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그림자 전쟁 (3)
모용군이 나가고도 제갈문호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쓰러진 술병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었고, 동시에 혼란스러워 보였다.
문득 제갈문호는 탄식을 토해 냈다.
“이유가 분명하다라…….”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니, 틀린 말이 아닌 수준을 넘어서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였다.
비록 모용군이 화가 난 것은 그 스스로가 보고 있는 무림맹의 위상과 동생 때문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명명백백한 정도(正道)를 담고 있었다.
정도가 무엇인가? 약자를 보호하고 악인을 처단하는 것만이 정도인가?
그렇지 않다.
집단의 당연한 권리, 당연한 행동 원리도 정도에 속해 있다.
그들은 무림인이었다. 평범한 범부들은 꿈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자들이며, 그래서 더더욱 힘이 향하는 방향을 신중하게 겨누어야만 했다.
그것을 바르게 겨누는 자들을 백도(白道), 정파라 부르는 것이고 그것을 내키는 대로 겨누는 자들을 흑도(黑道), 사파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백도든 흑도든, 그들은 결국 무림인이었다.
그리고 무림인이란, 그 체제의 특성상 얕보이는 것을 병적으로 증오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그러한 수치와 분노를 제어하며 끝까지 협의를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무림맹이 얕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파와 사파의 구분을 떠나, 힘을 지닌 조직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모습이었다.
내 나라가 외적에게 얕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상대를 존중하는 것까지는 좋되, 건드리면 화를 입을 거란 위압감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힘이다.
그리고 무림맹은, 선량한 민초는 물론 무림인들도 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 그의 말이 옳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를 떠나,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제갈문호가 필요 이상으로 모용군을 견제하고 불신한 것.
기실, 그것은 제갈문호의 잘못이 아니라 모용군의 잘못이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너무나도 많은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제갈문호는 군사였다.
상대가 천하에서 가장 악질적인 범죄자라 한들, 상대를 꿰뚫어 보려 노력해야지 불신부터 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제갈문호가 이내 문에다 대고 외쳤다.
“게 있는가?”
“예, 군사님.”
“가득상 고문을 불러와 주게. 서둘러서 봐야 한다고 전해 주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의신회라.”
그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가주의 말을 떠나서, 진정 그런 조직이 있을 줄은 몰랐다.’
사사로이 모여 조그마한 회합을 만들거나, 끽해야 특정 지역에 거대한 의방을 형성하는 정도.
제갈문호는 딱 그 정도를 생각했다. 실제로 그게 정상이었다.
‘나 역시 상식에 틀어박혀 있었다. 설마하니, 의원들이 그런 암중의 조직을 만들고 암암리에 권력을 행사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이 부분 역시 제갈문호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이것이 그의 잘못이라면, 광신삼교를 몰랐다는 것 역시 그의 잘못이라고 해야 한다.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느냐였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이들이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타인을 배척하고 뇌물이나 써 댄단 말이지.’
제갈문호의 눈에 날카로운 살기가 번뜩였다.
‘참으로 못난 사람들이로다.’
잠시 후, 문을 열고 가득상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군사님?”
“이리 앉으시게.”
가득상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제갈문호의 표정도 표정이지만, 바닥에 나뒹구는 술병과 잔이 그를 긴장케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 의신회라는 조직을 알고 있나?”
“의신회요? 흐음…….”
눈살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가득상이 일순 손가락을 튕겼다.
“아!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제법 이름 있는 의원들이 모여서 만든 모임 비슷한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가득상의 머리도 보통 비상한 것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기억에서 아예 잊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름만 듣고 잊었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범인(凡人)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의신회란 조직, 보통이 아닌 것 같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갈문호는 모용군에게 들은 얘기를 모두 말해 주었다.
가득상이 입을 쩍 벌렸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고 보고 있네. 진짜 확신하기 위해선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신뢰할 만한 정보라고 보고 있어.”
“……와, 이제는 살다 살다 사람 몸뚱이 고치는 의원들까지 미쳐 날뛰고 있어? 이런 개 호로새끼들을 봤나!”
가득상 역시 진심으로 분노했다.
제갈문호는 벌겋게 상기된 가득상의 얼굴을 보며, 아무래도 자신은 모용군이 말한 대로 신중함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소심한 자가 맞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가득상의 이 반응, 저 격렬한 분노야말로 솔직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진짜 정의와 정도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반응해야 마땅한 것이다.
“서역신녀 측에서 따로 연락이 온 것은 없는가?”
“없습니다. 다만 반 시진 전에 탕마멸사의 군장들이 강서성으로 진입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아마 지금쯤 서역신녀와 접촉하여 북상하고 있을 거라 예상됩니다만.”
“그렇구만.”
제갈문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개.”
정보 고문이 아니라 후개라고 부른다.
가득상의 눈이 깊어졌다.
“말씀하십시오, 가주님.”
“자네, 하곡이라고 알지? 하남성에서 유명한 의원 말일세.”
“물론 알고 있습니다.”
“개방도들을 시켜 하곡은 물론, 그와 친분이 있는 의원들을 모두 맹으로 호위해 올 수 있겠는가?”
가득상의 눈이 번뜩였다.
말이 호위지, 제갈문호가 원하는 것은 강제적인 이송이었다. 그는 그 뜻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네. 명분이 너무 충분하거든.”
“가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곧장 애들을 풀지요.”
“얼마나 걸릴 거라 예상하는가?”
“쥐구멍에 숨지만 않았다면, 나흘 안에 싹 데려올 수 있습니다.”
“과연 빠르군. 그렇게 해 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 고문.”
호칭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 일은 공적으로 처리해 달라는 뜻이었다.
“말씀하십시오, 군사님.”
“통천신의께서 현재 어디에 계시는지 알아봐 주게.”
모용군이 굳이 통천신의를 언급한 이유는, 바로 그를 이용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제갈문호는 모용군이 넌지시 건넨 도움을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부탁하네.”
* * *
“여기인가?”
“그렇습니다.”
“좋네. 들어가세.”
일행이 제법 큼직한 주루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한창 붐빌 시간임에도 주루 안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고 외관이 더럽거나 내부 정리가 안 된 것도 아니었다.
이 주루는 개방에서 비밀리에 운용하는 주루였다. 서역신녀의 호위를 위해 개방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인사드립니다. 신안개(神眼丐) 이걸(李傑)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 법한 젊은 거지가 일행을 맞이했다.
‘오호?’
강량의 눈이 반짝였다.
‘상당한데?’
이십 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어쨌든 개방의 삼결제자였다. 그런데도 지닌바 무위가 자신과 비교해도 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상대의 뜻밖의 무공에, 강량의 시선이 그대로 이걸에게 꽂혔다.
이걸은 강량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탕마군의 군장 모용우 대협, 그리고 멸사군의 군장 연호정 대협 맞으시지요?”
“대협이라는 호칭은 받들기 어렵소. 그저 모용 군장, 연 군장이라고 불러 주시오.”
“알겠습니다.”
이걸이 고개를 숙였다.
“주루 전체를 비워 두었습니다. 숙수는 사흘 동안 상시 배치되어 있을 것이며, 일꾼 다섯 명이 편의를 보아 드릴 것입니다. 누구도 이곳을 넘보지 못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다가 가십시오.”
“고맙소.”
“아닙니다. 도울 수 있어서 오히려 저희가 영광이지요.”
이걸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즉시 말씀해 주십시오. 하면 이만.”
스르륵.
그가 귀신처럼 주루 일 층을 빠져나갔다.
눈으로 보고도 어디로,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모르겠을 만큼 신묘한 신법이었다. 강량이 혀를 내둘렀다.
“개방의 무공은 허허실실이라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신묘막측하기 이를 데 없군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실실은 겉모습만 훑어본 호사가들의 비아냥에 가깝다. 개방의 진짜 무공은 백도 무림을 대표하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지.”
“역시 세상에는 강자도 많고, 멋진 무공도 많은 듯합니다.”
“그렇지.”
연호정이 서역신녀에게 말했다.
“많이 다치셨고, 또한 지치셨을 것입니다. 귀맹이 급하다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움직이는 것은 악수(惡手)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며칠 쉬시며 몸부터 돌보시지요.”
“아…… 네, 네!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연호정이 강량에게 말했다.
“씻고 몸 좀 돌본 후에 오겠다. 피곤하겠지만, 네가 두 시진만 신의의 방 앞에서 호위를 서 주었으면 한다.”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뭐 하나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걱정하지 말고 상처부터 다스리십시오. 내일 아침까지 제가 호위를 서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그렇게 일행은 각자의 거처로 흩어졌다.
“끄응.”
방에 들어서자마자 연호정이 침상에 등을 기댔다.
“빌어먹을, 이렇게 호쾌하게 당해 본 건 또 오랜만이구만.”
철컹! 철컹!
견갑과 비갑, 각반과 흉갑을 모두 벗은 그가 상의를 탈의했다.
이곳까지 이동하며 끊임없이 진기로 육체를 수복했지만, 원체 심한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았다.
“일단 씻어야겠군.”
정 급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상처를 입었다고 곧장 붕대를 두르는 건 별로 좋지 못한 짓이었다. 그는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각 만에 수욕을 마치고 나온 연호정이 바닥에 주저앉아 허연 붕대를 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연 공자. 들어가도 돼요?”
“들어와.”
덜컹.
문이 열리고 묵비가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심하게 다쳤군요.”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마침 잘 왔어. 어깨도 다쳐서 그런지 붕대 감기가 영 힘들다. 와서 좀 감아 줘.”
“그래요.”
잠시 후, 묵비가 연호정의 몸 곳곳에 금창약을 뿌렸다.
부글부글.
금창약이 상처에 닿자 허옇게 거품이 일었다.
보기만 해도 쓰라림이 전해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묵비는 묵묵히 붕대를 감아 주었다.
연호정 역시 아무 말 없이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 공자.”
“응.”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
“서역신녀, 기 신의를 만나고 나서부터 뭔가 이상해 보여요. 모용 군장과 강량은 눈치 못 채고 있는 것 같은데.”
“묵비.”
“네. 말해요.”
“너는 나 믿지?”
장난으로 넘길 말이 아니었다.
묵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 공자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두 사람 중 하나예요.”
“……고맙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요?”
“날 믿어 주는 사람한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만, 그래도 너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겠어.”
“……?”
“만에 하나, 정말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말이야.”
“네?”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내가 신호를 주면, 기우희를 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