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그림자 전쟁 (4)
우웅! 우우웅!
몸 전체를 둘러싼 푸르른 진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맑고 깊었다.
모용우의 진기는 그러했다. 응축되고 압축되어 가시 영역까지 발출되는 진기의 색은, 마치 그의 천성이 묻어 나오는 듯 청량하여 몹시 보기가 좋았다.
하지만 왜일까?
근래 들어 마음에 혼탁함이 있었는지, 깊고 푸른 진기가 조금은 불안하게 일렁거리는 듯도 했다.
스르르.
한참 내부를 다스린 모용우가 마침내 운공조식을 끝냈다.
“대단하군.”
모용우가 눈을 떴다.
창가에는 연호정이 걸터앉아 있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호(呼)와 흡(吸)의 시간이 이렇게까지 유장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데. 언제 숨을 들이쉬고 언제 뱉는지, 나조차도 알아채기 힘들 정도야.”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곧 내 무공의 특성일세.”
“하지만 그 호흡에 어울리는 무공을 보여 주진 않고 있잖아.”
“하하, 그렇지. 이게 영 쉽지 않더군.”
내공을 제대로 연마한 사람들은 대체로 호흡이 길다. 하지만 모용우처럼 극단적으로 길고 얕은 경우는 어지간해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모용우의 호흡은 연호정보다 훨씬 길고 고요하다. 그것은 곧 그의 무공 특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 모용우는 일격필살보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계기에 강점을 보인다.
그래서 지구력이 좋고 빈틈이 없으며, 흐름이 끊어져도 끊긴 흐름을 되살릴 수 있는 끈질김이 있다.
그러나 연호정과 비무를 벌였을 때의 모용우는 그러지 않았다. 연호정의 무공이 워낙 거세기도 했지만, 그 자신의 호흡처럼 끊임없는 연계기로 상대했다면 승부가 그리 빨리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는 연제 역시 다른 의미로 호흡에 어울리지 않는 무공을 보여 주잖나.”
연호정은 폭발적인 출력과 일격필살의 묘리를 중심으로 무공을 구현한다.
그런 무공들은 대개 수법들이 극단적이기 마련이다. 내가 죽든 상대가 죽든, 단 일격에 결과를 내기 위한 술수들로 가득하여 칼을 뽑는 즉시 생사결이 된다.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식의 무공. 자연히 변화가 적고 살기가 넘치며, 초장부터 상대의 기를 꺾어 버리는 종류의 무공을 즐겨 쓴다.
놀라운 것은 연호정의 호흡이었다.
그는 호흡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였다. 하지만 평소의 호흡은 길고 부드럽다.
다만 모용우처럼 맞지 않는 무공을 쓰는 게 아니라, 그 정도 호흡을 써야 평소의 체력 소모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체 단련을 워낙 죽을 것처럼 해 놔서 말이야. 그러고도 부족함을 느끼는 걸 보면, 역시 무도(武道)엔 끝이 없어.”
연호정에게는 경험이 있다.
흑암제 시절의 경험, 궁극의 경지에 올랐던 그 한 번의 경험이 불과 몇 년 만에 그를 지금의 경지로 끌어올려 주었다.
하지만 지금 연호정은 그때의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아예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흑암제 시절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방향,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느린 거지.’
만일 흑암제 시절과 같은 무도(武道)를 걸었다면 이미 아버지 수준, 혹은 그 이상을 넘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의미가 없다. 앞으로 싸울 적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당시에는 얻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무리(武理)를 온전히 안고 가려면 당장의 더딘 성장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연호정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장 일이 년쯤 뒤처질지라도, 향후 삼사 년 뒤에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올라설 수 있으리란 것을.
흑암제 시절에는 올려다보지도 못했던 드높은 산봉우리의 정상에, 더 빠르고 확실하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걷고 있음을.
“그나저나.”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연제가 들어온 걸 알고는 있었네.”
“대놓고 기척을 냈잖아. 그래도 안 끊길래 호법이나 좀 섰지.”
“뻔뻔하기는.”
“새삼스레?”
“하하하.”
모용우가 침상에 앉았다.
“서역신녀 때문에 왔는가?”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알고 있었나?”
모용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연제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는 모양일세. 자네 스스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지만, 내 보기에 분명 자네는 서역신녀를 불편해하는 기색이었어.”
“불편해한다라…….”
“정확히는, 거리를 두려 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지만.”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모르게 신경 쓰이게 했나 보군. 미안해.”
“미안하기는. 그리 말하지 말게. 다만, 자네가 서역신녀의 출신이나 피부색을 보고 불편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애초에 그럴 사람도 아니지만 말이야.”
“…….”
“연제에게 고민이 있다면, 해결해 주지는 못해도 짐을 나눠 드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든든해졌단 말이야?”
모용우가 팔뚝을 두들겼다.
“물론이지.”
물끄러미 모용우를 바라보던 연호정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순간에, 그간의 비밀을 말하게 될 줄은 몰랐군.”
결국 연호정은 아버지와 묵비에게만 말했던 사실을 모용우에게도 알려 주었다.
물론 전생에 관한 얘기는 배제한 채였다. 모용우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그런 얘기는 쓸데없이 시간만 잡아먹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호정은 광신삼교에 관한 모든 얘기를 풀어놓았다.
‘…….’
얘기를 마친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모용우의 표정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놀란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군.”
“별로 놀랍지 않은 것 같은데.”
“놀랐다네.”
“불신하는 것 같지도 않고.”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연제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네.”
“그래?”
“동시에, 이제야 이해가 가네.”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이런 얘기를 내 입으로 꺼내기는 좀 그렇지만, 자네는 진심으로 나를 무림맹주로 만들 생각인 것 같네.”
“……그래, 진심이지.”
“생각을 해 봤네. 어찌하여 능력 출중한 천재가 굳이 나를 무림맹주로 만들려는 것인지. 혹여, 나를 이용해 무언가를 해 보려는 수작은 아닐지 고민했었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주 맹탕은 아니었구만?”
“맹탕이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지. 물론 처음에 그랬다는 것이지, 지금은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먼저 의형제를 맺자고 하지도 않았겠지.”
“정확하네.”
모용우가 눈을 감았다.
“단순히 친분을 맺고 싶었다면, 그저 활발한 교류 정도로 충분했을 것이네. 하지만 연제는 달랐어. 자네는 나라는 사람을 곧게 봐 주고 있었지만, 동시에 내게 뭔가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알았네.”
“…….”
“궁금했지만,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 생에 처음으로 동생 삼은 녀석이 나를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혹은, 그리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지.”
“물론 그럴 수도 있지. 중요한 것은, 내가 연제를 믿는다는 것이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이었군. 아우가 내게서 무엇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우가 생각하기에 내가 맹주가 되어야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본 것이야.”
“맞아.”
“또한 이렇게 들어 보니, 그들의 힘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 같네.”
“엄청나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모용우가 깍지를 꼈다.
“정리해 보겠네. 새외에는 광신삼교(狂信三敎)라는 집단이 있네. 그리고 그 집단의 힘은 하나하나가 무림맹에 필적하는 수준이며, 단숨에 중원을 제 것으로 삼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네.”
“맞아.”
“그중 사음교라는 단체는 묵룡부를 암중에 지원했으나, 현재 묵룡부주 투왕 양천은 사음교의 목적을 깨달았네. 하여 양천 역시 사음교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야.”
“맞아.”
“연제가 이 건에 대해 무림맹 수뇌부들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맹의 혼란을 막기 위함인 동시에 이쪽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가 삼교가 다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세.”
“나아가, 만에 하나라도 그들과 동조한 자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마지막으로, 현재 그들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제갈 군사님, 그리고 연가주님과 묵 부장이 있네. 이상, 내가 잘못 파악한 것이 있는가?”
“없어. 제대로 이해한 거야.”
“그렇군. 그리고…….”
모용우의 눈이 번뜩였다.
“자네가 보기에, 저 서역신녀가 삼교의 끄나풀 같다는 게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은 못 해. 그러나 그럴 확률이 높다고 봐.”
“이유는?”
“그녀가 익힌 내공심법, 그 기도에서 삼교의 내공 기파를 읽었기 때문이야.”
“……연제는 삼교에 대해 잘 알고 있군.”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지. 특히 사음교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군.”
모용우는 연호정이 그들에 관해 어찌 그리 잘 아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함세. 대화도 얼마 나눠 보지 않았고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지만, 내가 본 서역신녀는 진짜배기일세.”
“…….”
“그녀의 천성은 분명 악(惡)보다 선(善)에 가까워. 나는 그리 믿네.”
“형님.”
“말씀하시게.”
“내게 있어서, 그녀가 악인지 선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
“중요한 건 그녀가 삼교의 공부를 익히고 있다는 것, 즉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삼교와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뿐이야.”
모용우는 일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서늘하게 웃으며 자신을 보는 의동생의 두 눈에 귀화(鬼火)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귀화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분노와 한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를 해할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
“의도를 갖고 맹으로 들어온다? 그걸 확신하는 순간, 그녀의 천성이나 지난 행적 따위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녀로 인해 무림맹은 물론 중원 전체가 홍역을 치를 수도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야. 그런 사소한 것까지 따져 가며 일을 처리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목숨이 걸려 있어.”
연호정이 미소를 거두었다.
“그간 내가 죽인 무수히 많은 적들도 제각기 사연은 있었어.”
모용우가 눈을 감았다.
“……그래, 연제가 그리 생각한다면 나 역시 자네의 마음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네.”
“나는 형님의 마음을 바꾸고 싶군. 중요한 순간에 손을 쓰지 못하는 군인은 군인 실격이야.”
“그렇지.”
“그녀를 좋게 보는 건 상관없지만, 그녀가 삼교의 세작임을 확신하는 순간에는 그 손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말게.”
물끄러미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전장에서 만난 게 아닌 만큼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노력하지.”
모용우의 표정이 티 나게 밝아졌다.
“그래, 그게 좋지.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연호정이 창가에 발을 올렸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해. 푹 쉬도록 해.”
“연제도 쉬게나.”
스륵.
연호정이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혼자가 된 모용우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림맹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