견한 호위들을 공격했으니, 이는 절대로 좌시해서는 안 될 문제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습니까?”

“……?”

“맹주.”

“……!”

모용군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죽었다면 모를까, 아니 설령 제가 죽었다 하더라도 형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신경 쓰셔선 안 됩니다.”

“…….”

“새해가 밝았습니다. 아마 내달까지 눈이 펑펑 쏟아지겠지요. 하지만 이 눈발이 약해지고,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잠잠해지기 시작하면, 이제부터는 진짜 전쟁의 시작입니다.”

“……전쟁이라.”

“그렇습니다.”

모용우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정점에 오르셔야지요.”

순간 모용군은 손등을 타고 오르는 소름이 전신으로 번지는 것을 느꼈다.

동생의 입에서 나온 한 단어, 정점.

그 단어가 귀에 꽂히는 순간, 지금껏 쌓아 두었던 분노가 모조리 증발하고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환상처럼 펼쳐지는 듯했다.

“그들에 관해서는 군사님께 맡기시지요. 군사님이 알아서 잘 처리하실 겁니다. 이제부터 형님은 맹주의 위(位)에 오르실 수 있도록, 슬슬 고삐를 쥐셔야지요.”

“으음.”

“별일이 없는 한, 이번 대의 맹주가 향후 십수 년간은 무림맹을 통치하게 될 겁니다. 물론 말이 통치지, 맹주라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백도 무림에서 최고의 권력자라는 데엔 이견이 없지요.”

“그래, 그렇지.”

모용우의 눈이 번뜩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시면, 못해도 십오 년 이상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형님께서는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안 그래도 여러 준비를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다만 동생이 크게 다쳤기에 열불이 터져 씩씩대고 있었을 뿐이다.

한데 모용우가 먼저 이렇게 나와 주니, 모용군 역시 나름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섭섭하지 않겠느냐?”

“무엇이 말씀입니까?”

“이 우형이 동생의 복수도 제대로 못 해 주는 것 말이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제 복수는 오로지 제 몫입니다. 그 정도 그릇은 됩니다, 형님.”

“허허허.”

“천하에 우뚝 서십시오. 그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래, 그게 우선이지. 나를 이해해 주어 고맙다.”

“별말씀을요.”

두 사람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어쩐지 반 각 전보다 양이 늘어난 것만 같았다.

“새해라.”

* * *

“후우우.”

마치 연초라도 피우듯 허연 김이 뭉텅이로 쏟아져 나왔다.

“운공이 끝났느냐?”

“예, 아버지.”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을 보며 연위가 혀를 찼다.

“제아무리 한서불침이라지만, 몸도 정상이 아닌 녀석이 굳이 야외에서 눈까지 맞아 가며 운공을 할 것은 또 무어냐.”

그가 연호정의 어깨에 쌓인 눈을 탈탈 털어 냈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평이는요?”

“아직 자고 있다. 다행히 너나 비아만큼 다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충격을 받긴 한 모양이다.”

“아마 그럴 겁니다. 단호한 칼질이었지만 미세한 망설임이 묻어 나왔어요. 많은 피를 본 만큼, 몸에 입은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훨씬 더 클 겁니다.”

“그래.”

연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열흘 전을 생각하면 연위는 지금도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자식들. 연호정만이 아니라 연지평 역시 극도로 지쳐서 맹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모르는 상황에서 온갖 난전을 헤치고 돌아온 자식들을 보며, 연위는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사실 강호의 무사로서, 적을 죽이고 피를 보는 것은 숙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식은 다른 법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또 부모 마음이었다.

물론, 두 아들은 이미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해 버렸지만.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위가 연호정의 등을 두들겼다.

“확실히 네가 강골은 강골이구나. 비아는 아직도 치료를 받고 있다.”

“걔가 약골인 게 아니고요?”

“이놈아.”

“클클.”

피식 웃으며 아들을 보던 연위가 조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녕 의원에게 가 보지 않아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이 정도면 얼추 닷새 안에 다 낫겠는데요.”

“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다만.”

“그리고 이제 저희도 슬슬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준비?”

“예. 새해가 지났잖습니까?”

연위의 얼굴이 굳어졌다.

“……맹주.”

“그렇습니다. 그리고 맹주 선거 외, 더 많은 것에도 신경을 써야겠지요.”

“삼교를 말함이냐?”

“그렇습니다.”

평상에 쌓인 눈을 치우고 앉은 연호정.

그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 모일 사람은 다 모였습니다.”

신화교주의 사생아인 기우희가 맹으로 들어왔다.

의신회라는 조직이 세상에 존재함을 알았으며, 그들이 관부와 뿌리 깊은 유착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묵룡부의 전력을 파악했고, 삼교가 이미 중원을 삼키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라는 것도 알았으며, 무림맹의 체계가 이제는 완벽하게 자리를 잡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해, 무림맹 최초의 맹주가 될 사람을 뽑는 선거가 시행된다.

나아가 연호정은, 그 모든 인연과 사건이 하나로 모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올 한 해, 꽤 고달픈 일 년이 될 것 같습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