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그림자 전쟁 (6)
마치 거대한 곡괭이로 정수리를 뻑! 하고 맞은 것 같았다.
‘세작이라니? 무슨 세작? 어? 근데 세작이 뭐 하는 일이었더라?’
극도의 경악과 혼란으로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로 진입해 버린 기우희의 얼굴은 차마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런 기우희의 얼굴을 보며, 연호정은 생각했다.
‘재미있군.’
이 반응으로 서역신녀 기우희가 삼교 소속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동시에 연호정은 김이 새는 것을 느꼈다.
‘뭐가 이렇게 허술해?’
그는 광신삼교의 힘과 잔혹함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중원을 점거하고 무림과 관부를 완전히 증발시키리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광신삼교는 중원 모두의 적이었다. 당연히 삼교에서도 그 정도 현실은 자각하고 있을 것이며, 세작을 보낸다면 지극히 신중하게 선별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건 뭐야? 뭐 이런 바보를 세작으로 보낼 생각을 했지?
연호정은 조금 피곤해지는 걸 느꼈다.
‘역사가 바뀌었다고 삼교 놈들이 죄다 바보가 되기라도 한 거야, 뭐야?’
제아무리 연호정의 안목이 뛰어나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기우희는 분명 강단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십 년이 넘도록 환자를 치료하며 얻은 배짱과 독기는 꽤 두둑했다.
그러나 기우희가 제아무리 배짱이 있어도 연호정의 위압감을 감당해 낼 정도는 아니었다.
흑양을 제외, 삼교의 인물과 처음으로 독대하고 있는 연호정의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기우희가 아니라 누구라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기우희가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건 그녀가 가진 육감 때문이었다.
그녀의 육감은 일류도 안 되는 실력임에도 잠영일호의 은신술을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특출난 것이었다. 말하자면 타고난 재능이었다.
그 재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연호정의 위험성을, 학사처럼 보이는 겉모습 안에 숨겨져 있는 폭탄 같은 살의를.
지잉! 지이잉!
기우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신을 보는 연호정의 눈빛이 점차 투명해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육감은 점점 더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아파.’
육감이 불러일으킨 두려움에 뇌수가 들끓는 듯했다. 지독한 두통에 눈앞이 새하얘지는 듯했다.
그녀 자신이 가진 육감이 이 정도로 거센 경종을 울린 적은 지금껏 단 두 번뿐이었다.
그녀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푸른 바다처럼 잡티 하나 없는 청안(靑眼)으로 만인을 굽어보는 절대 권력의 화신을.
‘아버지.’
신화(神火)를 밝히는 자.
천하에서 가장 뜨겁고 순수한 불길로 만천하를 밝힐 단 한 명의 천자(天子), 신화교주(神火敎主).
동시에 또 한 명의 절대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자!’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천하에서 가장 어둡고 사특한 무리를 이끄는 자, 가장 천한 곳에 거하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를 만반의 준비가 된 사음(邪淫)의 주인.
‘이럴 수가! 이 자는 도대체가……?!’
믿을 수 없게도 연호정은, 기우희로 하여금 천하에서 으뜸가는 강자 두 명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무서운 압박감을 전해 주고 있었다.
무공? 강함?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청년은 절대 아버지나 사음교주의 무공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니, 당대 강호제일을 다툰다는 성천십삼좌 중에도 삼교의 주인들에 비할 만한 강자는 셋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년의 무엇이 삼교의 주인들을 연상케 할 정도로 뛰어난 것인가?
화르르르르.
순간 기우희는 환상을 보았다.
날카롭고 독기 어린 눈빛의 학사 같은 청년이, 어느새 수백 개의 팔과 다리, 수십 쌍의 눈, 짐승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달린 괴물로 변해 가는 환상을.
내쉬는 숨마다 독이요, 휘두르는 손짓마다 태풍이 불어닥친다. 한 걸음 옮기면 지진이 나고, 내지르는 고함에 천둥 벼락이 휘몰아친다.
콰르르릉!
‘흡!’
삼두육비라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진짜 괴물의 환상.
등 뒤에 다섯 마왕(魔王)을 이끌고 지상에 올라온 악신(惡神)이 여기에 있었다. 대륙을 넘어 하늘까지 불태울 전무후무한 악의 화신(化神)이었다.
부르르르.
기우희는 지독한 공포에 몸을 떨었다.
신화의 혈통 중 가장 진하면서도 혼탁한 피를 이은 그녀는, 놀랍게도 신화의 혈통 중 누구에게도 발현되지 않은 영안(靈眼)을 타고났다.
그 영안에 포착된 연호정은 공포와 증오, 파괴라는 개념이 덕지덕지 붙어 성장한 제어 불능의 괴물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
“이보쇼.”
“헉!”
깜짝 놀란 기우희는 어느새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아픈 겁니까? 뭔 식은땀을 그리 흘리는 겁니까?”
하기야 느닷없이 세작이라는 게 들통나고 말았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아, 아니에요.”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기우희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기우희를 가만히 지켜보던 연호정이 자세를 편하게 했다.
“그래, 세작이 맞긴 맞는 모양이군.”
단정적으로 나온다.
애초에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생각해 보면, 연호정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알 수 없는 위암감은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후우.’
숨을 고른 기우희는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우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타 조직의 세작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말투가 바뀌었다.
기우희는 그 변화에서 감당키 힘든 난폭함을 읽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변화에 더더욱 마음이 편안해졌다. 애초에 그녀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걸 좋아하지도, 거짓에 능하지도 않았다.
“하면, 제가 어떤 조직에서 파견한 세작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 역시 기우희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기우희는 발뺌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걸 말하려 하고 있었다.
‘괴상한 인간이군.’
보통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은 경우, 놀람과는 별개로 세작임을 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기우희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잘 됐다는 듯 목소리가 점점 차분해지고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글쎄? 세 곳 중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음은 아닌 것 같소.”
기우희는 움찔했다.
‘역시.’
이 사람은 삼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알고 계시는군요. 삼교에 대해서.”
“그렇소.”
“어, 어떻게……?”
“내가 그것까지 말해 줘야 할 의무는 없소”
맞는 말이었다.
기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죽이실 건가요?”
“필요하다면.”
“……필요하다면?”
“그렇소.”
연호정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담담해진 기우희의 마음을 단번에 공포로 옥죄는 미소였다.
“세작은 본인이 세작이라고 인정하지 않소. 한데 당신은 인정했군.”
“…….”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보기에 당신 스스로도 세작질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은데.”
기우희가 재차 침을 삼켰다.
상대에게는 자신과 같은 육감, 영안이 없어도 아수라장을 헤쳐 온 경험과 안목이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선천적인 재능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에 가까운 안목에, 기우희는 거짓을 말할 수가 없었다.
연호정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형님 말도 틀리지 않아.’
그는 삼교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모용우는 말했다. 적어도 천성이 나쁜 사람 같진 않은 데다 당장 위험한 기색도 없으니, 일단은 대화가 먼저라고.
적어도 이번 경우에 한해서만큼은, 모용우의 판단이 옳았다.
‘나이는 어려도, 진짜는 진짜라는 것이지.’
내내 기우희를 주시하던 연호정이 돌연 탁자를 후려쳤다.
쾅!
깜짝 놀란 기우희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이면 됐소. 나는 그대가 세작이란 걸 알았고, 그대 역시 인정했소.”
“……!”
“이제 선택을 내릴 시간이오.”
“……선택이요?”
“그렇소.”
연호정이 팔짱을 끼었다.
“죽고 싶소?”
기우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당연히 죽고 싶진 않겠지. 하지만 당신이 세작이라는 걸 들켜 버린 이상, 죽음을 피하기도 어렵소.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소.”
“네?”
“이 자리에서 죽든지, 아니면 우리에게 그쪽 정보를 가져다주든지.”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죽이는 건 쉽소. 이 자리에서 목을 비틀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
“하지만 삼교 측 정보를 얻긴 어렵소. 그렇게 생각하면, 당신은 꽤 쓸 만한 장기 말인 셈이오.”
“저더러…… 교를 배신하란 건가요?”
“그렇소.”
“그럴 순 없어요.”
“그럼 죽으시오.”
드르륵.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던 기우희가 이내 눈을 감았다.
물끄러미 기우희를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지 않소?”
“……네?”
“기실 삼교가 중원을 장악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우리 역시 삼교를 증오할 이유가 없소. 물론, 경계는 하겠지만 말이오.”
“……!”
“알겠소?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오. 한데 그들은 중원을 장악하려 하고 있소. 그리고 그 길은 어쩔 수 없이 피로 물들겠지.”
기우희의 꽉 쥔 주먹이 희미하게 떨려 왔다.
“그들은 악(惡)이오.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떠나, 죄 없는 중원의 민초들을 죽이려 하는 시점에서 그들에게는 어떠한 명분도, 변명도 의미가 없소. 왜냐? 악이니까.”
“…….”
“살인마에게도 사연은 있을 수 있소. 그러나 그걸로 죄를 용서할 수는 없지. 그게 당신들이 하려는 짓이오.”
연호정의 눈이 시퍼런 불똥을 토해 냈다.
“그리고 당신은 의원이오. 사람 몸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게 업이란 말이오. 그런 당신이, 제아무리 소속 집단이라 한들 무고한 피를 뿌리는 그들의 행태를 그저 지켜보고 있소이다.”
“……!”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도 의원이었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역겹소.”
기우희가 눈을 떴다.
핏발 선 그녀의 눈은 알 수 없는 분노와 혼란으로 가득했다.
“나도, 나도 분란이 싫어요! 나 역시 피를 보는 게 싫다고요!”
“그럼 바꾸려 해 보지 그랬소?”
“힘이 없는데 어떻게……!”
“그래서 결과가 이 모양이군. 그럴 거면 바른말을 하고 진즉에 죽어 버리지 그랬소? 그랬다면 더 어린 나이에 죽었을지언정,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당당했을 텐데.”
“……!!”
“당신 역시, 무수한 악인들이 지껄이던 핑계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소. 그래서야 천성이 선(善)하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결과가 이 지경이거늘.”
연호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이, 관계, 용기 등의 말 따위로 변명하려 들지 마시오. 당신은 선택해야 할 때 선택하지 못했소. 고로 당신은 의신회를 욕할 자격이 없소.”
기우희의 표정이 허망함으로 가득해졌다.
반박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연호정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퍼억!
“컥!”
기우희의 몸이 허공으로 들렸다.
그녀의 목을 움켜쥔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
“더럽게 죽을 테냐? 아니면 비참하기 짝이 없는 네년의 삶을 바꿔 보려 몸부림이라도 쳐 볼 테냐?”
“……!!”
“선택해.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