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79화 (279/963)

279화. 갈등은 어디서 오는가 (4)

“흐음, 차 맛이 아주 좋군.”

모용군이 웃으며 다향을 음미했다.

“확실히 다르긴 다른 것 같소. 의원께서 직접 타 주시는 차라 그런지, 향만 맡아도 피가 맑아지는 기분이외다.”

“허허, 민망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로 이 사람을 부르셨소이까?”

하곡(河曲)이 손사래를 쳤다.

“제가 뭐라고 모용가주님을 오라 가라 하겠습니까? 그저 좋은 차가 있기에 한잔 대접하고 싶어서 이렇게 초청한 것뿐입니다.”

“허허허!”

크게 웃음을 터트리던 모용군이 이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하 의원.”

“말씀하십시오, 가주님.”

“우리, 쓸데없는 격식이나 자질구레한 얘기는 한옆으로 치워 놓고 얘기합시다.”

“…….”

“나도 나지만, 하 의원도 무척 바빠 보이는데 말이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본론부터 들어가시고, 주판 튕길 일이 있으면 곧바로 준비해 봅시다.”

하곡은 생각했다. 자신이 사람을 잘 골랐다고.

모용군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라고 들었다. 뇌물을 주고받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도 하였다.

물론 이 정보는 극비 정보였다. 만에 하나라도 이 정보가 의신회 측에서 새어 나갔다간 육대세가의 수위를 다툰다는 모용세가의 공격이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곡이 웃으며 큼직한 보따리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일단, 이것부터 받으시지요.”

모용군은 이게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곧장 보따리를 푼 모용군은 안에 든 물건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천년설삼(千年雪蔘)이 아니오? 그것도 세 뿌리나?”

“허허, 제가 비록 무림에 관해서는 잘 모르나, 가주님께서 큰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건 압니다. 앞으로 이런저런 일이 많으실 텐데, 피곤할 때마다 하나씩 달여 드시면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모용군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천년설삼은 뛰어난 영약이었다. 만년설삼(萬年雪蔘)이나 소림의 대환단(大丸丹), 전설처럼 내려오는 영물의 내단 정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처럼 통 크게 줄 만한 뇌물도 아니었다.

심지어 한 뿌리도 아니고 세 뿌리다. 모용세가에서도 천년설삼을 구비하고 있지만, 고작 여섯 뿌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굉장한 뇌물이지만, 모용군은 놀라지 않았다.

설삼을 한옆으로 밀어 둔 그가 웃으며 물었다.

“그래, 이 모용군이 무슨 일을 해 주었으면 좋겠소이까?”

하곡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참으로 시원시원하십니다. 과연 세상이 가주님더러 일세의 호협이라 하더니, 소문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과찬의 말씀을.”

“하면, 이 늙은이가 염치 불고하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곡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림맹의 유군 부대, 멸사군에 대해 잘 아시겠지요?”

모용군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물론이오.”

“같은 유군 부대, 탕마군의 군장이 가주님의 동생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소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쪽 사람이 이번에 탕마멸사의 두 군장과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호오, 갈등이라?”

“설명을 드리자면…….”

하곡은 일전에 벌어진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모용군이 턱을 쓰다듬었다.

“의신회라…… 그런 문파도 있었구만?”

“허허, 문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조직이라고 말하기도 뭣하지요. 그저 중원의 의맥을 이은 의원들끼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합심해 만든 회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그렇소?”

“그렇습니다. 어찌 되었든 두 군장과는 여러모로 복잡한 갈등이 있는 것 같…….”

“한데 지금껏 나도 모르고 있었구려.”

“예?”

“그 은밀함을 보면, 개방이라도 의신회에 대해 잘 모르는 듯한데 말이오.”

하곡이 미소를 지었다.

“은밀하다기보다는, 그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요. 사실상 문파나 이권 집단이라 하기에도 뭐한, 그냥 가까운 의원들끼리의 모임에 불과합니다.”

“굉장하구려.”

“무슨 말씀이신지요?”

“친분 있는 의원들끼리의 모임이라? 단순한 모임인데도 무림맹의 유군 부대 대장들에게 찾아간 것도 모자라 정식 명령을 거부해 달라는 부탁까지 할 정도면, 정말 끈끈한 정으로 얽힌 모임인 듯하오.”

하곡이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저희는 그저…….”

“또한, 제아무리 육대세가의 선두를 다투는 명문가의 수장이라 한들 천년설삼 세 뿌리를 덜컥 건네준다…… 허허, 아무리 생각해도 의신회라는 조직, 보통 조직이 아닌 것 같소이다.”

“가주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결코 대단한 조직이 아닙니다.”

“그렇소이까?”

“물론입니다. 힘없는 의원들끼리 합심하여 만든 모임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실질적인 무력은 부족할지도 모르지.”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관부와 손을 잡았소이까?”

순간 하곡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떻게든 소리가 터져 나오는 건 막았지만, 깜짝 놀란 기색이 얼굴에 여지없이 드러나 있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소이다. 현재 흑백의 무림에서 무림맹만큼 힘이 강한 조직은 없지. 그만한 집단을 건드리려면 무림맹이 섣불리 손을 쓸 수 없는 뒷배가 있어야 할 터인데, 당연히 관부밖에 없겠지.”

“……!”

“한데 하 의원.”

“……말씀하십시오, 가주님.”

“나야 의신회가 관부와 손을 잡았든 다른 어떤 조직과 손을 잡았든 상관이 없소만, 하필이면 건드려도 그 둘을 건드렸소이까?”

하곡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래서 가주님을 찾아뵌 것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그 자리에 가주님의 동생분도 계셨으니, 저희 측에서 큰 실례를 한 것 같아 이렇게 성의 표시를…….”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우가 아니외다.”

“예?”

“우야 내 동생이고, 잘 다독여 주면 알아서 화를 풀 놈이오. 또한 녀석은 대국을 볼 줄 아는 녀석이오. 괜히 천재라 불리는 게 아니지.”

“하, 하면……?”

모용군이 조소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연호정 그놈이 어떤 놈인 줄 아시오?”

“……?!”

“이 내가, 무림맹에서 가장 무서워하고 경계하는 대상이 딱 셋이 있소. 첫째가 공공대사요, 둘째가 군사인 제갈문호외다. 하면 마지막은 누구겠소?”

“설마……?”

“그렇소. 연호정 그놈이오.”

하곡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천하의 모용가주가 일개 후기지수를 무서워하고 경계한단다.

이 믿기 힘든 말에 하곡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모용군은 지닌바 무공은 물론 정치력과 술수 면에서 누구와도 비교를 불허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용군이, 제아무리 천하제일 후기지수라지만 이제 겨우 약관이 넘은 젊은이를 무서워한다고?

“방금 말했듯, 우는 천재외다. 무력, 안목, 상재 등 여러 방면에서 못 하는 게 없지. 하지만 연호정은 다르오.”

“…….”

“우가 희대의 천재라면, 연호정은 삼두육비의 괴물이오. 대체 어쩌다가 그런 괴수가 되었는지, 이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가는 놈이란 말이오.”

하곡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삼두육비의 괴물. 그간 살아오며 그런 식으로 형용되는 사람을 많이 들어 봤지만, 천하의 모용군이 이리 말하니 그 무게감부터가 달랐다.

“그대들은 생각했을 것이오. 제아무리 뛰어난 인재들이라지만, 그 둘로는 무림맹이 섣불리 나서지 못할 거라고.”

“…….”

“반은 맞소이다. 내 동생, 우는 그럴 수 없소. 하지만 연호정은 다르오.”

모용군이 서늘하게 웃었다.

“의신회가 관부와 손을 잡았든 말든, 설령 대국의 황제와 직접적인 연이 닿았다 해도 수틀리면 어떻게든 박살 내려 할 것이오.”

“마, 말도 안 됩니다!”

“호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연호정이란 청년이 가주님 말씀대로 괴물이라 해도, 어찌 한 개인이 관부를 상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설마 하 의원께서는, 이 내가 연호정의 무력을 두려워한다고 보시는 게요?”

“예?”

“내가 그놈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이유는, 놈의 무시무시한 안목과 추진력, 그리고 상상을 불허하는 귀계와 실행력 때문이외다.”

“……!!”

“놈은 한번 마음에 담아 둔 것을 결코 잊지 않소이다. 그런 면에서, 연호정 그놈은 나와 닮았소. 정치가란 무릇 그렇지. 당한 것을 절대 잊지 않아. 다만 언제 공격에 들어갈지를 고민할 뿐이오.”

하곡은 다시 한번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 이번만큼은 상대를 잘못 건드렸소이다. 그놈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나조차도 막기 버겁소. 하물며 본맹 입장에서 보면, 연호정은 상부의 명령을 철저히 따랐을 뿐이외다.”

“……!!”

“게다가 당신들은 사람을 잘못 찾아왔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모용군이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나는 몸이 묶여 있는 상황이외다. 맹정(盟政) 회의에는 매번 참여하지만, 그간 벌여 놓은 일이 있어 한창 조심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오.”

“그것은……!”

“직접 나선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만.”

모용군이 웃으며 천년설삼을 툭툭 건드렸다.

“고작 천년설삼 세 뿌리로 내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 수는 없소이다. 나 역시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라.”

“가주님.”

“천년설삼이 아니라 만년설삼을 가져왔어도 갈등했을 것이오. 지금 내 상황이 그렇소.”

“그렇다면…….”

하곡이 조심스레 물었다.

“가주님께서 그런 상황이라시면, 혹 가주님과 손을 잡은 당원들을 이용하실 수는 없으신지요?”

“…….”

“무, 물론 성의 표시는 하겠습니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또 하나, 하 의원께서 실수하신 게 있소이다.”

“예?”

“나란 사람은 직접 건네는 뇌물 정도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외다. 뇌물이야 대화의 장을 여는 열쇠에 불과할 뿐, 진정 내게 원하는 게 있었다면 ‘미래’라는 선물을 가져오셨어야 했소.”

“미래라니요?”

“관부와의 연을 끊고, 이 사람과 함께하실 용의는 있으시오?”

“……!!”

“그것 보시오. 그런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오셨으니, 공연히 천년설삼 세 뿌리만 날렸소이다.”

모용군이 보따리를 들고 일어났다.

“하 의원 말마따나, 이것은 귀하들이 내 동생을 건드린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가져가겠소이다.”

“가, 가주님!”

“또한, 나나 무림맹도 굳이 그대들과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하니, 돌아가서 넌지시 얘기 정도는 해 보겠소.”

모용군이 웃으며 등을 돌렸다.

눈 뜨고 코 베인 하곡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모용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기 전,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하 의원. 비록 두어 번에 불과하지만 나름의 안면이 있는 사이이니, 내 충고 하나 하겠소.”

“……?”

“이제부터 연호정, 그 미친 괴물이 날뛰기 시작할 것이오.”

“……!”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그냥 당하시오. 놈을 자극하지 말란 말이오. 이 이상 그놈을 건드렸다가는, 그대들이 모임이라 말하는 의신회가 뿌리째 뽑혀 나올 수도 있소.”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일체의 활동을 접고, 그대들이 선을 댄 관부의 높으신 분에게 말하시오. 이번 일은 그대들의 선에서 마무리를 짓겠다고. 안 그러면 관부의 기둥뿌리 몇 개는 날아갈 것이오.”

“…….”

“내 말, 꼭 명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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