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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87화 (287/963)

287화. 준비 완료 (1)

사흘 후.

“자,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합시다.”

어제저녁 출발한 일행은 장강 앞까지 도달했다.

행장을 풀고 쉬고 있는 와중, 기우희가 묵비에게 다가갔다.

“저기…….”

“네?”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묵비가 눈을 끔뻑였다.

“저, 저요?”

“네.”

“아, 저는 멸사군 소속 부장 묵비라고 합니다.”

“그럼 묵 부장님이라고 부를게요.”

“아, 네.”

“다름이 아니라, 묵 부장님. 현재 내상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태죠?”

“조금 남아 있긴 합니다만…….”

“조금이 아니에요.”

“네?”

기우희가 다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묵 부장님은 놀라운 무위의 소유자예요. 제가 보기에 두 가지의 내공심법을 겸용하여 수련하고 계시는 듯한데, 맞나요?”

묵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십 년이 넘도록 수천 명의 환자를 돌봤어요. 그중 상당수는 무인이었지요. 어지간한 건 한눈에 알 수 있어요.”

“아!”

묵비는 새삼 감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기우희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간간이 뿜어져 나오는 외기(外氣)의 흐름을 볼 때 좋은 내상약으로 내부를 다스리신 것 같은데, 겉으로는 괜찮아진 것처럼 보여도 심장(心臟)이 받는 부담이 제법 강해졌을 거예요.”

“네, 네?!”

“한번 진맥해 봐도 될까요?”

묵비는 저도 모르게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아, 네. 여기…….”

묵비의 맥을 짚은 기우희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렇군요.”

“많이 안 좋은가요?”

“묵 부장님의 무공 근간은 동공(動功)이 아닌가요?”

“마, 맞아요.”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수련하셨군요. 하지만 그래서 문제예요. 상상을 초월하는 수련으로 근육의 밀도가 놀랍도록 향상되었고 심폐 능력 역시 인간의 그것을 뛰어넘었지만, 문제는 심장이 다른 장기에 비해 과발달한 형상을 취하고 있어요.”

“헉!”

“그래도 다행인 것은, 또 다른 내공심법으로 인해 오장육부의 균형이 나름대로 맞춰지고 있다는 거예요. 만약 그 내공심법이 아니었다면, 생명이 위험하진 않았더라도 몇 년은 홍역을 치러야 했을 겁니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또 다른 내공심법이라 함은 바로 연호정이 전수한 홍천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강호에서 손에 꼽는 내공심법은 아니지만, 축기와 내공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선 홍천기만 한 심법이 없었다.

그 홍천기 덕에 오장육부의 균형이 맞춰지고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몸을 혹사하여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 사람들이 종종 겪는 일이에요. 심장 역시 커다란 근육으로 만들어진 기관인 만큼, 심장근(心臟筋) 역시 과발달하여 큰 문제를 일으키는 거죠.”

“그렇군요…….”

“내공을 수련하면 오장육부가 알아서 균형을 맞추기에, 내가고수(內家高手)들에게선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어요. 하지만 묵 부장님은 동공 위주의 심법을 수련하셨기에, 이 균형이 맞춰지지 않은 것 같아요.”

“큰 문제는 아닌 거죠?”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환자를 안심시키는 미소였다. 그 미소만 보면 천성이 의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이에요. 말씀드렸듯, 내공량 자체가 원체 대단해서 이대로 가도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또 다른 내공심법 덕도 있고요. 다만 이번에는 마음이 급하셨는지, 내상을 너무 급하게 다스리신 것 같아요.”

기우희가 품에서 침통을 꺼내 들었다.

“잠시 침을 놔 드릴게요. 한 시진 정도는 몸이 나른하거나 감각이 무뎌질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알아서 개선될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곳까지 안전하게 데려와 주신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는걸요.”

그렇게 묵비는 기우희에게 치료를 받았다.

두 사람을 보던 모용우가 연호정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뭐가?”

“기 의원과 담판을 지었다고 들었네. 정확한 얘기는 나중에 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한데 지금 보니, 아무래도 이쪽으로 돌아선 것 같은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음?”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더군.”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연제는 그 제안을 수락했고?”

“그래.”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모용우가 일순 미소를 지었다.

“잘 참았구먼.”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참아 준 건 없어. 그저 형님 말마따나, 저치에게도 나름의 사정이란 게 있어 보이더군. 마음 같아선 당장 머리통을 깨 버리고 싶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니까.”

“그래, 그래서 잘 참았다고 한 걸세.”

“어차피 오늘 안에 결정을 지어야 해. 자정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했으니.”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은 나 역시 바라지 않네. 그래서도 안 될 일이고.”

“흥.”

“조금 낯 뜨겁겠지만, 연제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일세. 그러나 자네가 조금만 더 신중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어.”

“…….”

“난 연제가, 앞으로도 필요한 순간에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고맙군. 보답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나 역시 선물 하나 주도록 하지.”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지 마라. 그 말을 하고 싶은 것 아닌가?”

“……이제는 내 마음도 읽어?”

“연제한테 하도 많이 들어서 인이 박여 버렸다네. 하지만 말일세. 자네 말이 맞네. 중요한 순간에 망설여서는 안 되지.”

“알면 됐어.”

“그리고…….”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지금 할 말은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따로 분위기를 잡고 말할 내용도 아닌 듯해서 말하네.”

“음?”

“무림맹주 말일세.”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우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연제가 내게 ‘그들’의 정체를 알려 준 이후, 홀로 생각해 보았네. 과연 내게 무림맹주가 될 자격이 있는지.”

“있어.”

“하하,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만.”

모용우가 맑은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여전히 나는, 무림맹주라는 자리가 너무나도 부담스럽네. 그럴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고.”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라면 됐어. 계속 그렇게 생각해도, 당장은 어쩔 수 없지.”

“이 우형을 계속 설득하겠단 말인가?”

“전부터 얘기했잖아? 그렇게 만들 거라고.”

“내가 그러기 싫다고 해도?”

“…….”

“내가, 무림맹주라는 자리에 절대 앉지 않겠다고 해도?”

“……그래.”

“왜지? 연제는 타인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는 사람이잖은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듯하면서도 차가워 보이는 그 미소가 모용우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형님이 아니면, 중원이 불바다에 잠길 것 같거든.”

“…….”

“절대적인 위협이 다가와도 사람의 자유 의지는 존중받아야 마땅하지. 하지만…… 예외는 존재해.”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네. 대체 연제는 나의 무엇을 보고 날 맹주 자리에 앉히려 하는 겐가?”

“사람.”

“……?”

“모용우라는 사람, 그 자체를 보고.”

“이보게, 연제.”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임무 중이야. 지금은 여기까지 하자고. 남은 얘기는 맹으로 돌아가서 하도록 해.”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세.”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강량이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야, 인마. 뭘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어?”

“커험! 그럴 수밖에요. 한쪽은 치료받고 있지, 다른 한쪽은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지, 저는 할 일이 없는걸요?”

“이 새끼 이거, 시간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 약간의 시간도 쪼개서 검을 휘두르든가 해야지, 멀뚱멀뚱 쉬고 앉았어? 이거 안 되겠구만.”

“컥! 또 수련입니까?!”

“피는 안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연호정은 강량을 데리고 인근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모용우는 탄식을 토해 냈다.

‘연제. 가끔은 말일세, 자네의 그 맹목적인 신뢰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네.’

모용우는 진심으로 연호정이 좋았다.

그것은 연호정이 뛰어나서도, 어떠한 계기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애초에 연호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의형제를 맺자 말한 건 자신이었다.

과정과 결과가 바뀌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모용우는 그런 것쯤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연호정은 자신의 하나뿐인 의동생이었다.

다만, 가끔은 부담스러웠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해서 섭섭했다.

연호정은 분명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자신을 불신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이 납득하기 쉽지 않은 일을 밀어붙일 때는 한 번씩 섭섭하기도 했다.

모용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는 하늘, 차가운 밤공기와 맞물린 붉은 하늘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그래도 기다리겠네. 혹여나 자네가 날 배신하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절대 자네를 배신하지 않아.”

그날 밤, 자정.

“묵비는?”

“괜찮아요. 앞으로 조금씩만 신경 쓰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오장육부의 균형이 완벽하게 들어맞을 거예요.”

“다행이군.”

철썩!

장강은 넓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너비가 어찌 바다에 비할 수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땅에서 보는 장강은 바다를 연상케 할 만큼 컸다.

특히나 별빛 가득한 밤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쿵.

광룡부를 땅에 세워 놓은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단은 내렸나?”

기우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결단을 내렸어요.”

어떤 결정을 했든, 표정만 보면 속이 시원한 것 같았다. 적어도 자신의 판단에 후회는 없어 보였다.

연호정은 말없이 기우희를 바라보았다.

기우희가 눈을 감았다.

“저는 제가 속한 조직의 행태를, 어릴 적부터 증오했어요. 그리고 알고 있었어요. 그들이 옳지 않다는 걸,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저는 같은 마음이에요.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교를…….”

그때였다.

“쉿.”

“……?”

“조용.”

“네?”

연호정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르륵. 스르륵.

나무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모용우의 손이 탕마대검으로 향했다. 앉아서 운공조식을 하던 묵비 역시 요대의 화살통을 매만지고 있었다.

강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그들과 같은 날 선 감각은 없었지만, 슬슬 전장의 공기를 읽기 시작한 그였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기우희.”

처음으로 이름 석 자를 그대로 부르는 그였다. 그리고 기우희는, 그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네, 네?”

“지금 이 싸움에서 느끼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

순간 연호정이 그녀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강량에게 던졌다.

“헉!”

기우희를 받아 든 강량에게 연호정이 외쳤다.

“절대로 뺏기지 마라!”

그때였다.

퍼어엉! 퍼퍼펑!

장강의 수면을 터트리며 튀어나온 수백 명의 흑의인들이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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