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73화 (273/963)

273화. 손님맞이 (5)

“흠.”

연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또 오고 있었다. 내공까지 끌어 올려 순식간에 쓸어 버렸거늘, 그새 바닥에는 한 겹, 두 겹 눈이 쌓였다.

“많이도 쏟아지는군.”

어차피 또 쌓일 눈, 굳이 쓸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결국은 쓸어 둬야 걷기도 편하다. 게다가 한번 오면 거의 한 자 높이로 쌓이기 때문에, 계속 내버려 두면 결국 더 힘들어질 것이다.

슥슥슥.

연위가 다시 눈을 쓸었다.

시간도 널널했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게다가 계속 눈을 쓸다 보니 잡생각도 들지 않아서 의외로 명상의 효과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음?’

멈칫했던 연위가 재차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잠시 후.

“해괴한 광경이군.”

연위가 대문을 바라보았다.

열린 대문 너머, 털옷을 입은 당관이 보였다.

“육대세가의 가주가 마당을 쓸고 있다니, 그렇게 할 일이 없소?”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좀 남아서 말이오.”

“아랫것들에게 시킬 생각은 안 하시나?”

“아랫사람이 없소이다. 그리고 아랫사람이 하든 내가 하든, 결국 누군가가 할 일이라면 내가 하는 게 낫지 않겠소?”

“말은 좋군.”

특유의 비아냥대는 말투는 그대로다. 목소리 역시 이전처럼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연위가 빗자루 끝에 양손을 올렸다.

“해서, 기별도 없이 예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소이까?”

“술 있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은 술이 있소이다.”

당관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대에게 사죄의 기회를 주겠소. 좋은 술이 아니면 평생 당신의 사죄를 받아 주지 않을 것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산동에서 직접 공수해 온 공부가주(孔府家酒)가 있소이다. 작년에 비해 제조량이 삼분지 일 밖에 되지 않았다더군. 구하느라 진땀깨나 뺐소.”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천하 명주라고 하더니, 결국 공부가주였소?”

“이번 놈은 유독 더 좋더이다. 직접 마셔 보면 내 말뜻을 알게 될 게요.”

“흥!”

당관이 파군각으로 들어섰다.

“빗자루질 그만하고 술상이나 깔아 보시오. 안주는 내지 않아도 좋소.”

“그럽시다.”

당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군. 서역신녀라는 계집을 호위하러 갔다더니, 벌써 떠난 모양이오?”

연호정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전에 떠났소이다.”

“비위 거슬리는 놈 없어서 좋군.”

“허허허.”

“왜 그리 웃는 거요?”

“그 말은 곧, 이 사람은 괜찮다는 뜻이 아니겠소? 아들놈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렴 녀석보다는 내가 더 낫지 않겠소?”

“착각도 자유시군. 당신이 진정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잔부터 받아 봐야 알겠소.”

“좋소.”

빗자루를 턴 연위가 일 층 문으로 당관을 안내했다.

“들어오시구려.”

* * *

“허억! 허억!”

강량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에 심상치 않은 자상이 가득했는데, 상처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깊었다. 날이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왔으면 뼈까지 절단되었을 정도로 깊은 자상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커헉! 고, 고생하셨습니다!”

“너도 고생했다.”

풀썩!

강량이 그대로 쓰러졌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얗던 눈밭은 온통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가 보면 학살 현장이라고 착각할 만한 광경이었다.

팔짱을 낀 채 멀찍이서 두 사람의 승부를 지켜보던 모용우는 혀를 내둘렀다.

“연 군장.”

“그냥 평소처럼 불러. 얘네들 앞에서는 안 숨겨도 돼.”

“……연제.”

“왜?”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해도 해도 너무 살벌한 거 아닌가? 강 검사를 진짜로 죽일 뻔했네.”

연호정이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 해서 죽을 거면 그냥 죽는 게 나아.”

“허! 연제는 참으로 독하구먼.”

“놈이 익힌 귀검(鬼劍)은 패도적이면서도 실전적인 강검을 추구하지. 녀석의 천성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않으면 평생 가도 진의(眞意)에 도달하지 못할 거야.”

“으음.”

“그도 아니면 피 터지는 실전에서 배워야 하는데, 그럴 바에야 능수능란한 고수한테 몇 대 맞으면서 익히는 게 낫지.”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자네의 사신무(四神武) 역시 전장의 무공이라 들었네만.”

“사신무에 비할 바는 아니야. 귀검이 대단한 점이 바로 그거지. 지극히 강하고 실전적인 주제에 검의(劍意)가 대단히 깊거든. 아마 검도에만 매진해도 말년에는 누구 못지않은 강자가 될 수 있을걸?”

“한데 왜 그리 독하게 몰아붙이는가?”

“말년까지 기다리기엔 나나 저놈이나 성질이 급하니까.”

참으로 연호정다운 말이었다.

모용우가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주루에서 머물도록 하세. 저러다 강 검사 진짜 죽…… 응?”

푸스스스.

강량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여전히 호흡은 거칠었지만, 몸에 묻은 눈을 털어 내는 손짓엔 어느 정도 힘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모용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무섭지?”

“어, 어떻게?”

“선천적으로 체력이 워낙 좋은 데다가, 녀석이 익힌 귀왕진기(鬼王眞氣)는 집중했을 때 거의 마공(魔功) 수준의 회복력을 자랑해. 사나흘 정도면 방금까지 입은 상처를 전부 없었던 일처럼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거야.”

“헉!”

사나흘 만에 저 지독한 내외상을 다 회복할 수 있단다. 모용우는 믿을 수가 없었다.

“후우.”

강량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회복력이 좋다고는 해도, 워낙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안색이 창백했다.

“형님은 정말 인정사정없으시군요.”

“내일까지 최대한 회복시켜 놔. 다시 붙을 테니까. 만전의 상태가 아닐 때 맞서는 법도 알아야지.”

“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잘도 주고받는 두 사람이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형님 말마따나 오늘은 주루에서 지내는 게 좋겠어. 식량도 다 떨어졌고.”

가장 반색한 것은 강량이 아닌 묵비였다.

“좋죠. 진즉에 그랬어야죠.”

“씻고 싶냐?”

“……확, 진짜.”

“그냥 물어본 건데 너무 과민 반응 아니냐?”

“시끄러워욧!”

그렇게 일행은 호북 조양현의 한 주루로 향했다.

주루는 생각보다 컸다. 사람도 많았고, 덕분에 분위기도 무척이나 활발했다.

“푹 쉬고 있어. 난 잠깐 개방 지부 좀 다녀올게.”

“혼자 가는가? 조금만 기다리게. 씻고 같이 가지.”

“아냐, 괜찮아. 먼저 씻고들 있어.”

연호정은 그 길로 개방의 지부를 찾았다.

지부는 조양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기야 개방의 지부는 중원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어서, 어딜 가도 숨겨진 곳이 꼭 하나씩은 있었다.

“무림맹 유군 부대 멸사군의 군장 연호정이오.”

“미리 언질을 받았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어떤 정보부터 드릴까요?”

“일단 서역신녀부터.”

지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서역신녀는 현재 강서성 상고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아마 연 군장님께서 도착하시기 전까지 최대한 환자들을 돌볼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렇군.”

“다만…….”

“음?”

지부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서역신녀가 무림맹으로 향한다는 정보가 암암리에 퍼진 모양입니다. 강서성 의원 연합에서 약재를 통제하고 있다 합니다.”

연호정의 얼굴도 잔뜩 찌푸려졌다.

“아픈 환자가 있는데도 그따위 짓을 하고 있다는 거요?”

“아프면 그녀에게 진찰받지 말고 자신들에게 오라는 것이지요.”

“뭐 그런 미친놈들이 다 있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만 의원 연합은 중원 전역에 걸쳐 존재하고, 그들의 영향력도 워낙 막강한지라 대놓고 꾸짖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질투 좀 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 인간들 선을 넘는군.”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그들을 건드릴 생각이시라면 신중히 움직이시는 게 좋습니다.”

“신중함 따지다가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경우를 많이 봐서 말이오.”

지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벽산호장 연호정의 성정이 불같다더니만, 어째 꼴을 보니 강서성 의원 연합이 홍역을 치를 듯했다.

연호정이 손을 저었다.

“그리 걱정하지 마시오. 상황을 지켜보고 유연하게 대응할 테니.”

“알겠습니다.”

그제야 지부장의 얼굴에 안심이 어렸다. 하긴, 제아무리 성정이 불같아도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는 사람이 아주 막 나가기도 힘들 것이다.

물론 지부장은 연호정이 말한 유연함이 어느 정도에 걸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겠군. 고맙소.”

“아닙니다. 또 알고 싶으신 정보가 있으신지요?”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둘째가 개방에 계속 소식을 전하고 있다던데.”

“아, 연지평 이공자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서 더미를 뒤적거리던 지부장이 이내 종이 한 장을 들고 다가왔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안휘성으로 진입했으며, 아마 구화산(九華山)을 통과해 강서성에 진입 후 그대로 북상할 거라 합니다.”

연호정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연가가 있는 강소성에서 하남 무림맹으로 가려면 안휘에서 곧장 강을 건너 하남성으로 진입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굳이 구화산을 통과해 강서성으로 진입한다는 건, 자신을 보러 오기 위함일 확률이 높았다.

‘지평.’

연호정은 연지평을 떠올렸다.

하얗고 순한 얼굴, 맑고 깊은 눈동자는 소년의 순수함과 협의(俠義)로 세워진 주관으로 가득했다.

‘그간 잘 지냈느냐?’

너무 바빠서 동생 생각도 거의 못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새 이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버린 것이다.

‘지금쯤 많이 컸겠지?’

한 해가 지나기까지 열흘도 남지 않았다. 이제 동생도 열여덟 나이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성장했을지 궁금하구나.’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짓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지평에 대한 소식, 다른 지부에서도 계속 들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리 먼 지역도 아니고, 상부에서도 명이 떨어졌거든요. 어느 곳에서든 동생분의 소식을 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맙소.”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앞으로의 여로도 무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연호정은 개방 지부를 나섰다.

거리를 걷는 연호정,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를 사람들이 연신 힐끔거렸다.

큰 키에 경갑 갑주를 찬 것도 모자라, 어깨에는 사람 몸뚱이만 한 도끼를 매고 있다. 당연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닐 거야.”

“근데 저 큰 도끼는…… 저거 엄청 무거워 보이는데? 소문의 그 벽산호장이 아니면 누가 저런 도끼를 들고 다니겠어?”

“요새 벽산호장 때문에 도끼가 유행이잖아. 설마 저 청년이 진짜 벽산호장이려고?”

“그, 그런가?”

긴가민가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누구 하나 선뜻 다가와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호정은 생각에만 몰두했다.

‘약재를 통제하고 있다……? 의원 연합의 힘이 그렇게나 강했나?’

의원 연합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만 알 뿐,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단순히 서역신녀의 일로 치부할 게 아니야.’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림맹에 의원 전문 기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재의 원활한 유통이 필수다. 그걸 의원 연합이 통제한다면, 꽤나 골치 아픈 일이겠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별 희한한 데에까지 신경을 쓰게 됐군.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는 게 좋겠어.’

그렇게 연호정이 주루로 돌아왔을 때였다.

“우와아아아아!!”

주루 최상층에서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상층부를 올려다본 연호정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소풍 왔냐, 이놈들아.”

그 환호성이 터진 곳에, 익숙한 기도 세 개가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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