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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75화 (275/963)

275화. 손님맞이 (7)

“어떻소? 입맛에 맞소이까?”

가만히 빈 잔을 내려다보던 당관이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주시오.”

연위가 웃으며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당관은 잔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비워 냈다. 별말은 없지만,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연가주도 한 잔 받으시오.”

당관이 연위의 잔을 채워 주었다.

연위가 잔을 반만 비웠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좋은 술이라더니, 왜 다 드시지 않소?”

“이 사람은 나눠 마시는 편이라오.”

“흥!”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그러시는 게요?”

“내가 보는 당가주는 꽤 독선적인 분이외다. 하지만 술잔에 독이나 타는 짓거리를 할 만한 분도 아니오.”

“말은 잘하는군.”

당관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별다를 것도 없는 경치였다. 아무래도 그 역시 이런 자리가 어색하긴 한 모양이었다.

연위가 그의 잔을 다시 채워 주며 물었다.

“그래, 따님과는 잘 풀었소?”

무척이나 민감한 얘기인데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묻는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딸내미 일로 온 것 아니오.”

“부모는 언제나 자식 일이 최우선이오. 오늘 이 자리가 끝나면, 따님과 밥이라도 한 끼 하시구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시오.”

“허허허.”

하긴, 당관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움직여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면 움직일 테니, 그의 말마따나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어찌…….”

“그 계집 말이오.”

자신의 말을 끊었지만, 연위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누구를 말함이오?”

“서역신녀 말이외다.”

“음.”

“그 계집의 의술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들었소.”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잘은 모르겠소만,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서역과 중원의 의술을 합쳐 뛰어난 비전을 만들었다고 하더이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그 냄새 나는 서역 놈들의 의술이 대단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소.”

“그리 말씀하실 건 또 아니외다. 내 듣기로, 서역의 의술은 우리 중원의 의술과는 달리 외과(外科)적 치료에 능하다고 들었소이다.”

“외과적 치료라…….”

“개흉술(開胸術)이라고 하던가? 사람을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로 만들고, 흉부를 열어 직접적인 장기 치료까지 가능하다고 하더이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깨나 죽였겠군.”

“음?”

“개흉술은 본가도 아직 시험 중에 있는 수법이오. 게다가 사람을 가사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마취(痲醉)를 해야 하는데, 사람마다 마취에 드는 시간과 깨는 시간이 제각각이오.”

연위로서는 한 번도 접해 보지 않은 지식이었다. 독과 약을 다루는 만큼 당가의 의술 역시 사천제일을 논하는바, 가주가 되려면 그 모든 영역에서 수준급의 단련과 공부가 필수일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관은 대단한 사람이다. 연위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취를 하기 위해서는 극도로 세심한 약학적 지식이 필요하오. 조금만 약해도 수술 중간에 정신이 깨어 충격으로 죽을 것이고, 조금만 강해도 근육이 굳거나 신경이 엉망이 되겠지.”

“흐음.”

“그 일정량을 알아내는 데에만 해도 수만 명의 사람이 죽었을 것이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의학은 어려운 학문이오.”

“반쯤 미친놈들이 아니면 대성하기 어렵지. 하물며 개흉술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 정도면, 손에 무수히 많은 피를 묻혔을 것이오.”

당관이 잔을 비웠다.

그가 다시 창가로 눈을 돌렸다.

“괜찮군.”

그것이 술맛에 대한 감상평이라는 것을, 연위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나저나, 갑자기 서역신녀에 대해서는 어찌 물으시오?”

당관은 대답 없이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답지 않게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연위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당신 아들내미의 화술이 제법 수준급임은 부인할 수 없소이다.”

“음?”

“그 계집의 호위로 갔다고 하니, 허튼짓만 안 한다면 나름의 친분도 생길 것이고.”

연위가 조심스레 물었다.

“서역신녀에게 따로 원하는 것이 있으시오?”

창가로 눈을 돌린 당관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렇소. 물론 그게 무엇인지 말해 줄 순 없소.”

“…….”

“……중간에 다리 한번 놔 주시오.”

당관으로서는 꽤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일 것이다.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소이까? 서역신녀가 오면 가주께서 직접…….”

“그럴 수 없소.”

“왜 그렇소?”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모용군이 날 주시할 거요.”

“……!”

“내가 서역신녀와 만나는 걸 모용군이 알든 말든, 별 상관은 없소. 하지만 굳이 그 작자에게 알려 주고 싶지도 않소.”

“으음.”

“그 의심밖에 할 줄 모르는 머리통으로 쓸데없는 공상이나 하면서 괜스레 내 신경을 건드리겠지. 먼저 덤벼든다면야 박살을 내 줄 순 있지만, 굳이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소.”

분란이 생기는 게 귀찮다. 그쪽이 한번 힘써 주면 편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당관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연위는 어쩐지 당위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소?”

“…….”

“서역신녀가 필요한 일, 당연히 의학적 지식이 필요한 일일 것이오.”

“알면서 왜 묻소?”

“다리를 놓는 거야 문제될 게 없지만, 그로 인해 얻은 이득으로 타인이 불행을 겪으면 곤란하오.”

당관이 차갑게 웃었다.

“당신은 지금의 칼질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소? 설마, 그 검에 피 한 방울 안 묻었다고 자부하시오?”

“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오.”

“흥.”

“독을 개량하는 것인지 약을 만들려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의학적 지식의 완성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죄 없는 이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하오.”

“성인군자 납셨구려. 독도 필요할 때 쓰면 약이 되고, 약도 과하게 쓰면 독이 되는 법. 독도 검처럼 양날이외다.”

연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가를 위해서든 개인을 위해서든, 나는 아무 상관이 없소. 그를 더 알아보려는 것은 오지랖에 불과하겠지.”

“…….”

“하지만 이 대답만큼은 반드시 들어야겠소. 죄 없는 이들이 피해를 보는 일은 아니어야 하오.”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별것도 아닌 일에 지나치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별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소이다.”

가만히 연위를 노려보던 당관이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날 위한 일이오.”

“…….”

“나는 적이라고 확신하지 않는 이상, 적의 잔에 독을 타지 않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씀, 약조한 것으로 알아듣겠소.”

“흥.”

당관이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따라 주시오.”

연위가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당관이 연위의 잔을 채워 주었다.

웃으며 당관을 보던 연위가 잔을 들었다.

“또 있잖소?”

“뜬금없이 무슨 말이오?”

“서역신녀의 일 하나 때문에 찾아오신 게 아님을 알고 있소.”

“점복도 보시오?”

“눈치 조금만 있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소이다.”

“눈치 빨라서 좋겠군.”

“그래서, 이 사람에게 따로 부탁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오?”

당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 침묵은 상당히 길었다. 그로서도 쉽게 대답하기 힘든 일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침묵이 이각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공부가주가 두 병째 동이 날 때 즈음, 당위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하더이까?”

“음?”

당관이 조금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함께 밥을 먹었다고 하지 않았소.”

“……?”

“상아 말이오.”

“아!”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그랬소이다.”

“그 녀석이, 이 사람더러 뭐라고 하더이까?”

“말하지 않았소.”

“……?”

“귀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그리고 우리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그저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를 하며 즐겁게 밥만 먹었을 뿐이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일전에 그대는 분명 이리 말했소. 상아가 답답해한다고, 나를 많이 걱정하는 기색이라고 했소이다.”

“물론 그랬소.”

“그게 다 거짓말이었단 거요?”

“거짓말이 아니오.”

연위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꼭 말을 해야만 그 사람의 감정을 아는 것은 아니외다. 그저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고, 당시 상아의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그 감정을 느꼈을 뿐이오.”

“…….”

“부모와 자식 사이란 그와 같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지. 하지만 무언상통(無言相通)하는 사이가 되려면 일단 많은 대화가 필요하오.”

“…….”

“당가주께서 내게 따님에 관해 물어보는 것, 나는 좋은 접근이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이 이상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없소이다.”

연위가 당관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이제는 직접 만나 보시오.”

당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녀석이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오.”

“만나 주지 않으면, 기다리시오. 그리고 어느 정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면, 그때 다시 손을 내밀어 보시오.”

“…….”

“전에 말씀드렸듯, 나는 자식에게 자존심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따님과 진정 절연할 생각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성숙한 그대가 먼저 다가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연위가 쓰게 웃었다.

“나는 그걸 못 했소. 심지어 얼마 전에도 그랬지.”

“…….”

“좋은 반면교사가 있지 않소? 내가 저질렀던 잘못을, 부디 그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가만히 연위를 보던 당관이 툭 던지듯 물었다.

“왜 이러는 것이오?”

“무슨 말씀이오?”

“왜 내게 잘해 주는 것이오? 상아를 위한다는 둥, 내가 적이 아니라는 둥, 자신의 생각이 나서 그랬다는 둥의 말은 하지 마시오.”

연위가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방금 그대가 말한 이유가 전부요. 상아를 위해서이고, 그대가 적이 아니기 때문이며, 내 과거가 생각나서 그러는 것이오.”

“어처구니가 없군.”

“물론 그대보다는 상아를 위함이 더 크오. 상아는 내 아들의 친구요. 아들의 친구라면 내게는 조카외다.”

“조카라.”

당관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알고 계시겠지? 그대의 아들내미와 내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당가주 아드님께서 크게 잘못을 했더랬지.”

“흥!”

“해서, 그게 어떻다는 것이오?”

“어디 그 위선적인 입으로 말해 보시오. 내 아들도 조카라고.”

“조카 아니외다.”

“…….”

“내 아들이 그대 아드님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어찌 내 조카로 삼을 수 있겠소?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시구려.”

연위가 자신의 잔을 비웠다.

“다만, 서로 좋게들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겠지. 당가주께서 말씀하셨듯, 나 역시 분란보다는 화합과 웃음이 좋소.”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위.

그런 연위를 보던 당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는, 그 자신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으리라.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손님맞이 잘하지 않았소?”

“판관검이라더니, 웃음이 그리 헤픈 사람이었소?”

“허허허!”

“한 병 더 있소?”

“물론이오. 하나 더 마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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