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손님맞이 (2)
“연 군장 왔는가.”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군사님을 뵙습니다.”
제갈문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천지가 진동하더군. 단체 훈련이라도 하는가 싶었더니만, 그게 아니었나 보네.”
군사라는 직책상 두뇌 능력이 부각되어서 그렇지, 제갈문호 역시 육대세가의 가주였다. 지닌바 감각은 초절정고수답게 아주 예민했다.
“한데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허허, 일단 앉게나.”
“예.”
잠시 후, 탁자 위에 두 잔의 차가 놓였다.
“연 군장과 둘이서 할 얘기가 있다. 아연이는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거라.”
제갈아연이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저도 멸사군의 군산데요.”
“아연아.”
“쳇, 알았어요.”
제갈아연이 나가자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광신삼교 건 때문입니까?”
“그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세. 지극히 심각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들이 당장 중원을 침공할 것 같진 않으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오늘 자네를 찾아온 것은 이것 때문일세.”
제갈문호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건넸다.
서신의 첫 줄을 읽은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역신녀(西域神女)?”
“그렇다네.”
“뭡니까? 이 대충 지은 듯한 별호는?”
제갈문호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확실히 자네 말마따나 대충 지은 것 같군.”
“그러니까요.”
“서역신녀는 별호 그대로 서역인일세. 신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서신을 더 읽어 보면 알게 될 게야.”
잠시 후.
“호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기특함이 묻어 나오는 미소였다.
“신(神)에 이른 의술을 가난한 병자들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인(義人)이라…… 대단한데요?”
“그렇지? 비록 서역인이지만, 그 봉사 정신과 선한 품성 덕분에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존경했으면 존경했지.”
“피부색 다르다고 무시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죠.”
“허허, 맞는 말일세. 사실 그런 걸 떠나,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라고 하더군. 무시하고 싶어도 쉽게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라던가?”
“흐음.”
연호정이 서신을 내려놓았다.
“한데 이 대단한 여자가 어쩐 일로 무림맹에 온답니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어쩐 일이라기보다는, 무림맹이 창설되었을 때부터 초청하려고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다네. 하지만 신녀가 돌봐야 할 환자들이 많다며 계속 거부했었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우직하고 성품 좋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자신은 하지 못하는 일을 눈치 보지 않고 하는 사람, 돈과 유명세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환자들 때문에 못 온다고 하는 걸 억지로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해서 계속 기다렸는데, 얼마 전에 맹의 초청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더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굳이 이 사람을 초청하신 이유가 뭡니까? 물론 보기 드문 선인(善人)이니 한번 모시는 거야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어째 말씀을 들어 보니 따로 목적이 있는 듯합니다.”
“허허, 역시 자네는 날카롭구먼.”
제갈문호의 눈이 진지해졌다.
“무림맹에 의원 기관을 만들 생각일세.”
“무림맹 소속 의방을 만든다고요?”
“의방이라고 표현하긴 좀 그렇다네. 그보다 더 넓은 개념이니까. 하지만 뭐,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니지.”
“흐음.”
“세상은 거칠다네. 갈등과 싸움이 수시로 일어나지. 그리고 그 세상의 중심에 무림맹이 있다네. 앞으로 무림맹 소속 무사들이 수도 없이 다칠 터인데, 언제까지 의원들을 수배해 놓을 순 없는 노릇 아니던가.”
“한데 이미 무림맹에는 그 비슷한 집단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있다네. 모두가 실력이 괜찮은 의원들이지. 하지만 그들은 계약자들일 뿐일세. 계약이 끝나게 되면 연장하거나, 아니면 다른 의원들을 섭외해야 하는 상황이네.”
“그러니 아예 무림맹 소속의 기관을 만들자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네. 이 부분만큼은 봉공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한 사항이지.”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장장이와 의원은 무사의 가장 친한 벗들이지요. 하지만 무림맹 소속의 의방을 따로 만든다…… 이거 좀 묘하군요.”
“왜? 걸리는 거라도 있는가?”
“걸린다기보다는, 소속 의방까지 만든다는 계획에는 앞으로도 무림맹을 해체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저변에 깔린 것 같습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더 감탄하기도 지치겠네. 단숨에 거기까지 파고들다니, 자네 안목은 참으로 놀랍네.”
“자꾸 칭찬해 주셔도 됩니다. 이젠 저도 익숙해져서 기분 좋더라고요.”
“떽, 이 사람아.”
“클클.”
“그 부분에 관해 우려를 표하는 봉공도 많았네.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네.”
“하긴, 지금으로선 당장의 피해를 줄이는 게 중요하니까요.”
“잘 보았네.”
제갈문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광신삼교의 존재. 그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아무도 몰라. 그렇다면 무림맹의 미래를 생각하기 이전에, 실력 좋은 의원들을 되도록 많이 보유해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음, 맞는 말씀입니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서역신녀라…… 많이 유명한 사람입니까? 저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아는 사람은 다 알지. 물론 그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모른다네. 하긴, 실력과 성품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묻힌 감은 있어.”
“예?”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어디나 파벌은 존재하기 마련 아니던가? 중원의 의맥(醫脈)을 잇는 자들에게는 그녀의 존재가 눈엣가시였던 모양일세.”
“헐.”
“서역신녀의 의술은 서역과 중원의 의술을 합친 것으로, 중원의 어떤 명의들보다도 뛰어나다고 하더군. 하여 중원의 의맥을 잇는 자들은 그녀의 의술을 사도(邪道)라며 비방하더라, 이 말일세.”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몸 고치는 걸 업으로 삼은 이들이 별 쓸데없는 곳에 정력을 쏟는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어찌 되었든, 그녀의 유명세가 천하를 울리지 못한 것은 중원의 의원들 탓이 크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러나저러나 무림맹 측에서도 본고장 의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순 없었을 텐데, 용케 서역신녀를 초청할 생각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통이나 돈이 아니라 실력과 품성일세. 게다가 서역신녀는 젊어. 여러 사람과 함께 성장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보았네.”
“좋은 생각입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래서, 제가 할 일이 뭡니까?”
“이미 짐작하고 있잖은가?”
“호위입니까?”
“그렇다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말했듯, 서역신녀에게는 적이 많다네. 동시에 그녀를 노리는 자들도 많아. 지금껏 아무도 나서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림맹으로 온다는 소문이 나면 혹여 묵룡부나 그 외의 단체가 그녀를 공격 혹은 납치할까 무섭네.”
“그럼 은밀기동(隱密機動)에 특화된 자들을 보내는 게 낫지 않습니까? 몰래 모셔 오면 되잖아요?”
“무엇이 무서워서?”
“예?”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천하의 무림맹이 뭐가 무섭다고 은밀하게 움직이나? 그저 능력 있는 사람을 보내 당당히 데리고 오면 될 것을?”
“갑자기 무슨 자신감이십니까?”
“허허, 봉공들 대다수의 생각이 이렇다네.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세. 조심히 움직여야 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저런 분란을 감수하고서라도 대범하게 나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무림맹의 힘을, 절 통해 보여 주고 싶으신 겁니까?”
“여러 이유 중 하나지.”
“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올해 들은 농담 중 가장 고약한 농담이었네. 게다가 자네에게 바라는 것은 능력만이 아니야.”
“그럼요?”
“명성.”
“흠.”
“건곤호장 모용우와 함께 당대 후기지수 정점에 오른 벽산호장의 이름값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닐세. 그 명성은 이미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어.”
“더 짜증 나는데요. 실력 한번 확인해 보자고 덤비는 놈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다 깨부수고 오게.”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수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되잖나?”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멸사군 전원이 움직입니까?”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하게.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가든, 전군을 끌고 가든.”
“출발은요?”
“닷새 안에는 출발해 줬으면 하네.”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군은 요새 어떻습니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조용하네. 일전의 일로 확실히 몸을 숙이고 있다네.”
“그렇군요.”
“자네 말마따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네. 뭔가 수상쩍은 움직임을 발견하면 바로 말해 줌세.”
“감사합니다.”
몸을 돌리던 연호정은 문득 든 생각에 멈칫했다.
“군사님.”
“음? 왜? 더 할 말이 있는가?”
“이번 임무 말입니다. 굳이 멸사군이 아니어도 됩니까?”
제갈문호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멸사군이 아니어도 되냐니? 왜? 다른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가?”
“그렇습니다.”
“누구랑?”
연호정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괜찮겠는가?”
“이름값이 중요하다면서요.”
“물론 그렇네만…… 굳이?”
“이것저것 알아볼 것도 있으니,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함께하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
“뭐,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제갈문호가 피식 웃었다.
“자네에게 나름의 생각이 있다고 믿겠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수고해 주게. 이것 참, 그 어려운 임무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런 일을 떠맡겨서 미안하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군사님께서 시키셨기 때문이 아니라 제 의지대로 가는 겁니다.”
“허허, 알겠네. 바쁠 텐데 이만 가 보시게.”
“그런데 군사님.”
“음?”
“생각해 보니 여긴 멸사군 본부인데, 왜 제가 나갑니까?”
“……커헉!”
“살펴 가십시오.”
“미, 미안하네.”
제갈문호는 민망했던지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저 양반도 한 번씩 보면 사람이 참 귀여워.”
* * *
“흐음.”
“헉헉!”
연위가 턱을 쓰다듬으며 강량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기본기가 출중하구나. 그 튼튼한 기반만으로도 어지간한 고수는 상대도 안 되겠어.”
“콜록콜록! 헉헉!”
“하지만 너무 우직하기만 하구나. 솔직함은 좋은 덕목이다만, 지나치게 정직한 공격은 필연코 반격의 실마리를 주기 마련이다.”
스르릉.
납검한 연위가 강량을 일으켜 세웠다.
“헉! 제, 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또 솔직하지 못하구나. 일 합만 더 나누었다면 넌 기절했을 것이다.”
부축을 받고 가까스로 일어나긴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강량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면목이 없습니다, 가주님.”
“허허, 그리 말하지 마라. 지금까지 이 악물고 버틴 게 더 대단하다.”
연위가 강량을 평상에 앉혔다.
“흐음, 체력적인 부분에 있어선 따로 보완할 필요가 없을 듯하고, 귀철검문의 무공들 역시 하나하나 절기가 아닌 것이 없더구나. 내 너의 무공을 더 끌어올려 줄 수야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굳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위는 순간 하나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 났다.”
“헉헉! 예?”
잠시 후, 파군각으로 연호정이 들어왔다.
“아버지.”
“왔느냐?”
“예.”
“안 그래도 네게 부탁할 것이 있다.”
“어떤 거요?”
연위가 턱짓으로 강량을 가리켰다.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구나.”
연호정이 강량을 보았다. 강량의 얼굴에 불안함이 번졌다.
반면 연호정의 얼굴엔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척하면 척이다. 아버지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대번에 꿰뚫어 본 그였다.
“호오, 출정 전에 손맛 좀 볼 수 있겠군요?”