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준비 완료 (3)
“오셨습니까?”
모용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갈문호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부득불 예까지 오시라 했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해서, 어쩐 일이오?”
아직 일전의 감정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생각보다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는 그였다. 이미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 터놓고 얘기했기에, 굳이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않는 것이다.
제갈문호가 한쪽 문을 가리켰다.
“모용가주께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부탁이라?”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기감을 부풀렸다.
‘…….’
서서히 올라가는 입꼬리.
“이런.”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군사답지 않게 꽤 무리하신 모양이외다.”
제갈문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림맹의 일에 무리하고 말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외다. 하지만 알고 계시겠지? 이 일, 다른 봉공에게 들어가면 꽤 거센 질책을 받게 될 것이오.”
“한 분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한 분?”
“그렇습니다.”
모용군의 표정이 묘해졌다.
“설마하니 연가주는 아니겠지? 그 사람, 제아무리 군사를 믿는다 해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사람이오. 이 일을 알았다면 당장 봉공들에게 알렸을 텐데?”
“그건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가주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지요.”
“허허, 그리도 손발이 잘 맞는 사람이 드물 텐데. 하면 누구에게 말씀을 드렸을꼬?”
“맞춰 보시겠습니까?”
제갈문호는 끝까지 담담한 표정을 고수했다.
물끄러미 그의 표정을 보던 모용군이 입맛을 다셨다.
“설마, 공공대사요?”
“그렇습니다.”
“엄청나게 대담하군.”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당장 혼란이 드리워질 거라면, 봉공 중 가장 영향력이 강한 분께 말씀드려 후폭풍을 막아 보는 수밖에요.”
과연 만만치 않은 사람이야.
저 처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내린 판단이라는 걸 알기에 대단했고, 동시에 씁쓸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자였다면, 저 좋은 머리를 진즉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이런 돌발적이고 과격한 수법을 쓸 때조차도 제갈문호는 무림맹을 위했다.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군사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다만 아쉬울 뿐이었다.
제갈문호가 자신의 휘하에서 활동했다면, 지금처럼 조용히 지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자기 자신을 위해 짖는 자는 다루기가 쉽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고개를 조아리는 자는 언제고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제갈문호는 철저하게 후자형의 인간이었다.
“그래, 어찌 되었든 최악은 면한단 말이지.”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해서, 이 사람이 저 안에 들어가서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제가 어지간한 건 다 털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정보 몇 가지는 말해 주지 않더군요.”
“그거 재미있는 말이로군. 이 정도 험한 일까지 벌인 분께서 쓸데없이 온정을 베푸신 모양이오.”
“그렇다고 고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필요하다면 해야지.”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주를 부른 것이고요.”
“무슨 말씀이오?”
“이런 부분에 능하시잖습니까? 상대를 협박하고 겁박하여,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방법 말입니다.”
꽤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이 뒤는 내가 해라?”
“부족한 군사에게 큰 가르침을 내려 주신 분이니, 뭐가 달라도 다르리라 믿습니다.”
“내 손에도 먹을 묻힐 심산인 듯하오. 보험이라도 들어 두겠다는 것이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모용가주는 보험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모용군이 입맛을 다셨다.
“그건 꽤 자존심 상하는 말이로군.”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시간은 다소 걸릴지언정 우리 쪽에서 처리하기를 바라십니까?”
물끄러미 제갈문호를 바라보던 모용군이 이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전문가가 있는데, 굳이 군사께서 고생하실 필요는 없지.”
제갈문호가 마주 웃었다.
“일각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덜컹!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간 모용군의 눈에, 의자에 꽁꽁 묶인 의원 여럿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곡이 있었다.
“호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또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하 의원.”
하곡이 소리쳤다.
“모용가주?!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죄 없는 의원들을 무작위로 연행하다니요!”
“죄가 없다라…… 글쎄, 그거야 조사하기 나름 아니겠소?”
“조사라니? 대체 무림맹에 무슨 권한이 있어서……!”
쾅!
모용군이 문을 거칠게 닫았다.
깜짝 놀란 하곡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에게는 권리가 있소이다.”
지이잉. 지이이이잉.
시퍼런 뇌광이 모용군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그물처럼 연결했다.
모용군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너희 같잖은 의원 나부랭이들에게 농락당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너희 같은 개미들을 밟아 죽일 권리도.”
하곡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모용군이 하얗게 웃으며 전광 가득한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비밀이 많으신가?”
파지지지직!
* * *
푸화아악!
잘려 나간 손목에서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스르륵.
기가 막힌 검법과 신기(神技)에 이른 몸놀림으로 연호정에게 몰려든 적들을 쓸어 버린 연지평이 산뜻한 움직임으로 땅에 내려섰다.
“평아! 너?”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달빛 때문인지 얼굴이 유독 창백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이목구비가 연호정에게 크나큰 놀라움을 선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묵비 역시 그 청년이 연지평임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평아!”
순간 연호정이 광룡부를 휘둘렀다.
퍼어억!
무지막지한 일격에 습격자 하나의 몸통이 반으로 쪼개졌다. 은밀하게 연지평을 노리던 살수였다.
연호정이 외쳤다.
“인사는 나중에! 일단 이놈들부터 다 처리한다!”
“예, 형님!”
급박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지만, 연지평의 목소리를 들은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 컸구만.’
외형도 외형이지만, 그 목소리부터가 삼 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낮고 차분해진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아직 특유의 앳된 느낌은 남아 있지만, 이제는 정말 건실한 청년이 다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력까지도.
파바바바박!
놀라운 순간이었다.
등장과 동시에 하늘 높이 날아올라 적도들의 팔목을 날려 버린 것도 그렇지만, 지금 역시 연지평은 망설임 없이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푹! 서걱! 퍼버벅!
연지평의 검법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절도가 있다거나, 모용우의 검법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계를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놀라우리만치 위력적이었다. 검력(劍力) 자체가 강한 게 아니라, 최소의 힘과 동작으로 적의 목숨을 앗아 가는 실전적인 검도(劍道)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짐했구나.’
연호정은 연지평이 지난 삼 년 동안 얼마나 가혹한 수련을 했는지, 실전을 겪어 본 적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었다.
연지평의 천성은 변하지 않았다. 실전을 겪어 봤든 겪어 보지 않았든, 동생은 적을 죽이는 데에 결코 능하지 않다.
그런 동생이 이를 악물고 적들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그 자신의 천성과 신념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바로 형이 있기 때문에 연지평은 살수를 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꽈악!
양손으로 광룡부를 쥔 연호정이 무서운 기세로 팔을 휘둘렀다.
번쩍!
반월(半月)을 그린 광룡부에 적들의 상체와 하체가 반으로 쪼개졌다.
쾅! 퍼억! 콰아앙!
동생의 등장에 힘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더 다급해진 것일까?
연호정의 무공은 종전과는 또 다른 위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교룡쇄를 상체에 두르고 오로지 광룡부만으로 적들을 쳐 죽이는데, 그 속도와 파괴력에 장강의 강물마저도 뒤집힐 것 같았다.
“형님!”
빠각!
후방을 보지도 않은 채 휘어 차는 각법으로 적의 머리통을 날려 버린 연호정이 외쳤다.
“난 신경 쓰지 마! 아차 하다 당한다!”
“예, 예!”
“눈으로 주변을 확인하려 하지 마라! 모든 오감을 활용해! 오감을 제대로 쓰면 공기의 흐름을 읽고 적의 공격선까지 예측할 수 있다!”
“예!”
전투 도중임에도 연지평은 연호정의 가르침을 단숨에 받아들였다.
번쩍!
평범한 장검에 시린 검극사기는 극한의 절삭력과 넘치는 검력을 만들어 내며 적들의 진입을 원천 봉쇄 했다.
적을 살상하는 검도에서, 적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내는 방어의 검도로 뒤바뀐 것이다.
오감을 극도로 예리하게 세운 결과였다. 주변에서 몰아치는 적들의 공격이 너무 많고 절묘해서, 일일이 적을 죽이는 것보다 공격을 차단하는 것이 먼저라고 몸이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지평의 그런 모습을 보며, 연호정은 쾌재를 불렀다.
“바로 그거야!”
콰앙!
혈익휘천으로 단숨에 하늘 높이 날아오른 연호정이 연지평의 방어선을 깨부수려는 적도들을 향해 광룡부를 휘둘렀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십수 명의 흑의인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연호정이 외쳤다.
“묵비!”
퍽! 퍼버벅! 퍼억!
광룡부가 만든 충격파에도 죽지 않고 날아간 흑의인들은, 땅으로 추락하기도 전에 머리통이 꿰뚫려 죽었다.
묵비의 참전이었다. 연지평의 방어력과 연호정의 공격력이 합쳐져 적이 극도로 당황하는 와중이었다. 이제는 체력을 구비하는 것보다 단숨에 적들을 몰아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전술이 될 것이다.
시기적절하게 치고 빠지는 순간을 읽어 내는 능력이 실로 돋보였다. 묵비의 전투 능력이 비로소 달인의 경지에 올랐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연호정이 재차 외쳤다.
“모용 군장! 강량과 기우희를 데리고 우회하여 돌아가! 지평! 일행의 후미에 붙어서 적들의 공격을 모조리 차단해! 그리고 묵비!”
파아아악!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연호정의 등 뒤에 선 묵비가 홍련궁의 시위를 당겼다.
연호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심장은 괜찮나?”
“벌렁벌렁해요! 왜 연 공자랑 함께 다니면 자꾸 이런 일이 터지는 걸까요!”
“야, 인마! 이게 내 탓이냐! 그리고 이 정도 일은 예상했잖아!”
“앞으로 이런 임무 맡으면 혼자서 해요!”
“따라온 건 너였어, 이 자식아!”
치리리링!
상체를 휘감은 교룡쇄의 일부를 풀어 좌측 주먹에 감은 연호정이 힘차게 좌권을 뻗었다.
콰앙!
교룡쇄를 장갑처럼 두른 연호정의 주먹은 그 자체로 살인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그 주먹에 맞고 튕겨 나간 적이 십여 명이나 되는 흑의인들을 쓰러트리고 멈추었다.
연호정이 외쳤다.
“지평이 왔으니까 목숨 한 번만 더 걸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단 한 명의 고수, 한 손이 모자라 억지로 적을 다 섬멸하려 했지만, 연지평이라는 믿음직한 검사가 참전한 이상 아군을 믿고 눈에 보이는 적들부터 모조리 쓸어 버린 후 나중에 접선하는 방법을 쓰는 게 합리적이었다.
연호정은 연지평을 떠올렸다.
그 믿음직한 눈빛을, 차분해진 검법을,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믿을 수 있다. 지금의 지평이라면.’
풍덩! 풍덩!
묵비가 외쳤다.
“적들이 강물로 도망가고 있어요!”
“우회하려는 거야! 잘 됐어! 그대로 잡는다!”
연호정의 광룡부가 벼락처럼 휘둘러지고, 묵비의 홍련궁이 무서운 속도로 화살들을 난사했다.
퍼퍼퍼퍼퍼퍼펑!
장강의 수면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다음 날 아침.
동쪽으로 흐르는 장강의 수색은 이번 해에 들어 가장 탁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