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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74화 (274/963)

274화. 손님맞이 (6)

최상층에 올라오니, 그야말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모용 대협!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받으십시오!”

“아, 아니 저는 대협이 아닌…….”

“모용 대협!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이게 이 주루에서 최고로 비싼 안주거든요! 방금 막 나온 겁니다! 아직 손가락 하나 안 댔어요!”

“저, 저는…….”

“허억! 이, 이분들 설마 멸사군(滅邪軍) 소속입니까? 흉갑에 멸사(滅邪)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맞긴 한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저희도 이제 식사를…….”

“저희랑 같이하시지요! 최고로 모시겠습니다!”

여느 주루와 마찬가지로, 이곳 주루의 최상층도 돈이 없으면 오르지 못하는 곳이었다.

비록 성도에서 제법 떨어진 현이었지만 하남과는 지척이었고, 서쪽으로는 제갈세가의 본가인 융중산, 양양이 있다. 북적거리는 걸 싫어하는 돈 많은 부호들이 많이 오는 곳인 만큼 최상층에 자리한 이들 대다수가 유명한 가문이나 상회 소속이었다.

모용우가 당황해서 말했다.

“호의는 감사하나, 저희는 저희대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났지만 나름대로 강단 있는 말투였다. 거기에 특유의 선한 목소리가 합쳐지니, 사람들이 알아서 물러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내 왁자지껄 떠들어 대던 사람들의 얼굴에 무안함이 새겨졌다.

“커험! 하, 하긴 맹에 계셔야 할 분들께서 예까지 오신 걸 보면 나름의 일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가 좀 주책맞게 떠들어 댄 감이 있지?”

“워낙에 유명인이시라 저도 모르게 실례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송구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이해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사람들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저마다 자리로 돌아갔다.

연호정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확실히 다르긴 달라.’

모용우는 화를 내지 않아도, 강압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스스로 물러나게 할 줄 안다.

연호정에게는 없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이었다. 절강에서 억눌려 지낼 때는 모르고 있던 천성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함께 깨어나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매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연호정은 저러지 못한다. 성품도 그렇고, 평생을 싸우며 살아온 사람이기에 빠르고 직관적인 언행이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어.’

군중을 제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자.

무공보다도 소중한 선천적인 재능이다. 무림맹주가 되든 모용세가의 가주가 되든, 모용우는 훌륭한 수장이 될 것이다.

“헛! 형님!”

강량이 손을 흔들었다.

제아무리 회복력이 빠르다 한들 상처가 다 낫진 않았을 텐데, 참으로 튼튼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호정이 손을 흔들며 일행에게 다가갔다.

“헉!”

“……벽산호장?”

“멸사군장이다!”

“도끼 어마어마하네.”

사람들이 저마다 연호정을 보며 쑥덕거렸다.

모용우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연호정을 보는 그들의 눈에는 선망의 감정 외로 은근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만전(萬戰)을 거치고 살아온 역전의 명장인 만큼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특히나 강호에 나왔을 때의 연호정은 언제 어떤 기습에도 반응할 수 있도록 날을 세우고 있었으니, 자연 칼날 같은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연호정이 자리에 앉았다.

쿵!

한옆에 광룡부를 세워 놓으니, 층 전체가 울릴 정도로 살벌한 소리가 났다.

모용우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잘 다녀오셨소, 연 군장?”

사람들이 보는 앞이었다. 혹시 모를 소문이 돌까 싶어 직책으로 부르는 그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성 상고현에 머물고 있다 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푹 쉬고, 내일부터 좀 빠르게 이동해야 할 듯합니다.”

“음, 특이 사항은 없었소?”

“개인적인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다만, 의원 연합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모양입니다.”

“의원 연합?”

연호정은 지부장에게 들은 정보를 간략하게 전했다.

모용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몸 고치는 게 업인 작자들이 어찌 그리 소인배 같은 행동을 하는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소면을 먹던 묵비가 툭 던지듯 말했다.

“된통 일 치르겠네요.”

“음? 그게 무슨 말이오, 묵 부장?”

묵비가 젓가락으로 연호정을 가리켰다.

“남의 일엔 일절 신경 안 쓰는 것 같아도 그런 거 은근히 못 보는 성격이거든요. 강서성 의원 연합 다 박살 내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임무는 서역신녀를 맹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거야. 그 외의 일에는 흥미 없다.”

“정말요?”

“우릴 건드린다면 또 모를까.”

묵비가 피식 웃었다.

“연 공자도 알죠? 가는 데마다 싸움이 터지는 운명이라는 거.”

“모르겠는데?”

“그럼 이번에 확인해 보자고요.”

“꼭 싸움이 터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럴 리가요.”

묵비가 혓바닥을 삐죽 내밀었다.

연호정이 냉정하게 말했다.

“혓바닥에 소면 찌꺼기 묻었다.”

“이익!”

얼굴이 벌게진 묵비가 몸을 홱 틀어서 소면을 마저 먹었다. 와중에도 맛나게 먹는 걸 보니,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강량이 물었다.

“한데 연합이니 뭐니 해도 힘없는 의원들이 모인 곳인데, 무림맹의 일이라고 하면 바로 발을 빼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리 간단하게 볼 문제는 아니외다.”

“에?”

“힘으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였다면 그들도 감히 그런 짓은 못했을 것이오. 게다가 우리는 백도 정파요. 직접적으로 먼저 건드렸다면 또 모를까, 명확한 증거도 없이 다짜고짜 그러지 말라 하기도 힘드오.”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저는 그걸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여러 정치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어쨌든 백도의 제일 가치는 협(俠) 아닙니까? 그놈들 때문에 환자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정치고 뭐고 뺨부터 한 대 날려야지요.”

모용우의 눈이 커졌다.

“백도의 제일 가치라…….”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잘못된 게 있으면 바로잡는다, 백도인들이 항상 하는 말 아닙니까? 뭐, 저라도 이런 얘길 들으면 열 받아서 당장 찾아갔겠지만 말입니다.”

“허어.”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 검사의 말씀이 맞소. 이거, 내가 아주 나쁜 물이 들었던 모양이오.”

“예?”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가장 먼저 생각했어야 했소. 이런저런 정치적인 문제는, 일을 터트리고 난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을.”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강 검사 덕분에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었소. 감사하오.”

“……이런 걸로 감사를 받아도 됩니까?”

괜스레 부끄러워진 강량 역시 소면 그릇에 코를 박았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때로는 세상을 단순하게 볼 필요가 있지. 강량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드오.”

“멀었다기보다는 신중한 거지요.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고는 했지만, 아마 모용 군장께서도 실제로 그놈들이 눈앞에 있으면 참지 않았을 겁니다.”

“허허.”

“하지만 말했듯, 우리의 임무는 서역신녀의 호위입니다. 백도의 가치이니 뭐니를 떠나, 임무를 최우선 가치로 생각합시다.”

“연 군장의 말씀이 옳소.”

“쓸데없이 말이 많았군.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연호정과 모용우도 이내 소면 그릇에 코를 박았다.

야채 볶음, 돼지고기 찜 등 오만 요리가 탁자를 가득 채웠다. 그간 육포와 건량만 먹은 그들은 오래간만에 맛보는 요리다운 요리들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특히 강량이 유독 많은 양을 먹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상처 입은 몸을 치료하기 위해선 많은 영양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렇게 포식한 일행은 제각기 거처로 들어가서 쉬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깨끗하게 씻은 연호정이 후원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 좋군.”

날이 추워서 그런지 후원에 나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루에서는 아직도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이 술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 냄새 나는군.’

매일매일 임무 아니면 훈련, 그것도 아니면 모용군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철골이라도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연호정의 심신은 건강했지만, 한 번씩 이런 여유가 필요할 때도 있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광룡부를 들었다.

“여유는 개뿔. 도끼질 한 번이라도 더 하자.”

우우우웅.

광룡부가 나른한 울음을 토해 냈다.

‘간만에 초식 수련이나 해 볼까.’

각 잡고 내공까지 퍼부어 가며 수련하기에는 장소가 너무 협소하다. 물론 진기를 제어하는 능력이 수준급인지라 외물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겠지만, 굳이 시끄럽게 하고 싶진 않았다.

‘둔검(鈍劍)이라.’

문득 여국이 떠올랐다.

한참 둔검을 수련 중이라 검속이 미세하게 느려졌다고 하였다. 비록 실전성이 떨어질 위험이 있지만, 둔검에 완전히 몰입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나도 오랜만에 둔검 수련이나 해 볼까.’

둔검이란 말 그대로 느린 검이었다.

검을 느리게 휘두른다니 일견 쉽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둔검을 경지에 이르도록 연성키 위해서는 무시무시한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정교함과 검의(劍意), 변화를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선 둔검만 한 수련이 없다. 둔검이 경지에 오르면 일검(一劍)으로 만변(萬變)을 제압할 수 있다.

그 무리(武理)야 진즉에 깨우치고 있었지만, 완벽하게 체득한 무공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또 다른 깨달음을 건네주기도 하는 법.

연호정이 양손으로 광룡부를 쥐고 휘둘렀다.

‘…….’

광룡부가 천천히 움직였다.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리다. 심지어 광룡부의 무게는 팔십 근이 넘었다. 근력이든 내공이든, 빠르게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뚝. 뚝.

연호정의 몸이 땀으로 절었다.

겨울의 동풍도 그의 몸을 식혀 주지 못했다. 애초에 팔십 근 중병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신기(神技)다. 그걸 이토록 느리게, 그것도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것은 천생신력을 타고나도 힘든 일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군.’

연호정은 속으로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속도를 느리게 하면 할수록 근육과 관절에 걸리는 부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효과가 훨씬 더 좋아.’

연호정의 무공은 일격필살(一擊必殺)이다. 단숨에 달려들어 일격에 적을 죽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근력 역시 폭발적인 힘을 내는 데에 능했다.

하지만 둔검 수련을, 그것도 움직이는 듯 마는 듯한 속도로 하니 순식간에 근력이 바닥나 버렸다.

‘왜 진즉에 이 수련을 하지 않았지?’

답은 분명했다. 굳이 둔검 수련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계까지 단련된 근력이, 둔검 수련으로 인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주 좋군.’

엄청난 고통에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연호정의 얼굴에는 환희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로서 내 몸은 더 강해질 수 있다.’

단련이 일상인 사람에게 새로운 자극이 온다는 것만큼 환영할 만한 일이 또 있을까.

무려 반 시진이 넘도록 둔검 수련을 한 연호정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후, 이거 버릇 들 것 같은데?”

십여 번 호흡을 반복하니 어느새 가쁜 숨도 가라앉았다. 기본 체력이 워낙 좋아서 호흡도 빨리 돌아오는 것이다.

“내일도 해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이 광룡부를 어깨에 걸쳤다.

그가 주루 옆, 큼직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구경 잘 하셨나? 이만 나오지?”

스륵.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초로의 사내였다.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누구?”

초로의 사내가 짧게 읍했다.

“무림맹의 멸사군장, 벽산의 호장을 뵙습니다.”

“그러니까 누구시냐고?”

“의신회(醫神會)의 호북 지부장, 가역소(嘉譯笑)라 합니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묵비, 네 말이 맞았어. 아무래도 난 이럴 운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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