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손님맞이 (4)
“신녀님.”
“끝났나요?”
“예. 실내 습기가 어느 정도 제거되었습니다. 이제 환자들을 옮겨도 될 듯싶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하면, 곧바로 환자들을 이송하겠습니다.”
“공씨 부부는 아직 옮겨선 안 돼요. 농은 다 제거했지만, 아직 열이 덜 내렸어요. 다행히 두 분 모두 젊어서 원기 회복이 빠르니, 하루 이틀 더 지켜보고 옮기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네, 조금만 더 수고해 주세요.”
“별말씀을요. 하면 이만.”
남자가 물러가자 여인이 다시 붓을 움직였다.
삭삭.
여인의 필치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팔법(八法)의 극치에 달해 있으면서도 섬세함과 신비로움이 공존하는 서체였다.
까막눈이 봐도 탄성을 지를 만큼 완벽한 그녀의 글씨는, 그녀의 외모를 닮아 있었다.
중원의 어떤 여인과도 비교하기 힘든 새하얀 피부. 황금보다도 더 밝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허리춤까지 늘어졌는데, 모발이 몹시 부드러워 금을 녹인 강물을 보는 듯했다.
여인치고 키가 컸고, 몸매의 굴곡도 완연하다. 동공은 파랬으며 골격은 제법 탄탄했고, 이목구비는 몹시 선명했다.
중원에서도 한참 서쪽, 저 천축국(天竺國)보다도 더 서쪽에 사는 민족들의 외모였다.
좋게 보면 지극히 신비로운 용모요, 나쁘게 보면 요사스러운 용모다. 중원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국적인 미인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소매를 살살 휘둘러 먹을 말린다.
서역인의 외모지만, 글씨나 행동거지를 보면 중원 예법이 몸에 밴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중원인보다도 훨씬 더 예법에 능통한 것 같았다.
먹을 다 말린 여인이 서신을 차곡차곡 접었다.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닷새 안에 도착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옆방으로 향했다.
삐이익!
방에는 세 마리의 매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여인은 그중 한 마리의 발목에 서신을 묶었다. 꽤 작은 종이였지만, 매 자체가 크지 않아서 그런지 양 발목이 가려졌다.
“만날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구나. 자, 어서 가렴.”
파드드득!
전서응을 날려 보낸 그녀가 깊은 눈으로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거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었다. 별빛은 쏟아질 것 같았고, 조금 덜 찬 달은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몹시 춥구나. 건조하기도 하고.”
여인의 입에서 허연 김이 흘러나왔다.
“중원은 어찌 이리 추울까. 남부는 겨울에도 봄날과 같다는데, 일이 끝나면 한번 가 보고 싶구나.”
아련함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일순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필시 새로 보는 약초들도 많겠지? 아, 설레라.”
창가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그녀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깃들었다.
“중원의 의술은 확실히 신비롭단 말이야? 통혈(通血)과 기맥(氣脈)이라는 것도 그렇고. 하긴, 기(氣)는 ‘그들’도 잘 다루긴 했지.”
여인은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내공이라는 건 정말 신비로워. 단전을 형성한 것만으로 이렇게 따뜻하고 든든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들에게 미리 배워…….”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
한순간 침묵이 어렸다.
매 두 마리가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알 수 없는 눈으로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눈을 감았다.
“나는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다시 눈을 뜬 그녀가 웃으며 매의 턱을 쓰다듬었다.
“너희는 좋겠다. 날개가 있어서. 지금은 이러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날아서 도망칠 수 있잖아.”
그녀가 한숨 쉬듯 말했다.
“그렇지 않나요, 잠영일호(潛影一號)?”
스르륵.
그림자가 진 어두운 구석에서, 온몸을 시커먼 붕대로 두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내의 동공 역시 여인의 그것처럼 파랬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여인의 눈은 맑고 깊은 반면 사내의 눈은 서늘하다는 것이었다.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녀(聖女)님을 뵙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안타깝게도 무탈하네요.”
“다행입니다.”
여인, 기우희(起雨姬)가 씁쓸하게 웃었다.
“확인하러 온 것인가요? 내가 흔들리고 있는지를?”
“위에서 추가적인 명이 떨어졌습니다.”
“…….”
“무림맹에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시라는 명입니다.”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전부인가요?”
“그렇습니다. 또 다른 명이 떨어지면, 그때 따로 연락을 취할 것입니다.”
“알겠어요. 더 전할 것은 없나요?”
“근래 내공심법을 익히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우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나 이들은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 기척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우희는 선천적으로 육감을 타고나서, 무공 한 줌 익히기 전에도 무수히 많은 암살자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육감은 날이 갈수록 더 예리해져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음만 먹으면 이백 장 밖에서 자신을 보는 사람의 존재감까지 잡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잠영일호의 인기척을 곧장 알아챈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잠영일호의 은신술은 중원 최고 암살자도 한 수 접어 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누구죠?”
“성녀님께서 익히신 내공심법은 삼류입니다. 원하신다면 교(敎)의 무공을 하사하겠다는 전갈입니다.”
“누굴 시킨 거죠? 인기척이나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데.”
“교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니, 원하신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교주.
기우희가 탄식을 토해 냈다.
“교주님은…… 잘 계신가요?”
“물론입니다.”
“……어디 아프시거나 한 곳은 없죠?”
“교주님께서는 신인(神人)이십니다. 이승의 병마(病魔) 따위는 그분의 옥체를 범할 수 없습니다.”
“…….”
“혹시 몰라 내공심법 두 권을 가져왔습니다. 교의 심결과 중원의 무공을 융합한 것이니, 설령 본교를 아는 자라 해도 성녀님의 무공이 교학(敎學)과 관련된 것인지는 모를 겁니다.”
스륵.
잠영일호가 비급 두 권을 탁자 위에 놓았다.
“다 외우시면 즉시 태우셔야 합니다.”
물끄러미 비급을 보던 기우희가 이내 한숨을 토해 냈다.
“이왕 온 김에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세요.”
“말씀하십시오.”
“약재가 많이 부족해요. 그간 상단 한 곳에서 도움을 주기는 했는데, 그 상단도 근래 많이 힘들어져서 약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
“제가 요청한 약재들, 닷새 안에 공수해 주실 수 있나요?”
“불가합니다.”
“…….”
“무림맹에서 호위조가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들이 약재의 출처를 확인하려 든다면 골치가 아파질 수 있습니다.”
기우희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제게 돈을 주세요. 제가 알아서 구할게요. 혹여 약재 확보가 늦어지면 환자들이 위험…….”
“성녀님께서는 이런 곳에서 하찮은 자들에게 은덕을 베푸실 분이 아닙니다.”
“……!”
“또한, 무림맹으로 침투하는 것 역시 성녀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녀님께서 이 수난을 겪고 계시는 이유는 원죄(原罪)가 있기 때문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신분 차이가 있음에도 잠영일호의 말은 비수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기우희는 알고 있었다. 잠영일호가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이리 독하게 말하는 것도 전부 자신을 걱정해서였다.
“심지어 그 원죄조차도, 성녀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교주님께서 성녀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
“부디 하찮은 자들과의 연은 이만 끊으시고, 성심을 바로 하십시오. 성녀님께서 이러신다고 포기하실 교주님이 아닙니다.”
“잠영일호.”
“예, 성녀님.”
기우희의 눈에 불이 붙었다.
“저들은 하찮은 자들이 아니에요. 우리처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에요.”
“그 피가 다르고 살이 다르기에 하찮은 것입니다.”
“…….”
기우희가 한숨을 쉬었다.
“이만 가세요. 상부에서의 명령, 잘 들었어요.”
“성녀님.”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물끄러미 기우희를 보던 잠영일호가 고개를 숙였다.
“하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스르륵.
잠영일호가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질 때도 어떤 무공을 쓰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슬픈 눈으로 창밖을 보던 기우희가 문득 탁자로 눈을 돌렸다.
달빛을 받은 두 권의 비급이 어쩐지 섬뜩하게 보였다.
기우희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녀? 신녀? 우습지. 할 줄 아는 거라곤 의술밖에 없는 주제에, 맡겨 놓기라도 한 양 돈을 달라니.”
주르륵.
기우희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비급을 들었다.
“잠영일호. 그들은 하찮지 않아요. 하찮다면, 오히려 내가 더 하찮죠.”
* * *
히히히힝!
네 마리의 말이 제각기 거친 울음을 토해 냈다.
“오늘은 여기서 쉴까?”
연호정의 말에 묵비가 입맛을 다셨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음?”
“왜 그렇게 노숙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냥 가까운 객잔으로 가면 되잖아요.”
“뭐 어때? 경치도 좋고, 이럴 때 자연과 함께해 보는 거지.”
“경치 운운하기에는 날이 너무 춥단 말이에요!”
겨울이라 눈도 많이 왔다. 혹시 몰라 털옷과 피풍의까지를 챙겨 오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 쌓인 숲에서 밤을 지새울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공 뒀다 뭐 할래? 게다가 의식만 하면 추위 따위 전혀 안 느낄 수 있잖아.”
“우리도 우리지만 말이 문제죠.”
“최고 혈통에 영약까지 먹여 키운 애들이다. 너보다 더 추위에 강할걸?”
“말을 말아야지.”
묵비가 넌더리를 내며 말에서 내렸다.
모용우가 웃으며 말했다.
“묵 부장 말도 일리가 있네. 굳이 숲에서 잘 필요가 있겠는가?”
“낭만적이잖아?”
모용우는 이 광기 어린 의동생을 설득하길 포기했다.
하기야 당장 강량만 해도 절정고수로서 강력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신경만 좀 쓰면 이 정도 추위에 타격을 받을 리는 없었다.
결국 연호정의 똥고집을 꺾지 못한 일행은 눈 쌓인 숲에서 밤을 보내야만 했다.
치이이이익!
습기 가득한 나무를 잘라 말리고 곧장 불을 붙이니, 순식간에 모닥불이 만들어졌다.
“후, 따뜻하다.”
강량이 모닥불 앞에서 양손을 펼쳤다.
연호정이 강량에게 물었다.
“배는 안 고프냐?”
“예, 형님. 밥 먹은 지 한 시진밖에 안 됐잖아요.”
“말 타는 게 어디 보통 일이냐.”
“제가 이래 봬도 칼질 좀 합니다. 형님한테 안 통해서 그렇지.”
“그러게나 말이다. 여하간 배도 든든하다니 칼 챙겨서 따라와라.”
“예? 칼이요? 왜요?”
“배 안 고프다며?”
“그런데요?”
“시간 날 때 수련해야지, 언제 할 거야? 따라와. 아버지께서 너 제대로 조형해서 데려오라더라.”
강량의 눈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좋지요.”
다소 얼빠진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만큼은 진짜였다. 강량은 재빨리 대검을 챙겨 들고 연호정의 뒤를 따랐다.
모용우가 말했다.
“너무 힘 빼지 말게. 이제 시작…… 벌써 가 버렸군.”
모용우가 묵비를 힐끔거렸다.
묵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모용우 역시 머쓱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
숨이 막힐 듯한 어색함에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도 꺼져 버릴 것 같았다.
일각 후.
모용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 피곤하면 우리도 비무나…….”
쌕쌕.
어느새 묵비는 잠이 들어 있었다. 꽤 깊게 잠들었는지, 숨소리가 아주 골랐다.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빨리도 자는군.”
결국 모용우는 두 시진 동안 모닥불만 뒤적거려야 했다.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